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영미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 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신약학자인 마커스 J. 보그의 마지막 저작. 평생 성서와 예수, 신앙의 의미를 사유해온 그가 삶의 말미에 남긴 회고록이자 신학적 유언이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통해 빚어진 신앙을 고백하고 오늘의 교회와 신앙을 다시 생각하려는 이들을 자신이 깨달은 세계로 초대한다.이 책에서 보그는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억, 회심, 확신이라는 세 가지 틀로 그린다. 어린 시절 루터교 교회에서 경험한 순전한 신앙의 시기, 대학 시절 근대적 회의주의에 흔들렸던 시기, 그리고 이후 신학자로서 축적된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빚어낸 확신의 시기, 이 여정에서 일어났던 고민들을 찬찬히 살펴본 뒤 그는 고백한다. 신앙은 특정한 정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살아내는 방식이며, 신과 이웃,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새기는 것이라고. 하느님은 초월 너머가 아니라 이 세계를 품고 있는 실재이며, 성서는 문자 그대로의 무오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빚어진 거룩한 이야기이며, 예수는 도덕 교사도, 도피처도 아닌 새로운 현실을 여는 하느님의 현현이라고. 이러한 확신은 단지 어떤 이론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과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제공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그의 가장 개인적인 고백이 담긴 책임과 동시에 가장 목회적인 책, 보그 사유의 정수를 담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과 함께하는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깊은 통찰을, 믿음을 잃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여전히 교회 안에 있으나 질문이 많은 이들에게는 진솔한 동행을 제공할 것이다.
출판사 리뷰
영미권을 대표하는 신학자, '대중의 신학자' 마커스 보그의 유작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내어 놓은 신학적 회고록, 혹은 신학적 유언
종교 언어는 종종 삶의 언어와 멀어진다. 익숙한 단어일수록 손쉽게 무뎌지고, 교회 안에서조차 “하느님”, “예수”, “믿음”이라는 말들은 때때로 설명되지 않은 상태로 공중에 붕 뜨기 일쑤다. 마커스 보그는 이 간극을 일생 동안 좁히려 애쓴 학자였다. 그는 ‘신약학자’라는 직함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세계에서 신앙이 무슨 의미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정직하게 응답하고자 했던 대중 신학자였다.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이 마커스 J. 보그가 70세를 맞이해 쓴 일종의 회고록이자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탐구한 질문들에 대해 삶의 말미에 내놓은 응답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신학적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억과 회심, 그리고 확신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보여주며 보그는 신앙이 단지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 아니라, 살아내고 다시 말해내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책은 유년기 루터교 교회에서 만난 순전한 신앙을 기억하며 시작된다. 이윽고 그 신앙은 대학에서 접한 성서비평, 과학적 세계관, 더 넓어진 세계 앞에서 무너진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신앙을 떠나고 새롭게 자신의 신앙을 돌이킨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더 깊고 넓어진 이해로.
그에게 하느님은 더는 저 너머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 안에 현존하면서도 우리가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실재다. 예수는 단순한 도덕 교사도, 불안의 도피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여는 하느님의 현현, 우리 삶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젖힌 존재다. 성서는 무오한 진리의 목록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과 해석이 겹겹이 쌓인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다. 보그의 여느 책들이 그렇듯 이 신학적 회고록에서도 그는 신앙의 언어를 다시 기술하고,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본다. 그렇게, 그는 신앙이 정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살아가는 방식이며,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감각임을 몸소 보여준다.
여러 서평자는 이 책을 “보그의 가장 목회적인 책”, “진보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안내서”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삶을 통해 정말로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적절한 어휘로 말할 수 있는가? 보그는 말한다. 자신은 여전히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고. 그리고 이 세상이 하느님의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고. 이 고백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흔들리면서도 신앙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 책은 커다란 도움과 자극을 줄 것이다.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선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일흔 살이 되었을 때 내 삶의 이정표들(기억, 회심, 그 회심을 통해 형성된 확신)을 중심으로 삶을 성찰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 책이 마냥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닌 이유는 저 과정들을 거쳐 내 삶에 자리 잡게 된 믿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인, 특히 미국 그리스도교인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흔이 되어 보니 인생은 너무 짧다. 걱정에 빠져 있거나 심술이 나 있거나 뚱해 있기에는 한 시간도 아깝다. 일흔이 되니 뜻밖의 변화도 있다. 놀랍게도,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삶을 살며 배운 가장 중요한 내용, 가장 중요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물론 조심해야 할 점도 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지혜를 보증해 주거나 독단적이어도 된다는 자격증을 주지는 않으니 말이다. 고집 센 바보 늙은이가 되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사순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에서는 이 책을 이루게 될 세 개의 중심축(기억, 회심, 확신)이 떠올랐다. 먼저 ‘기억’이 있다. 이 기억에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비롯해 이후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삶의 장면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회심’들이, 삶의 방향이 바뀐 전환점들이,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내 이해가 바뀐 경험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내 안에는 ‘확신’, 즉 내가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쉽사리 흔들리지 않으며 삶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나는 기억, 회심, 확신이라는 세 가지가 서로 얽히고 흐르며 우리 삶 전체를 빚어낸다고 생각한다.
어 ‘컨버전’(회심, 전환, 환전)conversion이라는 단어는 비인격적인 의미와 인격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비인격적인 의미 중 하나는 금전과 관련이 있다. 한 통화에서 다른 통화로 돈을 바꿀 때 우리는 ‘환전’conversion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특징을 보여 주는 건 이 뜻일지도 모르겠다. 미식축구에서 터치다운을 한 뒤 추가 점수를 얻을 때 이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단어의 인격적인 의미다. 라틴어 어원 ‘콘베르테레’convertere에서 알 수 있듯 ‘회심’은 ‘돌이킴’,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거나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회심은 ‘큰 변화’이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들이 반드시 회심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이혼, 실직, 사랑하는 이의 죽음, 예상치 못한 나이 혹은 이른 나이에 불치병에 걸리는 일은 삶을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만 그 자체로 회심은 아니다. 회심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오늘날 영어에서 인격적인 의미로 ‘회심’을 쓸 때는 종교와 관련이 있다. 종교가 없던 사람이 종교를 갖게 되거나(혹은 그 반대이거나),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거나(불교인이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경우), 한 종교 안에서 교파를 옮긴다든지(개신교회 신자가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가 되는 경우), 혹은 기존에 속한 전통 안에서 신앙이 깊어질 때(관습적인 그리스도교인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그리스도교인이 될 때)를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회심은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이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이 급반전을 이룬 것처럼) 갑작스럽고 극적일 수도 있지만, 점진적이고 점층적인 경우가 더 많다.
종교적 의미 외에도 지적 차원에서, 정치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회심이 있을 수 있다. 종교적 회심이 그렇듯 이러한 전환도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고,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든 이 전환들의 공통점은 이 변화가 삶에 대한 우리의 근본 지향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현실이 어떠한지, 무엇이 진실로 중요한지, 무엇에 열정을 느끼고, 무엇에 헌신하며 충성하는지 말이다. 이야기를 조금 미리 당겨 말하자면, 확신conviction은 회심에서 흘러나온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마커스 J. 보그
1942년생. 신약학자이자 성공회 신학자. 미국 미네소타에서 태어나 컨콜디아 대학B.A.에서 공부하고 옥스퍼드 대학교 맨스필드 칼리지에서 석사학위M.Th.와 박사학위D.Phil.를 받았다. 1966년부터 컨콜디아 대학, 남다코다 주립대학교, 칼톤 대학을 거쳐 1979년부터 2007년까지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종교와 문화 분야 훈데레 석좌 교수로 활동했으며, 미국 성서학회 역사적 예수 분과 의장, 동학회의 국제 신약성서 프로그램 위원회 공동의장, 성공회 성서학자 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성공회 평신도로서 오리건 트리니티 대성당의 캐넌 신학자로 활동하다 2015년 세상을 떠났다.예수 세미나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성서와 신학 대중화에 힘쓴 저술가, 자신의 입장에 갇히지 않고 다른 입장에 선 학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한 신학자, 평신도의 신앙 성숙에 관심을 기울인 선생으로 기억된다. 신약학자 니콜라스 페린은 그를 기리며 말했다. “그는 예수가 보여준 사회-정치적 비전과 개인-종교적 비전을 결합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이들 중 소수만 이 둘을 결합했는데 보그가 바로 그랬다.” 신약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말했다. “보그는 토론에 참여할 때 늘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는 복음주의와 역사적 정통주의의 강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에게 환영받는 진보 신학자였다.”주요 저서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 『예수 새로 보기』(한국신학연구소), 『새로 만난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예수의 의미』(톰 라이트와 공저, 한국기독교연구소), 『기독교의 심장』(한국기독교연구소), 『첫 번째 크리스마스』(존 도미닉 크로산과 공저, 한국기독교연구소), 『성서 제대로 다시 읽기』(동연), 『예수, 새로운 비전』(동연) 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며
1. 상황은 중요하다
나의 문화적 맥락 - 미국 그리스도교
오늘날의 분열
정치적으로 분열된 그리스도교
2. 신앙은 여정이다
그 시절 그곳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라나다
회심들
첫 번째 회심 - 지적(그리고 종교적) 회심
두 번째 회심 - 정치적(그리고 종교적) 회심
3. 하느님은 실재하며 신비이다
신비 체험과 하느님
신비 체험이 나의 하느님 이해에 끼친 영향
초자연적 유신론에 대한 대안
4. 구원은 내세보다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다
세 가지 인식의 단계
구원
내세는 성서의 중심이 아니다
내세가 강조될 때 그리스도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구원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내세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5. 예수는 성서의 규범이다
때때로 성서는 틀리다
대안
성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성스러운 경전이다
성서가 틀렸을 때 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6.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
오늘날의 성서 문자주의
성서 문자주의의 불가능성
대안
역사적 해석
은유적 해석
성서 이야기들과 비유적 의미
비유로서의 창조 이야기들
비유적 해석의 또 다른 예들
7.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중요하다 - 그러나 우리의 죗값을 치렀기 때문은 아니다
역사적·신학적 문제들
역사의 맥락에서 바라본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죽음은 중요하다
예수의 죽음이 지닌 두 번째 의미
8. 성서는 정치적이다
그리스도교와 정치의 분리?
성서의 정치
9. 하느님은 정의를 열망하시며 가난한 이들을 깊이 돌보신다
예언자 아모스의 특별한 위치
고발
심판
아모스 1장 3절~2장 16절
아모스와 아마샤
아모스와 미국 그리스도교
10. 그리스도인은 평화와 비폭력으로 부름받았다
기억들
초기 그리스도교의 평화주의(비폭력)
‘정당한 전쟁’ 신학(제한적인 참여)
‘성스러운 전쟁’ 신학(폭력의 무제한 허용)
전쟁에 대한 순응
성서와 폭력
성서 본문에 대한 반론
다른 반론들에 대한 응답
11.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중심을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