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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승려 한시선
개정판
평민사 | 부모님 | 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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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승려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무의자, 원각국사 충지, 진정국사 천책, 태고국사 보우, 백운화상 경한의 한시를 모은 책으로, 고려시대는 불교사회여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불문 에 귀의한 승려들도 많고, 대각국사처럼 왕자의 신분으로 출가한 승려도 있었다.

  출판사 리뷰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승려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무의자, 원각국사 충지, 진정국사 천책, 태고국사 보우, 백운화상 경한의 한시를 모은 책으로, 고려시대는 불교사회여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불문 에 귀의한 승려들도 많고, 대각국사처럼 왕자의 신분으로 출가한 승려도 있었다. 불교와 사회의 관계라든가 사대부들과의 관계가 조선시대와는 달랐다. 불교가 그만큼 사회와 가까이 있었던 셈이 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스님들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시를 지었으 며, 이 책을 엮으면서 선시가 아닌 시들도 많이 골랐다. -머리말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혜심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은 1178년 전라도 나주 화순현(和順縣)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아버지 최완(崔琬)과 어머니 배씨(裵氏)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유학을 공부해 24세인 12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닦게 된다.본래부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1202년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을 모시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그는 보조국사로부터 다양한 시험을 통과한 뒤 1210년, 지눌의 법석을 공식적으로 이어받는다. 지눌로부터 이어받은 수선사(修禪社) 2대의 자리는 당시의 사회적·종교적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였다. 수선사는 당시 왕권과 결탁해 온갖 부패와 모순을 낳았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보며 지눌이 결성한 실천적인 결사 운동이었다. 지눌의 이러한 결사 운동은 당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던 최씨 무신 정권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혜심은 항상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종교인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종교인이 권력과 밀착되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을 알고 있었기에, 승려 본연의 자세와 개혁 정신을 유지하면서 수선사를 당시 정신계의 핵심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후 20여 년간 수선사를 이끌다가 1234년 6월 26일 57세(법랍 32)의 나이로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했다.스님이 남긴 책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선서(禪書)로서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1125칙(則)과 선사들의 염송(拈頌)을 합쳐서 총 30권으로 완성한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생전에 행하신 각종 법어를 모은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등이 있다.

지은이 : 경한
고려 말기인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생존한 선사. 태고 보우太古普愚, 나옹 혜근懶翁惠勤과 함께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일컬어진다. 행장行狀과 비문碑文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본 어록과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그의 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그나마 단서이다. 1351년에 호주 하무산霞霧山으로 석옥 청공石屋淸珙을 찾아가 문답을 나누었고, 이듬해 정월에 다시금 석옥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여 배운 후에 그해 3월에 고려로 들어왔다. 1353년 정월 17일 낮에 좌선하던 중에 영가 현각永嘉玄覺 대사의『증도가證道歌』 구절을 떠올리고 깨침을 얻었다. 1354년 6월에 법안法眼 선인禪人이 모셔온 석옥의 사세송辭世頌을 받고 안국사에서 재를 베풀었다. 1365년에 나옹의 천거를 받아 해주 신광사神光寺 주지가 되었고, 1368년에는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원당願堂인 흥성사興聖寺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1369년을 전후해서는 고산암孤山菴에 머물렀다. 공민왕 20년(1370)에 개경에 있던 광명사廣明寺에서 공부선功夫選이 있었는데, 이때 주맹主盟인 나옹과 함께 시관試官으로 참석하였다. 입적하기 두 해 전인 1372년에 『직지심체요절』 2권을 마쳤으며, 1374년에 취암사鷲 岩寺에서 세수 7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지은이 : 충지
1226년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법환(法桓)인데 후에 충지로 고쳐 불렀으며, 자호(自號)는 밀암(宓庵), 속성명(俗姓名)은 위원개(魏元凱), 탑호(塔號)는 보명(寶明)이고, 원감국사는 그의 시호(諡號)다.9세에 취학해 경서(經書) 자사(子史)를 암송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일찍이 출가했다가 어머니의 청으로 환속했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는 춘위(예부시)에 장원으로 뽑혀 재질의 탁월함이 입증되었다. 영가(永嘉: 지금의 안동)서기(書記)를 거치고, 그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으며, 옥당(玉堂)에서는 문체가 수려해 많은 선비들이 탄복했다. 그는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29세에 다시 출가했다. 당시 고려는 몽고(蒙古)와의 전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으며 무인 정권의 부패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그가 다시 승려가 된 것은 고귀한 생명이 무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하고 백성의 고통을 공유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고, 3년 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이때부터 승려들에게 보통 있게 되는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5세에 정혜사(定慧寺)에 이주했다. 61세에 조계 6세(世)로 임명되었다.충지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우국의 세월을 보내면서 조계 법맥(法脈)을 계승하다가 1293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지은이 : 의천
의천은 고려 제12대 국왕 문종과 이자연의 장녀 인예왕후 이씨의 넷째 아들로 1055년 9월 28일 궁중에서 태어났다. 의천은 문종 19년(1065) 5월 14일 영통사 난원(爛圓, 999∼1066)의 문하로 출가해 화엄교학을 배웠다. 의천은 출가 이후 1985년 송나라에 가기 전까지 교장을 모으고 강론과 수학에 힘썼으며 화엄교학을 중심으로 유교나 도교까지 섭렵했다. 1085년 제자인 수개, 양변 등과 함께 송나라에 간 의천은 1085년 5월 21일 변경(?京)에 들어가 철종 황제를 만나고, 화엄종 승려인 유성, 진수 정원 등을 비롯해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을 방문했다. 의천이 송에서 폭넓게 사상을 교류하면서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사상 체계를 성립한 시기였다.의천은 1086년 5월 29일 14개월여의 입송 구법을 마치고 교장 3000여 권을 수집해서 귀국해,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송·요·일본 등지에서 구한 제종교장(諸宗敎藏)을 간행하는 사업에 주력했다.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개창하려는 노력이 좌절되면서, 1094년 2월에는 홍원사로 옮겨 주지가 되어 교학을 강의했지만 곧 해인사로 옮겼다. 인주 이씨인 이자의, 흥왕사 지소의 세력에 밀려 해인사에 퇴거했던 의천은 숙종의 즉위 이후인 숙종 1년(1096) 개경의 흥왕사로 돌아와 주지가 되어 강학했다. 숙종 2년(1097) 5월에는 국청사가 완공되었고 흥왕사 주지를 겸하면서 천태교관을 강의했다. 이 시기 의천의 불교계에서의 역할은 화엄종과 천태종의 병립을 통해 불교계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의천은 숙종 5년(1100)에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하고, 숙종 6년(1101) 2월에는 천태종 승과 대선을 실시해서 40명을 선발했다.의천의 활동 가운데 국가적 사업으로는 지남관, 겸제원을 복구해 백성의 편익을 도모했고, 국가의 중대사를 자문했으며, 주전(鑄錢)을 건의해 시행하는 등 숙종의 개혁 정치를 도운 것을 들 수 있다. 의천은 숙종 6년 10월 지병으로 총지사에서 사망했다. 의천의 사후, 불교계는 재편되어 그의 화엄종과 천태종 문도들은 분열했다. 이후 의천의 화엄과 천태 사상은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고, 그의 사상과 계보를 달리하는 균여계 화엄종과 법안종의 사상 경향성에 주목한 백련사 결사의 중심인물인 요세(了世)의 천태종이 고려 후기 불교계를 주도했다.

지은이 : 보우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태고는 호이고, 법명이 보우다. 그는 출가 이후 일관되게 간화선 수행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간화선을 절대시해 이후 불교계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화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46세에 중국으로 가서 선지식을 두루 찾았다. 그가 원에 간 것은 중국 임제종의 법통을 계승하고자 한 것으로 결국 석옥청공에게 인가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그는 백운암, 태고암 등에 머물렀고, 공민왕에 의해 왕사에 책봉되어 원융부를 통해 교권을 장악했다. 이후 신돈이 등장하면서 속리산에 유폐되는 등 고난을 겪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태고법통설이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한국 선불교의 정통 선사로서 추앙되고 있으나 1960년대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지눌법통설이 제기되어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지은이 : 무의자

지은이 : 천책

  목차

[신라시대 승려 한시선]
〈금강삼매경론〉을 다 짓고 나서 - 원효_ 17
미타증성게 - 원효_ 18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 사복_ 19
사리찬 - 자장_ 21
세속으로 돌아오며 - 설요_ 22
남천축국 나그네 길에서 - 혜초_ 23
동자를 산 아래로 내려보내며 - 김지장_ 24

[대각국사 의천]
비 속에 말을 타고 가면서_ 27
칠장사에서 혜소국사의 사진에 예배하다_ 28
우연히 써서 스스로 깨닫다_ 29
우연히 짓다_ 30
<남산율초>를 강의하다가 우연히 한 절구를 짓다_ 31
총명원_ 32
삼각산 영취사에서 지어 남기다_ 33
속리사로 돌아가는 도생 승통을 보내며_ 34
봉선사로 돌아가는 문인 낙진대사를 보내며_ 35
학도대사 도린의 문류 편찬의 일을 사양하는 계문을 보고 송을 지어 권장하다_ 36
현거사에게_ 37
산문에 찾아온 원연대사에게_ 38
숨어 사는 사람의 산 속 집에 부치다_ 39
우연히 일절을 읊어 담대사에게 부치다_ 40
해인사에 물러나 있으면서 짓다_ 41
해동교적을 읽고_ 43
가야산 천성사에 묵으면서_ 44
대궐로 가는 길에 예전 있던 절에 써준 시_ 45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진각국사어록
맑은 거울_ 49
국사가 돌아가신 날_ 50
결제에 들어_ 51
망령을 위하여_ 52
설날 아침_ 53
화정선자의 말을 생각한 끝에_ 54
동도유수의 청으로 영묘사에서_ 55
오어사에 가서_ 57
마음과 짝하지 말라_ 58
안동 통판의 관아에서_ 59
관음사 반송 아래서 대구군수의 청으로_ 60
중사 손원예가 적병을 진압해 달라고 청하다_ 61
본래부터 한계가 없는데_ 62
백운암에 가서 청을 받고 대중에게 보이다_ 63
부채_ 64
비가 오자 대중에게 지어 보이다_ 65
밤에 앉아서 대중들에게 계시하다_ 66
선당에서 대중에게 보이다_ 67
만연사의 경찬을 시작하는 날 대중에게 보이다_ 68
희원도인에게_ 69
각운스님에게_ 70
열반게_ 74

[무의자시집]
층시_ 77
경루자_ 79
식심게_ 81
복성 가는 길에서_ 82
혼자 분개한 노래_ 83
천지를 대신하여 대답하다_ 86
추석날 달을 구경하다_ 87
묘고대 위에서 짓다_ 88
사시유감 회문체_ 89
산놀이_ 92
그림자를 보고_ 93
작은 연못_ 94
봄날 연곡사에서 놀다가 불당의 늙은 스님에게_ 95
인월대_ 96
저물며 개다_ 97
전물암에 머물면서_ 98
최전이 법을 구하기에 이 글을 써서 보내다_ 99
목련_ 100
비 온 뒤_ 101
물가에서_ 102
죽존자 _ 103
대인명_ 104
식영암명_ 106

[원감국사 충지]
그윽한 곳에 살다_ 109
산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삼랑루를 지나면서 배 안에서 짓다_ 110
한가한 가운데 스스로 기뻐하다_ 111
정혜사에 들어가 게송을 짓다_ 112
고사리를 캐고 돌아와_ 113
한가한 가운데 우연히 짓다_ 114
안렴사에게_ 116
시랑 김원에게_ 117
새로 평양태수가 된 아우에게_ 118
한가한 가운데 우연히 짓다_ 119
삼월 이십사일 천호산 개태사에서 자다_ 120
절구_ 121
한가한 가운데 우연히 짓다_ 122
영남 백성들이 고생하는 모습_ 124
중양절에 국화를 보고 느끼다_ 128
계미년 사월 초하룻날 비가 내리자 농사를 걱정하며 짓다_ 131
우연히 짓다_ 134
암자 주인에게_ 135
영소가 찾아와 감사하다_ 136
한가롭게 지내며 여러 가지를 짓다_ 137
산에 살면서_ 138
자서_ 139
산 속에 찾아왔다가 자지도 않고 돌아간 옛친구에게_ 140
가는 봄을 아쉬워하다_ 142
평양에 새로 온 군수에게_ 144
임종게_ 145

[진정국사 천책]
중서사인 김녹연에게 답하다_ 149
동문원 평사 정흥이 백련사에 들어오며 부친 시에 답하다_ 151
낭주태수 김서가 부쳐준 시에 답하다_ 152
지제고 임계일에게_ 153

[백운화상 경한]
천호암에서 석옥화상에게_ 157
지공화상께_ 158
또 십이 송을 지어 지공화상에게 바치다_ 159
임금님의 부름을 사양하면서_ 163
을사년 팔월 어느날 신광사 주지직을 사양하면서_ 164
지공화상의 초상화를 예찬하다_ 166
산에 머물며_ 167
백운이라는 호에 감사하다_ 173
금강산에 들어간 나옹화상에게_ 174
낙가산으로 사람을 보내면서_ 175
죽은 사람을 슬퍼하다_ 177
임종게_ 178

[태고국사 보우]
태조전에서_ 183
태고암가_ 184
구름과 산_ 191
참선명_ 194
단암_ 197
은계_ 198
구름과 산_ 199
석계_ 200
석가가 산에 머무는 상_ 201
오도송_ 202
조주의 얼굴_ 203
임종게_ 204

[나옹화상 혜근]
오도송_ 207
눈 속에 핀 매화_ 208
휴휴암에서_ 209
지공화상이 입적한 날_ 210
산에 살며_ 211
모기_ 213
환암_ 214
외로운 배_ 215
큰 원_ 216
철문_ 217
빈 암자_ 218
스승을 뵈러 가는 환암장로를 보내며_ 219
부모를 뵈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휴선자를 보내며_ 220
인선자가 게송을 청하기에_ 221
뇌선자가 게송을 청하기에_ 222
혜선자가 게송을 청하기에_ 223
보선자가 게송을 청하기에_ 224
해를 마치고 은혜에 감사하다_ 225
염불하는 여러 사람에게_ 226
세상을 경계하다_ 227
原詩題目 찾아보기_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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