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장숙작가의 잔잔한 사유가 담긴 산문집이다. 이 책은 일상에서 행복을 깨닫는 내용의 수필 50여편과 디카시 20여편도 담겨 있다. 일상에서 느낀 감회를 담백하게 들려주는 낭송가처럼 감동과 철학이 깃든 내용이다. 『천칠백오십 그램의 행복』을 읽다 보면 무한대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잰걸음으로 나선 길이다. 찬바람에 옷깃을 세우는가 싶더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이울어가는 시간을 서성대며 계절은 침묵에 들고, 도로변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이리저리 흩뿌리는 바람이 선득하다. 겨울이 오면 맨 먼저 달려가 살며시 문 두드리고 싶은 곳이 있다.“너 생각나니? 난롯가에서 먹던 커피 말야.” “왜 아니겠어. 머그잔이 넘치도록 마셔대던 커피. 지금도 너무 그리운 걸. 겨울이 되면 유난히 더 생각나.” 새뜨락을 그만둔 지 어언 사십년. 어느덧 중년을 맞은 우리가 그 때를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혀끝에 침이 고인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주전자, 따뜻한 난롯가에 모여 구운 과자에 커피를 찍어먹던 일이 엊그제인양 선명하다. 매일같이 새로운 인연과 우연에 가슴 조이던 시간들, 웃고 울며 애태웠던 젊음의 열기와 에너지로 넘치던 얼굴들이 그 곳에 있었다. 새뜨락은 1980년 초 언니가 운영했던 의상실이다. 어느 날 양재를 배워보면 어떠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자신 없다고 발뺌하던 언닌 여러 날 고민 끝에 용기를 냈다. 양재학원에서 재단과 재봉을 배우고, 몇 년간 현장 실습을 익히고 나면 의상실을 차려준다는 조건이었다. 말이 실습이지 그 일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종아리가 붓도록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하는 잔심부름꾼에 불과했다.같이 해보자는 언니의 제안에 별 생각 없이 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양재의 이론과 실기를 이수하고 견습 사원으로 들어간 의상실에서 맨 처음 한 일은 윈도우 청소였다. 이른 아침 출근해서 셔터를 올리고 나면 양동이에 물을 떠 놓고 쇼 윈도우를 닦았다. 비눗물을 끼얹고 수세미로 벅벅 문지른 다음 맑은 물로 씻어내고 나면, 긴 막대로 물기를 없애고 마른 수건으로 광을 냈다. 손이 닿지 않은 곳을 닦느라 물을 뿌려야 할 때면 옷이 흥건히 젖곤 했다. 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잔심부름이나 허드렛일보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힐끔거리는 눈빛이었다. 찬바람 부는 겨울,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찬물에 손을 담그면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밖의 청소가 끝나면 안에 들어가 윈도우를 닦아야 했다. 밖에선 등을 보이고 일해도, 안에 들어가면 내가 마네킹처럼 밖을 보게 된다. 멋진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마네킹조차 흘겨보듯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초라했다. 마네킹은 웃지 않는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어도, 값비싼 밍크코트를 걸쳐도. 세상에 대한 편견과 오기로 똘똘 뭉친 나도 웃을 일이 없었다.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든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지어낸 웃음을 흘릴 뿐, 마음은 떨구지 못한 쭉정이로 그득했다. 마네킹처럼 철마다, 아니 며칠마다 옷을 갈아입는 여자, 한 번쯤 그런 삶을 꿈꾸었다. 내가 일했던 의상실 주인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가난을 모르고 산 여자였다. 원하는 게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풍요와, 언제나 새 옷을 맞춰 입고, 싫증나면 한두 번 입다가 세일 상품으로 내놓으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비슷한 또래의 부잣집 친구들이나 사모님, 유한 마담, 접대부가 주 고객이었고, 늘 종종 걸음인 나와 달리 그들은 미소와 여유가 몸에 배어 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손님이 있다. 백옥 같은 피부, 희고 고른 치아, 쭉 빠진 각선미, 부드러운 머릿결, 늘씬한 키에 풍만한 가슴, 그야말로 비너스가 환생한 듯 미모를 갖춘 여자였다. 여러 벌 옷을 맞추면서도 값을 흥정하거나 깎는 일도 없이 그녀는 늘 혼자 왔다. 빨간 장지갑을 열어 옷값을 치르는 그녀의 손가락은 창백하리만치 희고 고왔다. 그 날은 성탄절을 앞두고 아침부터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새하얀 망토와 잘 어울리는 흰색 샤프카를 쓰고 나타난 그녀는 닥터 지바고의 나나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새로 맞춘 옷을 찾아 쇼핑백을 챙기고 있을 때 검은색 승용차가 도착했다. 운전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태우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진 나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그녀를 데려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나의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가난한 집의 맏이로 태어난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나보다. 몸져누운 어머니, 줄줄이 동생들의 학비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녀가 선택한 것은 요정의 접대부였다. 그 곳에 드나드는 고위직 관리의 눈에 띄어 남자의 애첩이 되었다는 사연은 뭉근하니 가슴을 휘저었다. 서럽고 눈물겨운 견습 기간이 끝나자 언니는 개업을 준비했다. 한창 외래어가 유행하던 때 상호를 우리말로 짓고 싶었던 언닌 ‘한글 이름 펴기 운동’의 선구자 배우리 회장에게 부탁하고, 그에게 받은 몇 개 상호 중 하나를 고른 게 새뜨락이었다. 그 인연으로 우리도 한글이름(한마을, 한노을)을 갖게 되고, 그와 함께 TV에 출연해서 한동안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개업하고 나자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여대생들이 새뜨락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언니는 그녀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낯설고 힘겨운 경영수업을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언제나 하루는 예기치 못한 일과 크고 작은 문제로 우왕좌왕하면서도 순발력과 재치로 잘 넘기곤 했다. 원단이나 안감, 지퍼, 단추등 부속품을 사러 동대문시장에 갈 때면 신이 나서 따라갔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오밀조밀 빽빽한, 미로 속을 헤매듯 수백 개가 넘는 점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고, 전국에서 올라 온 상인들의 발 빠른 움직임, 거대한 시장의 흐름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은 오토바이가 대신하지만 그땐 지게꾼이 원단 뭉치를 지어 날랐다. 좁은 시장 골목에서 지게꾼을 만나면 잽싸게 몸을 피해야지 굼뜨게 움직이다간 두루마리 원단 뭉치에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도로변이나 버스 정류장에 죽 늘어선 지게의 행렬과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주문을 기다리는 지게꾼들의 튀어나온 광대뼈, 퀭한 눈, 푸시시 까치집처럼 뻗은 머리카락, 낡고 헤진 옷차림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아픔이 지나갔다. 아름다움과 추함, 부와 빈곤이 공존하는 양면성이 비단 패션계만의 일은 아닐진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혼자 물음을 던지곤 했다. 의상실 뒤편으로 목조 건물 이층 작업장에서 재단사, 재봉사와 그의 제자들이 옷을 만들어냈다. 성탄절을 앞두고, 대목시즌이 다가오면 철야작업을 할 만큼 주문이 밀려들었다. 작업장에서 사고가 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며칠 동안 쪽잠에 밤샘 작업하느라 피로에 지친 재봉사가 깜빡 졸다 그만 바늘이 엄지손톱 가운데를 관통했다. 바늘이 박힌 채 철철 피를 쏟는 그녀를 부축하고 가까운 정형외과에 갔다. 손가락에 박힌 바늘을 빼내고 실로 꿰매고 나서도 그녀는 돌아와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따금 그곳에선 크고 작은 사고가 터지곤 하는데, 뜨거운 다리미에 데는 일은 다반사고 날 선 재단가위에 베이고, 바늘에 찔리거나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대부분 어린 나이에 시골서 상경해 쪽방에서 생활하는 그들 중에는 부지런히 기술 배우고 알뜰하게 돈 모아 독립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저기 떠돌다 위험한 곳으로 흘러가거나 낙향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렇듯 수많은 사람의 손과 발이 움직이고 보이지 않는 땀과 정성으로 옷 한 벌이 완성되었다. 손님은 옷을 맞출 때만 오지 않는다. 지나가다 커피 생각이 날 때, 난롯가에서 먹는 도시락이 그리울 때,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실컷 수다를 떨고 싶을 때, 사연을 안고 와서는 속엣말을 털어냈다. 혼자 걷다 문득 생각나서 들렀다며 머쓱하게 들어오는 손님도 있었다. 달달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커다란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은 한 폭의 풍경화였다.홀로 남겨진 마네킹처럼 구석에 밀어 넣고서야 안도하는 나였다. 인간관계에서나 일에서나 서툴렀던 나는 내 잣대로 판단하고 비평하고 더욱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나약함을 운명 탓으로 돌리며 방황하다 주저앉곤 했다. 착하고 수더분한 성격에다 입바른 소리 못하는 언니를 약삭빠른 손님이 먼저 알아챘다. 그들은 옷을 맞춰 입고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다음에 한꺼번에 갚는다며 다시 새 옷을 맞춰 입었다. 월말이 되면 외상값 받으러 다니는 일이 늘어났다. 꿀꺽 삼키고 시치미 떼는 사람들에게 말도 못하고 마음만 애태울 뿐, 반복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몰랐다. 그 때 언니의 입장을 조금 더 헤아렸더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왔더라면, 짐짓 모른 척 뒷전으로 물러나고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은 모두 언니가 떠안았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내 앞에 턱 버티고 있는 유리벽이 허방한 마음의 투영이었음을 그땐 알지 못했다.어깨를 낮추고 겨울 채비에 든 나무가 잎을 떨구듯, 세상에 대한 편견을 덜고 나면 새로운 삶에 눈뜬다. 뒤늦은 후회로 내꽂는 시선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스치듯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걸음으로 세월을 건너고 있다. 한동안 머물다 물러나는 삶의 여정도 그러하리라. 무표정한 마네킹과 청춘의 정점 사이로 명료함이 고개를 든다. 거스를 수도 피해 갈 수도 없었던 세월을 펼치니 예전의 생기와 풋풋함을 뒤로 하고 무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 아직은 덜 여물고 덜어낼 게 많은 내가 휘적휘적 겨울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수필 <새뜨락>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장숙
•수필마로니에 전국 여성 백일장 장려상 수상(2018년 10월)-먼지시흥 신인문학상우수상(2018년 10월)-데생긴 질그릇전국 성호신인문학상(2018년 11월)-아버지의 일기•디카시시흥에코센터 디카시공모전 대상(2022년)-그리움, 시화에 스며들다홍성 디카시공모전 은상(2023년)-왕 버들, 고요에 들다영등포 디카시공모전 장려상(2024년)-운수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