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이 왜곡한 한국사의 장면들 - 밀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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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이 왜곡한 한국사의 장면들
국어사전으로 한국사 공부하기, 국어사전 속 한국사 용어와 인물들
새로운눈 | 부모님 |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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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정확성이 생명인 사전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어대사전 안에 한국사 관련 표제어와 인명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담겨 있다. 문제는 수록 항목에 대한 풀이에 잘못 기술된 내용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다.

부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두었거나 아예 사실과 정반대로 기술한 풀이들을 단순한 실수로만 보아넘기기는 어렵다. 역사 기록이란 엄정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과 국어사전의 풀이 역시 엄밀함과 정확성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국어사전에 실린 풀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찾아 일일이 비교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오류를 지적하는 데만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인 배경 설명도 덧붙였다. 국어사전 비판서인 동시에 한국사 공부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 리뷰

국어사전 비판서인 동시에 한국사 공부 길라잡이.
국어사전에 등재된 한국사 용어 풀이의 오류를 바로잡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밝힌다.
사전은 사전다워야 하며, 국어사전이 낱말 창고가 아닌 오류 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연개소문이 안시성에서 당태종을 물리쳤다고?
문익점이 붓대 안에 목화씨를 숨겨온 게 맞을까?
‘정도전의 난’이라는 용어는 문제가 없을까?
논개의 성은 정말로 주씨일까?
김두한이 노동운동을 했다고?

정확성이 생명인 사전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어대사전 안에 한국사 관련 표제어와 인명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담겨 있다.
문제는 수록 항목에 대한 풀이에 잘못 기술된 내용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다.
부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두었거나 아예 사실과 정반대로 기술한 풀이들을 단순한 실수로만 보아넘기기는 어렵다. 역사 기록이란 엄정한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과 국어사전의 풀이 역시 엄밀함과 정확성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국어사전에 실린 풀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찾아 일일이 비교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오류를 지적하는 데만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인 배경 설명도 덧붙였다. 국어사전 비판서인 동시에 한국사 공부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연개소문과 안시성

연개소문은 능력이 뛰어난 장군이었던 건 맞지만 위대한 장군이라고 하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연개소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고구려에서 최고 직함인 막리지(莫離支)를 지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연개소문(淵蓋蘇文): 고구려의 정치가·장군(?~665). 대대로(大對盧)가 된 후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추대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보장왕 4년(645)에 당태종의 17만 대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 고구려의 정치가·장군(?~666). 영류왕과 귀족들이 자신을 살해하려 하자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 내기도 하였다.

사전들의 풀이처럼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내세운 다음 대막리지라는 직책을 만들어 국정의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연개소문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죽은 다음 연개소문이 뒤를 이어 대대로(大對盧) 자리에 올라야 하는데 연개소문의 성정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대신들이 반대했고, 그러자 연개소문이 머리를 숙여 사죄함으로써 간신히 대대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반대 세력과 알력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연개소문의 힘과 세력이 커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반대파에서 영류왕과 합세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했다(살해가 아니라 천리장성의 수비 책임자로 삼아 변방으로 보내려 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군대 열병식을 한다며 대신들을 초대한 다음 모두 죽여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가 영류왕까지 죽였는데, 사지를 몇 동강 내어 개울에 던져버렸다고 할 정도로 잔인했다.
두 사전의 앞부분에 있는 풀이는 자세하진 않지만 사실 관계는 그대로다. 문제는 뒷부분의 풀이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 내기도 하였다’라고 단순하게 처리한 반면 『표준국어대사전』은 ‘당태종의 17만 대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였다’라고 기술했다. 이 대목에서 많은 독자들이 의아심을 가질 법하다. 안시성 전투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이 이끌었다는 게 상식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두 국어사전이 양만춘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양만춘(楊萬春): 고구려의 명장(?~?). 보장왕 4년(645) 안시성에서 중국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양만춘(楊萬春): 고구려의 장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고 공격을 해 왔을 때, 안시성에서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공격해 왔을 때도 이를 물리쳤다.

양만춘은 실체가 명확지 않은 이름이다. 『삼국사기』 등 초기 문헌에는 당태종과 맞서 싸운 안시성의 성주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역사학자 이병도가 『삼국사기』에 주석을 달며, 조선 후기에 송준길(宋浚吉)이 지은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나온다고 했다. 근래의 연구자들은 명나라 때 웅대목(熊大木)이 쓴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라는 소설에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끌어온 가공의 이름을 송준길이나 박지원 같은 사람이 전해 듣고 옮겼다는 거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는 뻥튀기가 심하다. 연개소문 항목에서는 당나라 군사의 규모를 17만이라고 했다가, 양만춘 항목에서는 30만으로 늘렸다. 하지만 다수의 사서에는 10만 정도로 나온다. 어디서 17만과 30만이라는 숫자를 가져왔는지 몰라도 근거가 희박하다.
연개소문과 안시성의 관계는 역사 기록에 두 차례 등장한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양만춘 풀이에 나오는 대목을 보면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내세운 뒤 각 지역의 군벌들을 자신의 휘하에 복종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안시성을 비롯한 일부 지역의 성주들은 연개소문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안시성 공략에 실패했고, 서로 타협하여 연개소문은 안시성 성주의 지위를 인정하고 안시성 성주도 연개소문이 차지한 권력자 위치를 용인하기로 했다.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 안시성 성주의 지략과 용맹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영류왕은 수나라를 몰아내고 새로 중원을 차지한 당나라의 힘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재위 중에 화평책을 썼으나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무렵 세력이 약한 편이었던 신라가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자 당태종은 신라를 침범하지 말 것을 고구려 조정에 요구했다. 연개소문은 그런 당태종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당태종이 보낸 사신을 감옥에 가둬버렸다 당태종이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당나라의 신하들이 예전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 때 당한 사실을 들어 만류했으나 당태종은 다른 이민족들을 제압해서 영토를 넓힌 경험을 통해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진격했다. 보장왕 4년인 645년의 일이었다.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 안시성 싸움에서 패한 뒤 자존심에 상처만 안은 채 돌아가야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연개소문이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것처럼 서술했는데, 심각한 오류다. 당의 군대가 고구려로 침공해 오자 연개소문은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 두 장수에게 당나라 군사보다 많은 15만 대군을 주어 안시성을 엄호하고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도록 명령했다. 두 장수의 이름과 함께 다른 이름 하나가 더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다.

¶고정의(高正義): 고구려의 대신(?~?). 보장왕 4년(645)에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 싸움에 나가는 고연수에게 당나라 군대의 예봉을 꺾기 힘들다고 하고 필승의 전략을 제시하였으나, 고연수가 이를 무시하여 당나라에게 패하였다.

고정의는 고연수에게, 성급하게 전면전을 벌이지 말고 시간을 끌면서 적의 후방 보급로를 기습해서 끊는 작전을 쓰라고 했다. 당나라 군대가 강할 뿐만 아니라 원정에 나선 군대는 보급이 끊기면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제안한 계책이었다. 하지만 고연수는 고정의의 제안을 무시했고, 안시성 근처에서 전면전을 벌이다 당태종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2만여 명이 전사했으며, 고연수와 고혜진은 3만 6천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당태종에게 항복한 다음 그 휘하로 들어가서 오히려 고구려 공격에 앞장섰다. 고연수는 안시성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한 뒤 탄식하다가 죽었고, 고혜진은 당태종을 따라 당나라로 들어가 그의 신하로 살았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은 안시성 전투와 관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가 파견한 군대는 대패했다는 게 제대로 된 사실이다. 지원군 15만이 허무하게 무너진 상황에서도 고립된 성안에서 당태종의 군대를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안시성 성주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연개소문은 언제 죽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은 665년,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666년이라고 했다. 어느 게 맞을까?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는 사서마다 사망 연도가 다르게 나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측 기록인 『당서』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666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663년으로 나오고, 일부 사학자들은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의 묘비에 적힌 내용을 근거로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된 665년을 사망 시기로 추정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인 대막리지에 오를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게 추론의 근거다. 단재 신채호는 654년 아니면 657년에 죽었을 거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렇듯 사망 시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사망 연도 불상으로 처리하는 게 오류를 범하지 않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안시성 전투 이후에도 당나라는 몇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범했는데, 연개소문이 계속 당나라의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재침공과 관련한 인물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다.

¶계필하력(契苾何力): 중국 당나라의 장군(?~?). 고구려 보장왕 때에, 두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였으며 제2차 원정 때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에게 크게 패하였다.

제2차 원정이라는 건 보장왕 20년인 661년 때의 침공을 말하며, 그때 당나라 황제는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었다. 이때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 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서술 역시 사실을 뒤집은 왜곡이다.
당나라는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짰다. 당나라 군대는 소정방과 계필하력 등을 장수로 삼아 육지를 피해 바다를 건너 대동강과 압록강 등지로 밀고 들어왔다. 이때 압록강 하류 쪽을 지키던 고구려 측 장수가 연남생이다. 마침 겨울이 닥쳐 압록강이 얼어 있는 상태였으며, 계필하력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들은 얼음 위로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연남생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군 3만 명이 죽었으며, 연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해 빠져나갔다. 이후 소정방은 평양성을 포위했고, 고구려로서는 큰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륙 안에서 철륵(鐵勒)이라고 부르던 튀르크계 북방 민족의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구려 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을 본국으로 소환해야 했다. 계필하력 부대가 먼저 돌아가자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 부대가 고립되는 상황이 되면서 전투 의지를 잃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는데, 그런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이유로 흔히 연개소문 아들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든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세 아들이 있었고, 장남인 연남생이 권력을 차지한 다음 두 동생이 반기를 들었다. 연남생이 지방 순시에 나선 틈을 타 평양성을 장악한 뒤 연남생의 아들마저 죽였다. 힘을 잃은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해서 고구려 정벌에 앞장섰고, 이런 상황에서 나당연합군과 맞서는 건 승산이 없다고 본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패망의 길로 가는 건 정해진 순서나 마찬가지였다.

북망산에 묻힌 흑치상지와 고선지

사람이 죽는 걸 흔히 ‘북망산 간다’라고 하는데, 북망산은 중국에 실재하는 산이다. 그런데 이 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꽤 많이 묻혀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많은 이들이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스스로 투항한 다음 당의 신하가 되었다. 끌려간 이들은 백제의 의자왕, 고구려의 보장왕 등이고, 신하가 된 사람은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 백제 부흥 운동을 펼쳤던 흑치상지 등이다. 이들은 모두 북망산에 묻혔다.
북망산(北邙山)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무덤이 많은 곳이나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이르는 말. 중국의 베이망산에 무덤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다.’라고 풀이했는데, 불친절한 서술이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옛날 중국의 북망산에 제왕(帝王)이나 명사(名士)들의 무덤이 많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라고 해서 단순히 묘지가 많은 곳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북망산은 국가에서 관리한, 요즘으로 치면 국립묘지 같은 성격을 띤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패망한 나라 출신들이지만 왕족이나 귀족들이었기에 당나라 조정이 그에 맞게끔 대우를 해준 셈이다.
그중 흑치상지에 대해 알아보자.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말기의 장군(?~?). 백제가 망하자 임존성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며, 중국 당나라 고종의 초청을 받아 토번과 돌궐을 정벌하고 그 공으로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후에 조회절(趙懷節)의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무고를 입어 옥사하였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역시 실망스러운 서술이다. ‘당나라 고종의 초청을 받아 토번과 돌궐을 정벌하고’라는 구절은 마치 흑치상지를 모셔갔다는 말처럼 들린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말기의 장군(?~?).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任存城)을 근거로 백제 부흥 운동을 펼쳐 군세를 떨쳤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하였으며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주흥 등에 의해 무고를 당해 옥사했다.

여기서는 ‘초청’ 대신 ‘초유’라는 표현을 썼다. 『삼국사기』에 실린 ‘흑치상지 열전’에 ‘견사초유(遣使招諭)’라고 되어 있으므로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풀이가 정확하다. ‘초유(招諭)’는 불러서 타이른다는 뜻이어서 ‘초청’과는 뜻의 차이가 크다. 회유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킨 초반에는 꽤 기세를 올렸으나, 함께 싸우던 동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은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등 내분이 일어나면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 고종이 누군가를 흑치상지에게 보내 그만 항복하라고 권유했을 것이다. 전의를 상실한 흑치상지는 어쩔 수 없이 투항했고, 그런 다음 칼날을 되돌려 당나라 군대와 합세해 임존성을 함락시켰다. 그런 공으로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당나라 장수가 된 흑치상지는 토번과 돌궐군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움으로써 영웅 대접을 받았다.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다.
하지만 위 풀이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억울하게 무고를 당해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옥에서 목을 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흑치상지의 아들인 흑치준이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걸 인정받아 북망산에 묻힐 수 있었다. 그리고 훗날 무덤에서 흑치상지 묘지명이 발견되었는데, <우리말샘>에 다음과 같이 올라 있다.

¶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백제 말기의 장군 흑치상지의 묘지명.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이 기록되어 있으며, 세로 72cm, 가로 71cm로 정방형에 가깝다. 기존 사료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도 기록되어 있어, 백제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묘지명에 따르면 사망할 때 60세였다고 한다. 두 국어사전 모두 생몰 연대를 미상으로 처리했는데, 사망 연도는 689년이며 60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바탕 삼아 630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망산에 묻힌 사람 한 명을 더 살펴보자. 이번에는 고구려 출신이다.

¶고선지(高仙芝): 고구려 태생의 중국 당나라 장군(?~755).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에 가서 20여 세에 장군이 되었다.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하였고, 티베트와 사라센 제국의 동진(東進)을 막았다. 뒤에 안녹산의 난에 정토군 부원수로서 출전하였으나, 참소를 당하여 처형되었다.

고구려 태생으로 당나라에 가서 장군이 되었다고 했는데, 제대로 된 서술이 아니다. 고선지가 태어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대략 40세 전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했으므로 그로부터 한참 후에 태어난 셈이다. 아버지 고사계(高舍雞)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들어와 사진교장(四鎭校將)이라는 직책을 받아 당나라 장수로 활동하고 있었고, 고선지는 아버지가 당나라로 건너온 한참 뒤에 태어났다. 따라서 고구려 출신 혹은 고구려 유민 2세라고 하면 몰라도 고구려 태생이라고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선지는 국어사전 풀이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전공을 세웠고, 불세출의 장군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만큼 고선지를 위대한 우리 조상으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고선지가 고구려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선지가 여러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운 건 맞지만 커다란 패전을 맛보기도 했다. 그 전투의 명칭이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우리말샘>에 나온다.

¶탈라스 전투(Talas戰鬪): 사라센 제국 군대가 중국 당나라 군대를 탈라스강 가에서 물리친 싸움. 이 싸움으로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차지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힌 당나라의 제지(製紙) 기술자를 통하여 제지 기술이 전하여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이끈 장수가 고선지였다.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고선지는 별다른 질책을 받지 않았는데, 그전에 세운 공들이 많아서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작 고선지를 사지로 내몰게 된 계기는 안녹산의 난이었다. 진압을 위해 출동한 고선지는 안녹산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전투에 유리한 지역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때 고선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부하가 당 현종에게 고선지가 마음대로 군대를 후퇴시켰다며 고자질했고, 그 말을 들은 당 현종이 고선지를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중에야 고선지의 판단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지만 이미 고선지의 목이 떨어진 뒤였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과 북망산에 묻혔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흑치상지의 운명과 닮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일환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시 추천을 받아 등단. 시집 『등 뒤의 시간』, 『귀를 접다』, 청소년시집 『만렙을 찍을 때까지』를 비롯해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와 『국어사전에서 캐낸 술 이야기』,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1.2』, 『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시를 즐기는 법』 등 여러 책을 썼다.

  목차

책을 내며 ·7

1. 근대 이전의 역사

부여라는 나라를 둘러싼 이야기들 ·12
연개소문과 안시성 ·16
화랑(花郞)과 원화(源花) ·23
신라의 여왕들 ·27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 ·33
평제탑과 소정방 ·38
북망산에 묻힌 흑치상지와 고선지 ·42
삽혈동맹(歃血同盟) ·47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고려 ·51
묘청을 죽인 사람 ·60
무신정권의 최후 ·63
기황후를 둘러싼 인물들 ·67
심양왕이라는 존재 ·71
문익점과 목화 ·77
이방원과 왕자의 난 ·81
채홍사와 채청사 ·89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94
진주성 전투와 논개 ·103
선조의 막장 아들 삼형제 ·110
이순신 장군과 함께한 사람들 ·116
순통과 불통 ·121
차상(次上)과 차하(次下)는 몇 등급일까? ·125
옷을 못 입는 병 ·131
사도 세자의 평양 원유 사건 ·136
상찬계와 양제해의 모반 ·140
조선 시대의 천주교 탄압 ·144
장패(藏牌)와 회동좌기(會同坐起) ·151
황제의 나라와 제후의 나라에서 쓰던 말들 ·154
전란 때 이상하게 죽은 사람들 ·160

2. 근대 이후의 역사

국권 찬탈의 시초가 된 한일의정서 ·168
보안회의 황무지 개척권 반대 운동 ·173
외국어를 가르치던 근대 학교들 ·176
을사오적 처단에 나선 기산도 ·180
보민회와 제우교 ·185
사회 교화 사업의 본질 ·190
안창호 선생이 만든 단체들 ·194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200
흰옷을 버리라고? ·206
국채 보상 운동과 물산 장려 운동 ·211
식민지 시기의 구호 제도 ·216
카드에도 계급이 있다? ·222
기생들의 파업을 불러온 조흥세 ·226
서북청년회 ·229
실향사민이라는 말 ·233
유엔 묘지와 적군 묘지 ·238

<부록>
1. 행적을 다르게 기술한 사람들 ·244
2. 사망 이유가 잘못 기술된 사람들 ·255
3. 엉뚱한 날에 사망한 사람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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