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타적 마음을 강요하거나, 칭송하거나, 이타심으로 가득한 세계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각자의 곁에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소고이자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수많은 타인 사이에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이타심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이정표다. 우리는 ‘너’에 대해서 말하고, ‘너’를 위해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고유의 맥락을 가진 타인에 대해서 고민하는 데에는 서툴다. 또한 이기심의 대상이 ‘나’를 돌아보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의 타인으로 존재하는 ‘나’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할 때, 추상적이고 막연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세계로서 ‘너’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이타주의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저자 최태현은 강의의 충실성, 학생들과의 소통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서울대학교 학술연구교육상(2023)을 수상하고, 제도와 마음의 공공성에 관한 논문으로 한국행정학회 학술상(2019)을 받은 교육자이자 연구자다. 그런 그가 모니터 안의 데이터를 통해 제도와 정책을 연구하다가 “문득 모니터 바깥의 사람들을 보고 싶어졌다. 더 정확히는 세상과 어울리고 싶어졌다”며 상아탑 밖의 사람들 곁으로 뛰어들었다. 투쟁의 현장에 직접 방문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 박경석을 따라다니다가 그에게 발각되어 혼이 날 뻔했던 에피소드는 ‘운동판’의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진 이야기다. 그가 타인의 고통과 사회적 슬픔 앞에서 오롯이 위로하고 애도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첫 에세이를 펴냈다. 《이타주의자 선언》은 “학문의 자리에 살던 이가 ‘현장’의 사람들 곁에 어떤 마음으로 다가왔는지에 대한 아주 사적이면서 이타적인 기록”(홍은전)이다.
출판사 리뷰
“조용히 그의 뒤를 밟고 싶을 만큼 나는 그가 궁금했다.
지극하게 솔직한 것은 왜 이토록 아프고 아름다울까.” ― 추천사에서
시대가 만들어낸 오해의 늪에서 이타심을 건져내고
타인이라는 가능성을 찾아 떠나는 섬세하고 치밀한 탐구
타인의 고통과 사회적 슬픔 앞에서도 극단으로 분열되는 시대,
오롯이 위로하고 애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백온유(소설가), 장일호(《슬픔의 방문》 저자), 홍은전(인권활동기록가) 강력 추천!
이 책은 이타적 마음을 강요하거나, 칭송하거나, 이타심으로 가득한 세계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는다. 각자의 곁에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소고이자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수많은 타인 사이에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이타심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이정표다. 우리는 ‘너’에 대해서 말하고, ‘너’를 위해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고유의 맥락을 가진 타인에 대해서 고민하는 데에는 서툴다. 또한 이기심의 대상이 ‘나’를 돌아보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의 타인으로 존재하는 ‘나’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할 때, 추상적이고 막연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세계로서 ‘너’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이타주의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저자 최태현은 강의의 충실성, 학생들과의 소통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서울대학교 학술연구교육상(2023)을 수상하고, 제도와 마음의 공공성에 관한 논문으로 한국행정학회 학술상(2019)을 받은 교육자이자 연구자다. 그런 그가 모니터 안의 데이터를 통해 제도와 정책을 연구하다가 “문득 모니터 바깥의 사람들을 보고 싶어졌다. 더 정확히는 세상과 어울리고 싶어졌다”며 상아탑 밖의 사람들 곁으로 뛰어들었다. 투쟁의 현장에 직접 방문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 박경석을 따라다니다가 그에게 발각되어 혼이 날 뻔했던 에피소드는 ‘운동판’의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진 이야기다. 그가 타인의 고통과 사회적 슬픔 앞에서 오롯이 위로하고 애도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첫 에세이를 펴냈다. 《이타주의자 선언》은 “학문의 자리에 살던 이가 ‘현장’의 사람들 곁에 어떤 마음으로 다가왔는지에 대한 아주 사적이면서 이타적인 기록”(홍은전)이다.
나를 잘 아는 이기심이 출발선, ‘나’로부터 시작해서 ‘너’에게로 뻗어가는 이타심
우리는 이타주의(이타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편견이 있다. 보통 순수하게 나 아닌 존재를 위한 행동이나 태도를 두고 이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예를 들어 ‘거액을 기부한 연예인’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 기부금으로 어떤 이의 삶이 더 나아졌으니 이타적인 행위인가, 기부 행위로 명성을 쌓아 더 거액의 광고를 따내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으니 이기적인 행위인가. 딱 잘라서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이타적인 행동 혹은 사람에 대한 왜곡된 시선도 존재한다.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가 넉넉하지 못한 시대에서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곡해된다. 어떤 행위가 누군가에게 분명 도움이 되었더라도 위선이라고 비판하며 고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한 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선의에 따라 행동했지만 “휴머니즘이 사람 살리는 거 아니다”와 같은 비아냥을 들을 때도 있다. 종종 ‘자선사업’이라는 단어를 현실감각 없고 순진하기만 해서 실속 못 챙기는 사람에게 놀림조로 쓰기도 한다.
저자는 시대가 만들어낸 오해의 늪에서 이타심을 건져내고 그것의 가능성을 찾아 떠나는 탐험을 시작한다. 우선 이타심을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겹치는 영역을 알아채고 신경 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되면 이기심과 이타심이 뒤섞인, 마치 갯벌과 같은 공간에 진입하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의 말을 남긴다. 역설적이지만 이타심의 시작을 ‘너’가 아닌 ‘나’로 설정하기를 권한다. “어쨌든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존재는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각들이 있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걱정을 덜어주기도 한다. 그런 다음 타인이 자리하고 있는 마음과 태도에 대해서(1,2장),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존재하는 타인인 동료 시민과 가족에 대해서(3,4장), 타인을 이해할 실마리로서의 쇠락과 죽음에 대해서(5,6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회적 참사의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건네는 고백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큰 맥락은 세월호 참사다. 행정학 교수로서 공공성, 민주주의, 시민참여 등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저자의 삶은 2014년 4월 16일의 비극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렸다. 저자는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한 지난날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2014년 어느 날,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국제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세미나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유가족들에게 도움이 된대?”라는 아내의 질문을 들은 후 멈춰버린 그는 고심하게 된다. 인식의 지평이 얼마나 좁았는지, 타자의 경계가 어디까지였는지 돌아보게 된 저자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참사를 겪은 이들이 아니라 세미나 그 자체가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순간이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이후에도 이와 같은 계기들을 마주하며 당황하고, 부서졌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 장애 당사자이면서 사회와 인간을 탐구하는 연구자 등을 만나면서 “삶의 균형추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그 기울어짐의 순간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2024년 세밑에 마주했던 제주항공 참사는 다시 한번 온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10·29 이태원 참사,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등 늘 마지막이기를 바라지만 종종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아픔들이 있다. 참사의 고통을 함께 견뎌내는 방법은 무엇인지, 공적 슬픔에 적절한 그리고 충분한 애도의 과정과 태도는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 책은 하나의 답이 되어줄 것이다. 저자는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이타심은 그 마음이 향하는 타인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기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슬픔, 아픔을 겪고 있는 이를 보면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이 일어난다. 문제는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마음에 머물면서 “타인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모멸감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위로와 애도의 과정에서도 본의 아니게 드러날 수 있다. 참사의 당사자, 유가족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연민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진정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타자도생의 시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인간다움의 구성 요소로 이타심을 꼽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생사가 교차할 때, 일확천금의 기회가 눈앞에 있을 때와 같이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많은 이가 가장 먼저 버리게 되는 마음 또한 이타심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것이 우리의 전부인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우리 안에 타인의 조각들을 찾고, 모으고,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각자도생의 통념이 끊임없이 주입하는 강박, ‘결국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속삭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정한 이타주의의 시대는 ‘타자도생’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를 한 사람의 타자로서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에 걸맞은 대우를 하는 세상. 그래서 이해 없는 공감, 즉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만 누군가를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라 “타인을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한 세상. “타인을 생각하는 존재가 가장 아름답다”는 저자의 말처럼 타자도생의 시대는 가장 아름다운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딱 잘라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여러 마음이 얽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마음은 각자의 경험,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성숙,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빚어지고 발현됩니다. 마음의 갯벌에는 참으로 다양한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자주, 특별히 발견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_들어가며, <타인이라는 아름다움>
이타심은 타고난 마음으로만 영글지 않습니다. 이타심은 타인을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인지상정’이 있지 않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지랖’이라는 말도 있죠. 이해 없는 본능적, 즉각적 이타심을 장애인들은 ‘시혜와 동정’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는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타인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그 타인에게 얼마나 모멸적으로 느껴질지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 없는 이타심은 위험합니다.
_1장 타인들, <너와 나>
이타심은 사랑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최소한 그런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하나 되기의 욕망을 제어하고 그것을 거리 두기로 바꾸어낼 때, 타인을 지향하는 마음은 비로소 서로에게 작열하는 불길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이 될 수 있습니다.
_1장 타인들, <타인을 향한 감정>
작가 소개
지은이 : 최태현
2013년부터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책결정과 공공성, 행정윤리 등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2024년에는 “분열의 시대, 다양성과 포용이 희망이다”라는 주제로 개최된 ‘경향포럼’의 강연자로 힐러리 클린턴, 캐시 박 홍 등과 함께 대중 앞에 서기도 했다.‘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책을 썼지만 여전히 타인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기어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도 그런 의지가 때로는 어떤 선을 넘을지도 모르기에 주저하고 망설이기를 반복한다. 모든 아픔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고 여기지만 공적 슬픔을 남긴 기억에 마음이 조금 더 기운다. 이 책을 쓰던 가운데 문득 “나의 이야기가 타인이 욕망할 만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서사 없음’의 서사라는 역설에 다다랐다. 좋은 사람들이 일으킨 삶의 미세한 기욺에서 운명과 진실을 읽어내기, 오후 햇살 드는 연구실에 앉아 멍하니 있기, 합창, 밀크티,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배긴스, 〈스파이 패밀리〉의 아냐 포저 등을 좋아한다.《모두를 위한 사회 연구》(2021),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2023) 등을 썼다.
목차
들어가며  ̄ 타인이라는 아름다움
1장 타인들
너와 나|타인을 향한 감정|아픔이 아픔에게|마음의 거리
2장 태도들
배려|합창에 대하여|희생하지 마세요|나의 언어, 우리의 언어|그 하나의 이름
3장 가족이라는 타인
모쿠슈라|딸: 일기들|어느 별이 되었을까
4장 시민이라는 타인
늦게 만난 세계|인간, 자연, 그리고 거리|헌정|영웅과 시민: 달의 어두운 면
5장 내려놓음
시간, 사람, 깨달음|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누구나 어디선가 멈춘다
6장 죽음
또랑이의 죽음|아버지가 가시던 밤|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무엇을 위해 살고, 싸우고, 죽을 것인가
나가며  ̄ 늦은 고백
감사의 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