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형순 시인이 첫 시집 『여자의 꿈』(도서출판 그루)을 냈다. 「먼 산」, 「꽃이 피는 이유」, 「사랑 마중」, 「필연」, 「간밤의 꿈」, 「석양의 선물」, 「먼 훗날」, 「실버의 멋」, 「빗방울 속의 만남」 등 50여 편을 담았다. 사랑에의 기구와 그리움, 기다림이 중심축을 이루는 그의 시는 팔순에 접어든 연륜과 체험들이 부드럽게 녹아든 깨달음과 지혜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떠올린다.
출판사 리뷰
사랑과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
진솔, 담백한 실버의 멋 발산
첫 시집을 선보이는 이형순의 시는 팔순에 접어든 연륜과 경륜에 걸맞게 오랜 체험들이 부드럽게 녹아든 깨달음과 지혜들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떠올린다. 이태수 시인은 해설을 통해 사랑에의 기구와 그리움, 기다림이 중심축을 이룬다며, 잃어버린 사랑을 애틋하게 반추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연유하는 더 큰 사랑과 너그러운 자연의 품에서 한결 낮은 자세로 순응하면서 베풀고 나누려는 ‘실버의 멋’까지 발산한다고 평가한다.
자성적인 자기 성찰에 초점이 맞춰진 일련의 시편들은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 속의 사랑의 세계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무상감이나 비애마저 관용으로 품어 안는 관조와 달관의 심상 풍경들을 보여준다.
그가 ‘먼 산’으로 은유하는 그리움 속의 변하지 않는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며, 변하게 마련인 주체와 함께 흐르는 세월도 ‘나’가 체감해야 하는 대상 이쪽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나’는 붙잡을 수 없이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바뀔 수밖에 없어 지난날로 되돌아가고 싶어지고, 바뀌지 않는 대상에 그런 심경을 투사한다.
창밖에 누워
날이면 날마다
나와 대면하는
먼 산
어제 내가
웃었는지 울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그대로다
무심하지만 한결같이
그대로 있어 주어
만날 수 있으니
그 헤아릴 수 없는 속이
얼마나 깊은 걸까
하지만 한결같은
나의 기다림은
속절없어 눈물겹다
「먼 산」 전문
마냥 그 모습 그대로인 ‘먼 산’은 ‘나’에게는 날마다 만날 수 있어도 멀리 있어 무심한 듯하나 속이 한량없이 깊어 보이는 외경의 대상이며, 있어 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심경은 시 「옛길」과 「기다림」에 또 다르게 묘사된다. “먼 그때가 저려옵니다 // 몸은 이리 떠밀려 왔지만 // 마음은 거기 심어 두었지요”(「옛길」)라고 바뀌기 이전의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기다림」에서와 같이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적극성을 띤 능동태로도 발전한다.
또한 「가고 있어요」에서는 “출발이 시작이고 / 도착이 끝이라면 / 가고 있음은 / 무언가를 하는 기쁨”이라는 대목에서 읽게 되듯, 길을 나서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을 동반하는 자기 위안이 되고, 포기가 아닌 체념을 대동하는 듯한 ‘순응의 미덕’ 끌어안기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나 이리 있어요」에서는 그리움과 기다림을 안으로 삭이면서 주어진 대로 살아가려는 관용(너그러움)으로 승화된 모습도 떠올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숲과 바람)에 외면당하기도 해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새길을 찾아 나서는가 하면, 그 낯선 길이 어떤 계기와 만나 익숙한 삶의 길이 될 뿐 아니라 그 길의 주역이 되게도 한다.
바람이 좋아
바람 부는 데로
숲이 좋아
숲이 우거진 데로
길인가 하여 가 보았더니
바람은 가고 숲은 끊어져
오던 길 돌아보았는데
모르는 체하더이다
길이 아닌가 하여
낯선 길 들어섰는데
그 길에서
우연히 한 사람 만나
째깍째깍 살고 있으니
어느새 낯설던 그 길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길」 부분
바람 따라간 숲길에서 길이 끊겨 낯선 길에 들어섰는데 그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반려자와 함께 살고 있으니 그 낯선 길의 길잡이가 되었다는 건 자연 못잖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동행에 대한 예찬과 각별한 의미 부여다. 한 사람(반려자)과의 만남이 삶의 새로운 방향(길)을 찾게 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길의 길잡이가 되게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사랑의 힘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짧은 시 「있고 없고」에서는 “사랑이 있고 / 기다림도 있으면 // 행복이 있고 // 사랑이 없고 / 기다림도 없다면 // 행복도 없다”는 단순명료한 행복론을 편다. 사랑은 기다림과 짝을 이루어 행복과 불행을 가름하게 한다는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개진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랑 마중」에서는 “주어는 나 / 동사는 사랑 / 목적어는 무한대”라고 ‘나’와 ‘무한대’를 추동하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따르는 자연에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그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일까.
나 기쁠 때 하늘이
나 슬플 때 강물이
사랑한다고 한다
<중략>
오오, 사랑아
여기도 저기도
들에서도 산에서도
나를 부른다
기다리는 그 사랑을
뜨겁게 마중하리
「사랑 마중」 부분
이 시는 자연은 기쁠 때나 슬플 때도 한결같이 사랑으로 감싸주며, 그 사랑은 기다리고 찾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다분히 기독교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에 연유하고, 그런 사랑을 기다리고 마중해야 이뤄질 수 있다는 암시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연은 사랑을 주재하고 연출하며,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아름다운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우리의 풍경화」는 사랑 안에 자리하고 있는 풍경을 그리면서 ‘복실이’(강아지)와 ‘우리’(가장 가까운 너와 나)를 슬며시 끌어들이고, 사랑으로 만나 빚어지는 풍경에 넌지시 ‘우리의 재회(사랑)’에의 꿈을 포개고 놓기도 한다. 지금은 우연히 만나 ‘하나’가 되던 그 잃어버린 사랑을 반추하고, 기리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스쳐 지나다
명령에 순종하는 병사처럼
꼭 같은 순간에 마주친
눈길 덕분에
서로의 그대가 되었습니다
슬픔이 와도 견딜 수 있었고
기쁨이 오면 얼싸안고 뛰었습니다
그대가 아프면 나눌 수 없어
간절히 기도하며 소원했습니다
다시금 그대와 나
테너와 소프라노로 화음 맞추며
우리 만남이 필연이었음을
노래하게 해 주소서
그대와 나
손잡고 저 먼 산에 올라
마주 보며 해 저물도록
필연이어서 행복했노라고
노래를 불러요
산울림이 메아리 되어
우리의 만남이 필연이라고
외칠 겁니다
그 메아리를 언제까지나
가슴에 묻겠어요
「필연」 전문
우연히 만나 ‘서로의 그대’(부부)가 되어 살던 사랑의 서사를 떠올려 보이는 이 시는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사랑하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그 만남이 우연이 만든 필연이어서 행복했음을 소환하고 반추한다. 게다가 함께 그런 노래를 산에 올라 다시 부를 수 있다면 그 ‘필연’이라는 산 메아리까지도 언제까지나 가슴에 묻겠다는 심경을 곡진하고 절절하게 드러내 보인다.
「간밤의 꿈」은 꿈속에서 남편과 사랑을 나누던 장면까지 “너무나 아름다워 / 지워지기 전에 / 서둘러 새겨 두렵니다”라고, 생생하게 살려 놓고 싶어 한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나는 주인공이 되어
롱코트에 머플러를 날렸지요
잠시 후 멋진 차림의
잘생기고 듬직한 그 사람
그립던 나만의
그대가 등장했지요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나를 감싸주고
그대가 원하고 내가 기다렸던
영화보다 기막힌 장면같이
입맞춤했는데
감촉은 없어 알쏭달쏭하더군요
그때까지도 광장 한복판에서
뭇시선을 받고 있었지요
광장은 그대의 온기로 가득했고
관중들은 주인공인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나는 그 포근함에 흠뻑 젖어
유유히 광장을 걸어 나왔지만
지금도 광장에 있는 것만 같아요
우리 두 사람은
아직도 꿈속에 있나 봅니다
「간밤의 꿈」 부분
광장의 군중 앞에서 사랑을 주제로 공연하는 젊은 멋쟁이 두 주역 배우를 그리고 있는 듯한 이 시는 꿈속이라 입맞춤해도 “감촉은 없어 알쏭달쏭하더군요”라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지금도 광장에 있는 것만 같아요”라든지 “우리 두 사람은 / 아직도 꿈속에 있나 봅니다”라고 그 아름다운 한때를 꿈속에 붙들어 놓듯 새기고 있다. 이 시는 “주어는 나 / 동사는 사랑 / 목적어는 무한대”라는 「사랑 마중」의 한 대목을 새삼 떠올려보게도 한다.
그의 일련의 시는 일상인으로서의 생활이 여러 빛깔의 파토스나 무상감에 자유로울 수 없으며, 회한이나 후회로부터도 한가지이게 마련이라는 자성적인 자기 성찰에 주어져 있다. 세월은 그야말로 무상하기 그지없어, 되돌아보면 “옛적엔 / 먼 훗날이 / 멀기도 하더니 // 먼 훗날 기대 속에 / 휘감겨 사노라 / 어느새 / 가까이 와 있어”(「먼 훗날」)라는 회상은 세월의 덧없음과 비애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때는 / 지금 이렇게 / 슬며시 와 있는 / 이때를 / 몰랐”(「그때」)으며, “그 귀한 것들을 / 누리지도 못하고 / 그냥 보내 버렸다”(같은 시)고 늘그막의 후회와 비애를 토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지나가 버린 ‘그때, 그때’를 저리도록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심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 무상감을 극대화해 보이면서 그리운 과거를 역설적으로 돌아보는 「나는 싫소」는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참으면서 살았고 착하게 살려고 애썼으며, 이쁘게 보이려 겉치레도 했으나 강하게 살아왔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지금은 나 비록
알몸일지라도
때 되면 싹 틔워서 꽃피고
열매를 맺는
그런 기쁜 날을 마련함은
이 겨울이 나에게
베풀어 준 덕분임을
알고 있기에 춥지 않답니다
「겨울나무」 부분
라는 대목이나 “기쁨이 말하기를 / 오래 참고 / 오래 기다리면 / 반드시 온다고 하네요 // 그래서 참고 기다리고 / 준비하며 사는 거지요”(「기쁨」)에 이르면 시인의 평소 삶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때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석양이
산도 들도 길에도
황금을
쏟아 놓는다
함께하지 못함에
건네준 선물이리라
「석양의 선물」 부분
늘그막에 바라보이는 저녁놀을 석양의 선물(그것도 황금이라니)로 받아들이거나 「올챙이야」에서 현실사회에 막 들어서는 사람을 올챙이에 빗대면서 “너는 아느냐 / 네가 있는 그곳이 / 낙원이란 것을”이라는 구절 또한 세상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이며, “깜짝 사이 지나가는 /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지금”(「지금」)이라고 일깨우는 현실 인식 역시 시인의 그런 마음자리를 반영한다.
팔순에 접어든 시인은 그 연륜에 걸맞은 세계에서 소요하는 여유와 관용, 관조와 달관의 경지를 은은하게 형상화한다. 시 「상하좌우」에서는 문밖으로 나서면 상하좌우 중 하나를 당장 선택해야 하지만, 균형감각이나 판단력을 염두에 두면서도 “상하좌우 생각도 말고 / 내 맘대로 하고 살란다”는 대목이 말하듯,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한다고나 할까. 거침이 없다.
이 같은 여유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은 안다’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연상케 하는 “모르는 게 / 세상사 / 정답은 없다”(「정답」)라는 인식과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이 너그러운 여유는 또한 비우고 내려놓고 지우는 지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세상 구경」은 세상을 따스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그려 보이는 관조자의 모습을 진솔하게 떠올린다.
여보세요
어디 가세요
세상 구경하려구요
산들은 누워 있고
강물은 흘러가고
도심 속 사람들은
바삐도 오고 간다
여보세요
세상 구경 어떠세요
웃다가 울다가
만났다 헤어졌다
한바탕 연극을
보고 왔지요
따사롭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세상 구경」 전문
이 시에서 누군가의 물음에 화답하는 듯한 화자는 직접 연기를 하는 무대에서 벗어나 객석에만 자리 잡듯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따사롭고 /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지만, 「빗방울 속의 만남」에서는 관조자의 시선으로 비 내리는 밤의 버스 차창 밖을 무심히 바라보면서도 빗방울을 구슬이나 보석으로 변용해서 바라보는 ‘승화된 여유’가 아름답다.
시의 화자가 빗방울을 “나와 대화의 창을 두드린다”라고 보거나 “차창의 물방울들은 / 거리의 불빛을 받으며 / 눈부신 루비와 사파이어를 / 쏟아 놓는다”라고 루비와 사파이어로까지 격상해 바라보는 시각이 신선하고, 화자의 투영된 마음을 떠올리는 심상 풍경이라는 점에서도 시적 묘미가 돋보인다.
하지만 시인이 주로 객석에서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관람하는 입장으로 바뀌긴 해도 ‘인생극장’에서 은퇴한 건 아니며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럴 수도 없다. 「인생극장」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각본대로 남은 역할을 해야 하고 피날레를 향해 연기를 한다며, “지금도 / 인생극장 공연 중”이라고 건재를 알리면서 남은 역할에 대해서도 기꺼워한다. 남은 역할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실버의 멋」은 그런 서사를 함축해 보인다.
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기쁘다
그간 상하좌우를 보느라
어지러웠고
뒤통수 쫓느라 숨차게 왔는데
고지에 올라 보니
어느샌가
머리에 백설이 내렸다
지나온 길로
되돌아갈 수 없지만
어지럼도 숨참도
양식이었으니
힘 다해 쉬이 녹스는 실버를
그간 모아 둔 인내와 지혜로
쉼 없이 닦아
빛나진 않아도 실버만 누리는
은은한 멋은
품을 수 있답니다
어서들 오십시오
문 열어 놓겠습니다
「실버의 멋」 전문
“나 아직 / 할 일이 남아 있어 기쁘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여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기쁨이라는 메시지를 먼저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남아 있는 할 일은 물론 지난날과는 다르다.
어지럽도록 상하좌우를 살펴야 하고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숨차게 달려오면서 고지에 이른 게 지난 날들이었다. 하지만 흰 머리카락이 성성한 지금은 그 ‘어지럼’과 ‘숨참’, ‘인내’와 ‘지혜’가 양식이 되거나 모이고 쌓여 있어도 지난날들과는 달리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실버만 누리는 / 은은한 멋”을 추구하는 게 ‘남은 할 일’이고, 기쁨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실버의 멋’이 더 돋보이도록 하는 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향해 열려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이 품은 그 멋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어서들 오십시오 / 문 열어 놓겠습니다”라고 나눔과 베풂의 미덕까지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여유는 기쁨(즐거움)은 또 다른 데로도 번져 흐른다. 늘그막의 여고 동창회가 마음만은 마치 소녀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 주는 것 같기 때문일까. 「친구들아」라는 시에서 동창회를 “참새 떼가 전선 위에 나란히 / 옹기종기 재잘재잘”하는 데 비유하는가 하면, 「여고 졸업 예순 돌」에서는
얼굴의 주름은
너도 나도
눈을 감으니
보이지 않고
굽은 허리
느린 걸음
같구나, 같아
「여고 졸업 예순 돌」 부분
라고, 같이 늙어가는 비애마저 해학으로 변용하고 즐거움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얼굴의 주름은 / 너도 나도 / 눈을 감으니 /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의 이면은 마음만은 예순 해도 넘은 시절로 회귀한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창밖에 누워
날이면 날마다
나와 대면하는
먼 산
어제 내가
웃었는지 울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그대로다
무심하지만 한결같이
그대로 있어 주어
만날 수 있으니
그 헤아릴 수 없는 속이
얼마나 깊은 걸까
하지만 한결같은
나의 기다림은
속절없어 눈물겹다
—「먼 산」 전문
바람이 좋아
바람 부는 데로
숲이 좋아
숲이 우거진 데로
길인가 하여 가 보았더니
바람은 가고 숲은 끊어져
오던 길 돌아보았는데
모르는 체하더이다
길이 아닌가 하여
낯선 길 들어섰는데
그 길에서
우연히 한 사람 만나
째깍째깍 살고 있으니
어느새 낯설던 그 길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길」 부분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스쳐 지나다
명령에 순종하는 병사처럼
꼭 같은 순간에 마주친
눈길 덕분에
서로의 그대가 되었습니다
슬픔이 와도 견딜 수 있었고
기쁨이 오면 얼싸안고 뛰었습니다
그대가 아프면 나눌 수 없어
간절히 기도하며 소원했습니다
다시금 그대와 나
테너와 소프라노로 화음 맞추며
우리 만남이 필연이었음을
노래하게 해 주소서
그대와 나
손잡고 저 먼 산에 올라
마주 보며 해 저물도록
필연이어서 행복했노라고
노래를 불러요
산울림이 메아리 되어
우리의 만남이 필연이라고
외칠 겁니다
그 메아리를 언제까지나
가슴에 묻겠어요
—「필연」 전문
목차
자서
나의 노래
Ⅰ
먼 산 / 길 / 가고 있어요 / 나 이리 있어요 / 옛길 / 꽃이 피는 이유 / 기다림 / 좋은 옷 / 바람아, 불어다오 / 낙원 / 어쩌면 좋아 / 우짜라 카노 / 인생극장
Ⅱ
공든 탑 / 사랑 마중 / 필연 / 우산 속 데이트 / 우리의 풍경화 / 나랑 함께 살아요 / 덕분에 / 간밤의 꿈 / 나와의 대화 / 내일 이맘때 / 사랑이 없다면 / 있고 없고 / 그대로이다
Ⅲ
날마다 / 겨울나무 / 기쁨 / 나는 싫소 / 나는 모릅니다 / 석양의 선물 / 그때 / 묵은 놀이터 / 올챙이야 / 먼 훗날 / 지금 / 정 / 팔순에 보는 산
Ⅳ
실버의 멋 / 빗방울 속의 만남 / 친구들아 / 여고 졸업 예순 돌 / 지금은 어드메뇨 / 울음 / 세상 구경 / 상하좌우 / 정답 / 미라 / 결혼식 / 숙아, 잘 있제
해설 사랑과 그리움, 기다림의 시?이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