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지금이야말로 구멍 뚫는 일을 그만두기 딱 좋은 때였어요.”
: 실패도, 성공도 아닌 어떤 삶이 있다는 것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던 올빼미가 있었다. 이름은 라게. 지금은 슈퍼마켓 계산원이다. 한때 벽에 구멍도 뚫었고, 비행학교도 열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너무 깊게 구멍을 파서 그만두었고, 비행학교는 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문을 닫았다. 그래도 라게는 자주 말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요.” 이 책은 그런 이야기다. 아주 큰 일은 없고, 꼭 무언가가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닌, 그저 그렇게 옆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에바 린드스트룀은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날지 못한 하루들”을 이 책에서 보여준다. 실패는 실패가 아닐 수 있고, 관계는 설명되지 않아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라게는 자기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그날그날의 선택을 받아들이며, 오히려 실패가 멈춤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느낀다. 그런 태도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로 살아가는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회복력이다.
“정말 재미있는 수업이었어요. 비행을 배우지 못했지만요.”
: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은 삶, 어린이다운 존재의 감각 《내 친구 라게》의 인물들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머무른다. 라게는 해고되고, 학교는 닫히고, 계획은 무산된다. 하지만 그는 어떤 실패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제나 '지금이야말로 그만둘 좋은 때'라 말하며,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는 삶을 결과로 판단하지 않고, 관계와 경험 자체로 살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감정을 해석하지 않고, 관계를 규정하지 않으며, 좋아하면 그냥 옆에 있고, 멀어지면 가만히 멀어진다. 라게는 누군가를 구원하지도, 구원받지도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관계는 완성을 지향하는 상태가 아니라, 머무름과 변화,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의 상태다. 린드스트룀은 성장 서사와 반대 지점에서, 어쩌면 ‘변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게는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그저 그렇게’의 감각은, 유년기의 감정 구조를 가장 정확히 닮아 있다.
“지금은 그저 귤을 까먹으며 돌아다닐 뿐이지만요.”
: 이름 붙이지 않아도 계속되는 관계, 서사가 아닌 감정의 잔류 이야기의 중심은 라게와 ‘나’의 관계다. 친구이지만 감정을 확인하지 않고, 말없이 멀어지고, 다시 말없이 만난다. 서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간들, 연락 없이 지나간 계절, 정리되지 않은 감정.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이 관계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린드스트룀은 감정의 지속을 설명이 아닌 ‘존재의 잔류’로 표현한다. 장면은 느슨하게 연결되지만, 그 속에 깃든 감정은 분명하다. 말하지 않아도 유효한 관계, 끝나지 않아도 완결된 감정, 이것은 어른의 언어보다 어린이의 감각에 가까운 세계다. 이 책은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지속되며,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작고 단단한 장면들로 보여줄 뿐이다. 서사적 사건 없이 감정이 남는 그림책. 그것이 《내 친구 라게》가 지닌 독특한 정서의 리듬이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 에바 린드스트룀이라는 세계 에바 린드스트룀은 1952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40여 권의 그림책을 펴낸 작가이자 화가다.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한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 삶의 중심을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종종 빗겨가고 머물러 있는 것들을 오래 바라본다. 그녀의 그림책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정서가 흐르고, 주인공은 변화하지 않지만 감정은 움직인다. 린드스트룀의 세계는 언제나 미완의 세계다. 그녀는 그림책에서 인물의 완성보다 상황의 지속을, 서사의 극적 전개보다 일상의 감각을 택한다. 특히 《내 친구 라게》는 그런 작가의 세계가 가장 조용하고 깊게 도달한 책이다. 라게는 말이 적고, 상황은 크지 않고, 결말은 미뤄진다. 하지만 바로 그 느슨한 구조가 이 책을 오래 남게 만든다. 린드스트룀은 어른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결들을, 아이와 닮은 존재를 통해 보여준다. 그 세계에선 귤을 까먹는 장면이 하루의 전부가 될 수 있고, 날지 못해도 괜찮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린드스트룀의 세계는, 결코 작지 않다.
2022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
수상 작가, 에바 린드스트룀에바 린드스트룀은 2022년,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ALMA)을 수상했다. 수상 위원회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책 세계”로 묘사하며, “경쾌한 붓 터치, 단번에 읽히지 않는 문장, 어린이와 어른, 동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을 언급했다. 그녀의 책은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직설적으로 묻기보다는, 그 질문이 잠긴 세계 안에 머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은 2002년 스웨덴 정부가 제정한 국제 아동청소년문학상으로, 매년 작가의 전작과 창작 태도를 함께 평가하여 선정한다. 단일 작품이 아닌 오랜 작업의 축적을 기준으로 하며, 상상력, 인간성, 문학적 실험성 등을 주요 가치로 삼는다. 린드스트룀은 수십 년에 걸쳐 독자적인 방식으로 어린이성과 삶의 감각을 탐색해왔고, 이 상은 그 작업을 하나의 방식으로 정리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