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청년 저자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를 만나 그의 철학과 함께 삶의 두려움을 마주하고 싸워 가며 써 내려간 철학-에세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철학-시(詩)를 통해 원자론이라는 사물의 질서가 윤리학적 비전과 함께 있음을 말하고, 욕망으로 들끓는 삶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족으로 충만한 베누스의 삶으로 인도한 바 있다.
이 책은 루크레티우스와의 만남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만남의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씨앗을 남기는 과정으로 담아냈다. 이 사계의 과정을 통해 저자는 공학도이던 자신이 철학적 배움의 길에 들어선 과정, 루크레티우스의 삶과 고대 그리스의 자연학, 원자론에 대한 사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로 보고 화해와 치유에 이른 이야기, 사랑과 우정의 경험과 부족함 없는 검소한 삶을 깨달아 가는 변화 등을 가감 없이 들려준다.
특히 3부 ‘가을’에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구절들과 오늘날 청년의 신앙, 사랑, 돈, 우정에 대한 고민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사물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의 기쁨에 다가갈 수 있음을, 고대 원자론의 사유와 공동체적 에티카를 통해 오늘날 청년의 구체적 삶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책.
출판사 리뷰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지은이 인터뷰
1. 루크레티우스는 누구인가요? 어떤 인물이고 어떤 매력이 있기에 책까지 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루크레티우스는 대체 누구일까요? 분명한 건 그가 은둔적인 삶을 살다간 무명 인사라는 점입니다. 그가 어느 집 자식인지, 누구를 만났는지, 뭘 하고 살았는지 등의 기록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가 기원전 1세기 로마에 살았었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시를 썼다는 빈약한 정보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 인물의 삶을 추측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자신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봤으며 또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하고 물어보는 거죠.
기원전 1세기의 로마는 팍스로마나 직전의 고도성장기로, 지중해 정복을 막 완료하고 ‘모든 길이 통하는’ 제국으로 나아가던 팽창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내란이 끊이질 않았고 죽음은 항시 목전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막대한 부와 함께 흘러들어온 종교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도시에는 점점 더 커다란 경기장과 목욕탕과 사원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충혈된 눈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습니다. 죽음과 오락과 사치와 향락과 미신이 함께 만연한 시대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이 환란의 한가운데를 거닐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아픈가? 과연 오락과 종교가 우리를 낫게 할 수 있는가? 진정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 속에서 그는 펜을 들었죠. 그리고 약을 제조하는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이때 재료가 된 것은 해방적 쾌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다시 불러와서 그것을 채색하고 변형시켜 시라는 형태로 재창조해낸 것입니다.
정리하면,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자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영혼의 병증을 진단한 의사입니다. 또한 치유 즉 구원의 문제를 신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시키는 철학자이자, 그 모든 것을 딱딱한 산문이 아니라 감미롭고 세련된 노랫말로 바꾸어 세상에 퍼뜨린 시인입니다.
사실 루크레티우스가 이런 인물임을 알게 된 것은 그에 대한 책을 거의 다 써갈 즈음이었습니다. 그의 매력도 마찬가지지요. 매력이 있어서 쓰게 된 것이 아니라, 쓰다 보니 이런저런 매력들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루크레티우스의 가장 큰 매력은, 그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냥 그렇게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원자론의 지혜에 비추어 우리는 우리 두려움 아래 놓인 미신들과 표상들을 하나하나 털어낼 수 있고, 그렇게 털어내는 만큼 지복(至福)에 한발 다가가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끝으로, 그의 필력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생생한 비유들과 세련된 묘사들은 그의 글에 쏙 빠져들게 만듭니다. 이천 년 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저(시의 ‘ㅅ’도 모르는 이과생!)에게 아름답게 읽힐 정도면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는 어땠을까요? 광고는 아니지만 한번 슥 들춰보시면 공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2.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한마디로 어떤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보기에 따라 철학책이라고도 할 수 있고 과학(물리학)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병법서 혹은 의술서로 읽었습니다. 제 마음을 채우고 있는 두려움, 애착, 원망, 무력감과 같은 정념을 마주하고 대결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닦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참된 철학이나 과학이라면 모두 싸움 및 치유의 기술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닥쳐오는 현실 속 정념들과 그 정념들 아래 놓인 미신 및 표상과 싸우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아픈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철학일까요? 물론 이 싸움에 사용되는 무기는 부실하거나 공허한 공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학적 환상들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약은 자연에 입각한 앎, 바로 자연학입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사상적 베이스는 원자론입니다. 고대 원자론은 천변만화하는 원자들의 운동으로부터 만물이 빚어져 나온다고 말합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창조도 소멸도, 몸도 영혼도, 감각도 이성도 모두 원자들의 이합집산입니다. 이 결합과 해체의 흐름에는 초월적인 원인이나 목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신의 의도 따위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신도 원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죠. 오직 원자와 허공만이, 그리고 도처에서 일어나는 흐름들과 마주침들만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나머지는 잠깐 구성되었다가 또 다른 것으로 변해가는 임시적 형태들입니다.
이런 물리학적 토대 위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의 번뇌와 그 뿌리를 진단합니다. 신, 죽음, 사랑, 재산, 병, 천둥, 지진 등과 같이 우리의 두려움이 가장 짙게 고여 있는 대상들의 자연적 원인들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수십 페이지에 걸쳐 열 개도 넘는 이유를 들어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밝힙니다. 비록 어떤 설명은 이 시대에 완벽하게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성 어린 문장들은 현재 제가 마주한 두려움에 대해 묻고 싸워갈 용기를 줍니다. 앓고 있는 병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낫고자 하는 힘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병법서이자 의술서입니다.
3. 이 책(『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에서 첫 질문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왜 베누스(비너스 혹은 아프로디테)를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가, 입니다. 루크레티우스가 베누스를 강조한 까닭은 무엇인지요?
베누스가 뭐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다 읽고 나자 저는 대뜸 궁금해졌습니다. 왜 루크레티우스는 이 걸출한 철학-시의 서두를 베누스 찬미로 열고 있을까? 처음에는 그냥 좋아서 그랬나 보다, 하고 지나갔지만 다시 질문해볼수록 여기에 루크레티우스 철학의 핵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에게 베누스는 단순한 사랑의 신이 아니라 만물을 생식시키고 성장시키는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바다와 땅을 생명들로 채워주는 힘도, 산들과 강들을 꽃피우는 힘도 베누스입니다. 베누스는 존재하는 것들을 서로 만나게 하고 수태하여 또 다른 무언가를 낳게 만드는 힘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당신은 홀로 사물들의 본성을 조종하시고, / 당신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빛의 신성한 해안으로 / 생겨 올라오지 못하며, 어떤 것도 행복하게, 사랑스럽게 되지 못하니.”(1:21-24)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가 ‘사물들의 본성’ 즉 원자들의 흐름을 조종하는 유일한 원리임을 넌지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누스를 운명을 결정하는 권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베누스는 사물들 각각이 내재하고 있는 본능이자 의지이지 외부에서 부여되는 작용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베누스는 결정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성을 벗어나게 하는 힘입니다.
베누스는 루크레티우스의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클리나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클리나멘은 원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직선적 경로를 미세하게 이탈하는 사건 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이 찰나적 비껴남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마주침이 시작되고, 그 소란으로부터 전에 없었던 질서가 조직되고 새로운 국면이 열립니다. 우주의 무궁한 흐름에서 솟아나는 모든 만남, 변화, 결합 심지어는 파괴나 죽음까지도 포함한 창조력이 바로 베누스입니다.
4. 루크레티우스와의 만남은 선생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지난 몇 년간 루크레티우스와 동고동락하며 글을 쓰면서 돈, 장래, 신, 자유, 사랑, 우정 등 저 자신의 가장 비근한 문제들과 씨름할 수 있었고, 죽음이나 자의식과 같이 크고 어려운 문제들도 건드려볼 수 있었습니다. 되든 안 되든,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물고 늘어져 보았습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깨끗이 해결되지 않았고 제가 저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처럼 두려운 눈을 하고 그 문제들을 헤매지 않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나름의 샛길들을 발견해서인지, 조금 여유로워졌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제가 느끼는 변화를 생각해보자면, 조급함이 좀 줄어든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성격 탓에 안팎으로 번져나갔던 원망과 불만족이 줄었습니다. 사건들을 겪어갈 때마다 원자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루크레티우스라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찾아오곤 하는데, 그렇게 묻고 있다 보면 전에는 끈질겼던 정념들이 휘리릭 사라지는 때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조금 더 건강해졌습니다. 이제는 저를 향해 있던 시야를 좀 넓혀서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바로 글쓰기의 비전입니다. 저는 루크레티우스의 쓰기-실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철학을 시라는 형태로 썼습니다. “마치 치료자들이 아이에게 역겨운 약쑥을 먹이려 / 할 때, 먼저 잔의 입 테두리를 / 꿀의 달콤한 황금빛 액체로 칠하듯”(1:936-939) 심오하고도 난해한 가르침을 세련되면서도 듣기 쉬운 시의 언어로 바꿔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 계층에게 제한되었던 귀중한 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했습니다.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이런 시 쓰기 실천이 대단한 자비심이라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인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지만, 한 편의 글을 쓰더라도 그와 같은 마음의 동기 위에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5. 끝으로, 특별히 나누고 싶은 루크레티우스의 말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만일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 중량으로써 그를 지치게 하는 무게가 들어 있음을 확연히 느끼듯,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겼으며, 어디서 와서 그렇게 큰 해악의, 말하자면, 돌덩이가 가슴속에 들어앉았는지도 분별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에 보듯이 삶을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 각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서, 마치 그러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기라도 한 듯, 항상 자리 바꾸기를 추구하면서. (...) 이런 식으로 각 사람은 자기를 피한다. 하지만 물론 사실상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자기 뜻과는 달리 그것에 집착하고 또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프면서도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대로 본다면, 각 사람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우선 사물의 본성을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3:1053-1072)
저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대와 우리 시대가 그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쟁과 질병의 소식이 늘 들려오고 무지막지한 콘텐츠와 오락거리가 넘칩니다. 구원을 약속하는 각양각색의 종교도 넘칩니다. 진짜 종교뿐 아니라 의학, AI, 보험, 주식, 코인 같은 유사종교들 말이죠. 물론 이 시대가 말세라거나 디스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새로운 삶의 실험과 명랑한 변화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는 것, 아프면서도 아픈 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괴로움은 느끼지만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자라났는지는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냥 뭉개거나 다른 자극제를 찾아 덮어두고 ‘자리 바꾸기’를 계속합니다. 이런 외면은 콘텐츠와 마취약이 이토록 많은 시대에는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루크레티우스 ‘자기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기를 권합니다. 변화는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우리가 우리 가슴속을 채운 돌덩이에 대해 묻고 그 원인들을 볼 수 있는 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지금처럼은 살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고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처럼 살지 않고자 한다면 이 괴로움을 불러오는 원인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요. 왠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을 사람들과 이 구절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땅과 하늘의 이치가 포착되어야 한다, / 폭풍들과 눈부신 번개들이 노래되어야 한다, /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대체 어떤 원인에서 생겨나는지. / 그대가 정신 놓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말했다. 무엇보다 가슴속을 정화해야 한다고. 중요한 건 그가 이 정화작업의 수단을, 즉 우리가 사로잡힌 정념과 탐진치 번뇌와 싸우는 무기를 종교적 위안이나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혼도, 신도, 우주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정. 이러한 설정으로부터 인식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펼치면서 루크레티우스는 우리를 지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한다.(1부 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중에서)
참 의아하다. 나 같은 촌놈이 어쩌다가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으며, 이런 무식이가 무슨 일로 철학 공부를 한다고 책을 파고 있는 걸까? 게다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루크레티우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무슨 영문인지! 새벽녘, 나도 모르게 센티해지면 문득 지금의 생활이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다르겠는가마는, 내 짧은 인생행로에는 자꾸만 의문이 남고 곱씹게 되는 지점들이 몇 개 있다. 비슷하게 흘러가던 날들이 갑자기 다른 길로 돌아서게 되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변곡점들 말이다. 지금으로선 두 가지가 떠오른다. 태어나고 자란 교회공동체를 나오게 된 때. 그리고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을 그만두던 때. (......) 그런데 웬걸, 복학 후 한 학기를 마친 나는 휴학을 했고 그해 가을 학교를 그만뒀다. 환경을 살리는 일과도 큰 관련이 없고 사회적 성공과는 완전히 반대에 놓인, 연구실을 오가는 백수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희한한 궤도 변경이다. 지금은 모두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동기들을 뒤로하고, 안정이나 출세와는 동떨어진 길에 들어선 것이다. 역시 ‘어쩌다 보니’.
이 두 사건이 의아한 이유는, 내가 기질상 그 공간의 코드에 맞춰 적응해 가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데 있다. 교회에도 회사에도 꼭 어울릴 법한, 주어진 규범대로 살아가는 타입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의 종도 착실한 환경공학도도 되지 않았다. 나는 시골 교회의 궤도로부터, 그리고 대학과 성공의 노선으로부터 이탈했고, 사는 공간도, 생활 방식도, 원하는 것들도 아주 달라졌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아직도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뾰족하게 짚어 낼 수가 없다. 확실한 건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2부 여름 : 좌충우돌, 배우고 익히는 중입니다 중에서)
따라서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게 운동의 기원과 원리를 해명하는 일은 그들 시대에 팽배했던 숙명론 및 체념주의와 맞서는 일이요, 목적론 및 종교적 미신과 싸우는 일이기도 했다. “만일 항상 모든 운동이 연결되어 있고, / 새 운동은 옛 운동으로부터 정해진 순서를 좇아 생겨난다면” 모든 원자들은 “운명의 법”에 종속되고 만다(2: 251-254). 원자들의 운동이 숙명의 사슬에 종속되어 있다면, 원자들로 이뤄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자라난 환경, 타고난 기질대로만 살게 될 것이다. 상실에 허덕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절망스러운 소식이 있을까? 하여 에피쿠로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자연철학자들이 말하는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 더 낫”(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392쪽)다고. (2부 여름 : 좌충우돌, 배우고 익히는 중입니다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성민호
1996년생. 충남의 어느 교회공동체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느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스물넷에 대학을 그만두고부터 매일 〈규문〉 밥을 먹고 있다. 책 읽고, 수다 떨고, 밥 짓고, 산책하고, 글을 쓰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취미는 딱히 없고, 따릉이 타고 출퇴근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다.꿈도 딱히 없는데, ‘개천에서 나는 용’이 되겠다는 헛바람이 빠지자 오래된 비전 하나가 남았다. 개천에 웃을 일 많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름 개그동아리 출신이기도 하고, 짧은 공부에서 끌어낸 지향점이기도 하다.새삼스럽게도 최근에야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루크레티우스 덕분인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루크레티우스와 동고동락한 끝에 이 책이 나왔다. 그 인연이 또 어디로 데려다줄지 기대해 본다. 지금은 불교와 과학을 중심에 두고 이런저런 철학을 신명나게 공부하고 있다.최근에는 〈규문〉의 친구들과 독립공간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좌충우돌하며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얼굴들의 이야기를 만나길 기대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1부 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1화 뜻밖의 여정, 뜻밖의 만남
소란스러운 아침 │ 우당탕탕 규문 상륙기 │ ‘이건 아니다’, 마침내 결심
2화 돌고돌아 루크레티우스에게 이르기까지
이것이 과학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 윤리를 품은 과학, 자연학 │ 마침내,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3화 당신은 누구십니까? : 무명의 철학 시인을 찾아서
풍문으로 들었소! │ 미친 시인, 미친 도시를 거닐다 │ 쑥물 잔에 꿀을 바르리!
4화 해빙의 철학, 원자론의 탄생
베누스의 물리학?│ 겨울 왕국이 도래하다 원자론의 씨앗들│ 허공, 존재의 성벽을 허물다│ 클리나멘과 ‘봄의 제전(祭典)’
2부 여름: 좌충우돌, 배우고 익히는 중입니다
5화 두 원자 이야기
원자라는 판도라의 상자 │ 어떤 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 더 쪼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허공이 있다 │ 원자론, 거짓된 무한을 폭로하다 │ 두 원자와 두 구원
6화 원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 내재론을 위한 사유실험
변주되는 원자론 │ 소크라테스적 변곡점과 헬레니즘 │ 최소-부분, 원자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 │ 무게, 원자가 스스로 운동하기 위한 조건
7화 클리나멘과 샛길의 윤리학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 운동의 끝에서 운명을 비틀다 │ 사유할 수 없는 운동을 사유하기 │ 클리나멘과 자유의 길
3부 가을: 다르게 겪기, 다르게 해석하기
8화 찬양합니다, 가장 행복한 존재이시여
어머니의 신앙과 나의 업 │ 인간적인 신과 무위한 신 | 신성(神性)의 지리학과 간(間)세계 │ 윤리의 모델로서의 신│ 신앙의 새로운 이미지
9화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좋지 아니한가!│ 베누스의 단단한 매듭│ 사랑의 병증들 : 환각, 소유, 교환│ 후일담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누스를 말하다
10화 자족이라는 이름의 풍요
스톱, 피터팬 코스프레│ 다다익선이라는 망상│ 자족의 역량│ 검소의 풍요, 빈손의 복전(福田)
11화 우정, 마주침을 맞이하는 윤리
친구…라구요?│ 행복의 뿌리로서의 우정│ 우정, 불멸하는 ‘사이’의 사건│ ‘사우’(師友)들의 공동체
에필로그 _ 겨울 : 새로운 공부의 씨앗을 얻다
죽음을 마주하기, 삶을 긍정하기 │ ‘나’라는 환상과 시뮬라크라의 세계 │ 철학, 두려움 없이 헤맬 수 있는 기술
참고한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