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장애학의 도전》을 통해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근본적 억압과 차별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장애학’이라는 비판적·실천적 학문을 대중적으로 알려냈던 연구활동가 김도현이 6년 만에 새 책으로 돌아왔다. ‘연구활동가’라는 호칭은 ‘장애인 차별 철폐’ 현장 투쟁과 연구 작업을 병행해왔던 그의 위치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연구를 통해 활동에 기여하는 사람”이라는 확장적 의미도 갖는다. 2017년 노들장애학궁리소를 꾸리면서 연구와 집필, 강연에 더욱 매진하게 된 저자는 장애인운동의 의미를 정리하고 또 널리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고 있다.
이번 《장애학의 시선》은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 해나간 여러 작업들(원고 및 강연)을 바탕으로 삼으면서, ‘장애학’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전작에서는 ‘변방의 시좌’인 장애학이 어떻게 비장애인 중심의 인식틀을 해체하고 우리를 다른 사유의 지평으로 데려갈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야말로 ‘장애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여러 의제와 담론에 대한 실천적 개입을 통해 펼쳐 보인다. 섹스와 젠더, 재난 및 참사, 능력주의, 노동, 기후위기 등 장애 문제와 착종되고 연결되는 폭넓은 사회 이슈에 대한 장애학 나름의 응답을 녹여내고자 했다.
2025년은 2001년 2월 서울역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이동권’을 요구하며 등장한 한국사회의 2세대 장애인운동이 사반세기를 맞은 해이다. 더불어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라는 슬로건 속에서 시작된 출근길 지하철 행동은 2025년 8월 21일로 900일을 맞았고, ‘한국판 T-4(나치의 장애인 학살 정책) 철폐’를 위한 여의도 농성도 어느새 1620일이 되었다. 이 숫자에 아로새겨져 있는 의미들을 알고자 한다면,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세계로의 전환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지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한국 장애학의 최전선이라 할 이 책이 훌륭한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출판사 리뷰
우리가 원하는 건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다
연립과 공생의 세계를 향해 내딛는 장애학의 한 걸음
장애인을 위한 세상?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
《장애학의 시선》 각 장(1~8장)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읽어나가다 보면 각각의 내용들이 서로 얽히고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연결성 속에서 몇 가지 지점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장애는 인간 일반의 문제에 부차적으로 덧붙여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인간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온전히 해명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 말이다.
장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단지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No one left behind’, ‘Leave no one behind’)라는 믿음은 이 책 전반에 하나의 태도로서 스며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일정한 비전과 윤리”를 탐색하는 장애학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제안하고자 한다.
“느리게라도 꾸준히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장애학의 시선에서 세상을 읽어내고 현장활동가들 및 독자 여러분들과 소통하는 작업을 힘닿는 데까지 해보려고 합니다. (……) 우리가 꿈꾸는 ‘연립聯立’과 ‘공생’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움직여가는 데, 이 책이 작은 쓰임새가 있기를 바랍니다.”
‘당사자성’과 ‘당파성’ 다시 쓰기: 시선의 폭력을 넘어 무엇을
에이블리즘(ableism), 즉 비장애중심주의와 능력주의로 점철된 세계를 아주 낯설게 만드는 것이 ‘장애학의 시선’이라면, 현실의 ‘장애인 당사자’를 향한 시선은 어떨까? 그들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까? 주로 차별과 동정의 시선이며, 그것은 혐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동정과 연민은 흔히 혐오와 반대되는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동전의 양면에 가깝다. (……) 양자는 매우 쉽게 전환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또한 동정은 혐오라고 인식되지 않기에, 선의로 포장되어 있기에 더욱 공고하고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장애인을 향한 이 사회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특히 정권을 틀어쥔 권력자들의 시선이 그렇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정당한 권리로 요구하며 싸워왔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일종의 배려와 시선施善(자선을 베풂)으로 여긴다.” 사실 이건 대다수 비장애인의 시선이기도 하다. 미처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무수한 장애 비하 표현들은 “여성혐오misogyny와 마찬가지로 장애혐오가 단지 어떤 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 장애혐오 표현을 피하는 방법은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다. 바로 장애인들의 존재를 감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 곁에서 숨 쉬며 함께 살아가는 시민임을 말이다.
우리 모두가 장애 당사자(혹은 공사자共事者)임을 깨닫는 것, 즉 장애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장애학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당사자다’라는 명제가 지닐 수 있는 모종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인식해야만 한다. 요컨대 이 명제가 정치적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당파성partisanship이 필요하며, 이때의 당파성이란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억압받는 이들과 사회운동이 추구하는 당파성의 기본 윤리가 바로 피억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억압자와 피억압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위치성 역시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참사와 재난 다시 보기: “중증장애인들에게 이 사회는 언제나 세월호였다”
장애인들이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 즉 있어도 없는 듯 살아가길 강요받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그들에게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큰 위험이다. 각종 참사와 재난에 일상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동권 투쟁을 촉발한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로도 장애인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죽어갔다. “단지 대중교통인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장애인은 수도관이 동파되어 흘러나온 물에 얼어 죽고,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시간에 난 화재로 불타 죽었으며, 장애등급 재심사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고 기초생활 수급권에서 탈락해 죽음으로 내몰렸다. 위험한 바깥세상과 달리 안전하다는 시설에서는 오히려 더 처참하게 죽어갔다. 온몸을 두들겨 맞아 죽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고, 밀폐된 환경에서 코로나19에 집단 감염되어 죽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죽어가야 했을까?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아니다. “‘사고가 나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도록 방치돼서’, ‘불이 나서’가 아니라 ‘달아나지 못해서’”(홍은전, 〈당신에게 이 사회는 언제나 참사였구나〉) 죽었다. 그 어떤 위험도 따르지 않는 삶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위험 그 자체가 아니다. 저자는 역사유물론의 핵심을 담지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을 패러디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험은 위험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위험은 재난/참사가 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위험을 재난/참사로 만드는 그 특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일이다. 장애인들로 하여금 위험에 대처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관계 내지 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ability’(비장애=능력/할 수 있음) 및 ‘disability’(장애=무능력/할 수 없음)라는 단어와 그에 얽힌 의미망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다. “능력/비장애와 무능력/장애는 근본적으로 ‘소유하고have’ 있는 것, 혹은 ‘지니고 있는with’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없다’는 것은 항상-이미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조건과 환경 속에서만 논해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인은 ‘people with disabilities’가 아니라 ‘disabled people’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후자의 단어에는 언제나 ‘by’(~에 의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렇게 생략되어 있는 (그래서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 장애인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위험에 대한 대처는 물론이고 우리 삶 전반을 관통하는 ‘능력/할 수 있음’과 ‘무능력/할 수 없음’은 결국 관계의 문제이며, 그 점에서 정확히 정치적인 문제다. 앞서 언급한 장애인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면, 활동 지원서비스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충분히 제공되었다면, 부양의무제나 불합리한 근로능력 평가 따위로 기초생활 수급권을 제한당하지 않았다면, 장애인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탈시설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지역사회에 마련되어 있었다면(아니, 애초부터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시설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면)”, 과연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을까?
자립생활운동의 주창자들이 ‘위험을 경험할 권리’를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안전이 아니다. 그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장애인들을 가두고 인격적인 삶을 박탈하는 시설은 더더욱 아니다. 장애인이 능력 없는 존재로 격하되지 않는 관계, 즉 차별과 억압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장애인운동이란 이처럼 어떤 존재가 ‘장애화/무력화disablement’되는 관계를 문제 삼는 운동인 것이다.
노동권과 탈시설: 장애해방을 향한 역사적 과제
한편, ‘장애사disability history’를 다루는 책들을 탐독해보면 ‘장애인’이라는 범주 자체에 내재한 긴장을 더 자세히 포착할 수 있다. 저자는 세라 F. 로즈의 《놀고먹을 권리는 없다No Right to Be Idle》(2017), 빌 휴스의 《장애의 역사사회학A Historical Sociology》(2019) 등의 문헌을 아우르면서 장애의 역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소개한다. ‘장애인’이란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발명된 개념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빌 휴스처럼 “고대에서부터 기독교 중세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시기에까지 이르는 장애사를 일관된 논지와 방법론에 따라 기술”하는 이들도 있다.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노동력의 상품화, 근대적 인간학의 형성, 생의학에 기반한 임상의학의 탄생 등이 맞물리면서 ‘의료적 장애 모델’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사회적 장애 모델과 상이한 관점을 견지한다.
킴 닐슨의 《장애의 역사》(2012)의 경우, 이런 식의 첨예한 논쟁점에서 한발 비켜나 있으면서도 장애사 분야에 충분히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인상과 달리 이 책은 “미국 장애인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장애의 ‘시좌position of view’에서 읽어낸 미국의 역사”에 가깝다. “장애를 이용해 역사에 질문하고 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장애가 어떻게 인종·젠더·계급·성적 지향과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장애의 역사》, 김승섭 옮김, 27쪽). 실제로 미국에서 장애(무능력)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민자, 게이와 레즈비언, 빈민, 여성과 같은 존재들을 2등 시민으로 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노예에 대해 ‘몸과 정신에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거나,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탱하기에는 “지나치게 장애가 있다”(《장애의 역사》, 200~201쪽)고 기록한 것이 바로 그 예다. 이처럼 《장애의 역사》는 장애인과 소수자 혐오에 대한 교차적 역사를 제시하면서, 장애차별주의의 본질이 다름 아닌 능력주의에 있음을 짚어낸다. 결국 “능력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장애차별주의는 사라지지 않으며, 역으로 장애차별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저자 역시 장애인이라는 개념/범주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었음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노동 체제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을 가리킨 범주였으며, 그들이 보내졌던 별도의 시설이 바로 장애인 시설의 기원을 이룬다.” 따라서 장애인의 노동권을 쟁취하는 것은 장애인운동의 핵심 사안이지만, “노동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부에 일정한 파열구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성취해내기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실질적인 ‘체제 전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 사안에서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등 전 세계의 장애인운동이 맞닥뜨린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장애인의 신체성 및 시간성에 반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 그 점에서 장애해방의 진정한 과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장애 배제적 노동사회의 철폐’(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구축)와 ‘시설사회의 철폐’다. 노동 문제와 시설 문제는 “‘장애인’이라는 개념 자체의 생성과 역사적으로 맞물려 있는 매우 근본적인 의제”인 것이다. 강고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장애인의 노동권이란 일종의 형용모순이며, 시설 문제 역시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장애인을 통치하는 방식”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시설사회를 “장애인의 삶의 공간과 양식을 비장애 중심 세계와 분할하고 격리하는 시스템을 지닌 사회”로 정의할 수 있다면, 설령 물리적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분할·격리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을 경우 그 사회는 시설사회다.
노동해방의 잠정적 유토피아: 불인정 노동자의 역사적 굴레를 넘어
노동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노동이 기본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즉 노동은 거부의 대상(노고와 고통)인 동시에 찬미의 대상(보람과 성취)이었으며, 의무인 동시에 권리이기도 하다. 저자는 노동의 이런 이중적 성격으로부터 노동해방에 대한 두 가지 ‘비개혁주의적 개혁’―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자극하고 촉발하는 개혁―이 도출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기본소득’ 제도를 통해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시민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단 한 번도 보편적인 권리로 확립되지 못했던 노동을 진정한 시민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전자가 ‘노동으로부터의from 해방’이라는 노선(탈노동사회)에 입각해 있다면, 후자는 ‘노동을 향한to 해방’이라는 노선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2014년 한 토론회에서 ‘공공시민노동’ 개념과 ‘중증장애인 공공고용제’를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했는데, 공공시민노동이란 ‘노동’은 ‘시민’의 권리이므로 ‘공공’ 영역에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 2017년 말부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 개’를 요구로 내걸고 지속적인 투쟁을 벌인 끝에 2020년 하반기부터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가 시행되었다. 이는 공공시민노동 개념에 바탕을 둔 최초의 고용 시스템이다.
아직 정교하게 구체화된 시스템은 아니지만, 공공시민노동은 비개혁주의적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기본소득보다 더 큰 잠재력을 지닌다. “자본주의 체제의 표층에 해당하는 재분배의 영역만을 재구조화하는 제도인” 기본소득과 달리 “보다 심층에 해당하는 생산의 영역에서 노동의 재구조화를” 꾀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노동의 탈상품화를 이뤄내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노동이 보편적 권리로 보장되는 사회를 향한 결정적 한걸음은 결국 자본주의적 노동 시스템의 해체와 재구성이다. 그리고 공공시민노동은 그러한 재구성을 위한 구체적 설계도가 될 수 있다. 그 구상이 제대로 실현된다면 중증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도 ‘불인정 노동자unrecognized worker’라는 역사적 굴레를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노동의 재구성을 통해 모두를 위한 노동사회가 구축될 때에만, 노동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놀이’가 아닌,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시민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정의와 장애정의,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
2022년 여름, 서울 신림동의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거주하던 40대 발달장애 여성과 일가족 3명이 서울·수도권의 집중호우로 집이 침수되면서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같은 날 상도동 반지하 주택에서도 50대 발달장애 여성이 비슷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은 ‘전 지구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2022년의 이 참사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장애인은 특히 더 불균형적으로 피해에 노출된다. 일례로 장애인의 폭염 취약도는 비장애인 비해 전반적으로 2.5배 높고, 특히 정신장애인과 지적장애인의 경우에는 각각 4배와 4.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장애인은 기후정의 운동에서 이야기하는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기후정책과 기후행동에서는 장애인이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참여적 부정의가 매우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상화된 기후재난의 시대에 참여적 정의가 요청되는 것은 단지 장애인이 더 큰 피해에 노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이자 피해 생존자로서 장애인의 체험이 제공할 수 있는 통찰력을 기후정책에 반영하지 못해 일반 대중의 취약성 또한 높아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장애정의disability justice 운동가인 패티 번은 “이 기후 혼란의 순간에 우리는 말한다. 우리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가르쳐줄 것이 있다. 만약 당신에게 들어볼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탈탄소 경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기후정의가 강조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가능하려면 노동의 영역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으며 공적인 개입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비개혁주의적 개혁으로서의 공공시민노동은 기후위기라는 시대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체제 전환을 모색하는 이행 전략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 독립적인 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지만, 읽어나 가다 보면 그 내용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점차 명확해지는 지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장애는 인간 일반의 문제에 부차적으로 덧붙여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인간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온전히 해명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시선’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장애인은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홈리스 등 다른 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시선을 많이 받는 존재다. 어떤 시선일까? 차별의 시선이고 동정의 시선이다. 시선이라는 단어는 ‘자선을 베풂’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기에, 약간의 언어유희를 부리자면 ‘시선施善의 시선視線’을 받는다.
장애학에서 쓰이는 조어 중 ‘싯포인트sitpoint’라는 것이 있다. ‘서 있는’ 지점을 뜻하는 ‘스탠드포인트standpoint’와의 대비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존재의 상이한 관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용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도현
1974년생으로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96년에 에바다복지회에서 발생한 비리 사태를 접하며 장애인운동을 시작한 후,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노들장애인야학, 장애인이동권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는 2017년 설립한 노들장애학궁리소의 연구활동가로 일한다.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칙 전문前文을 새로 고쳐 쓴 일, ‘야학夜學’을 ‘야학野學’으로 변경하자고 제안한 일을 생의 큰 영광이자 보람 중 하나로 여긴다. 쓴 책으로 《차별에 저항하라》(박종철출판사, 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 《장애학 함께 읽기》(그린비, 2009), 《장애학의 도전》(오월의봄, 2019)이 있으며,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그린비, 2011), 《장애학의 오늘을 말하다》(그린비, 2017), 《철학, 장애를 논하다》(그린비, 2020), 《장애와 유전자 정치》(그린비, 2021),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후마니타스, 2023)를 우리말로 옮겼다. 2004년에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가 수여하는 제2회 정태수상을, 2009년에 김진균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제4회 김진균상(사회운동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목차
책을 내며 • 5
1장 장애학의 시선: 단상들 • 17
시선의 시선 | 장애인이 있다 | 코호트 격리와 ‘이미’ | 사랑과 편견 | 당사자와 당파성, 그리고 관계론 | 가짜 정당의 진짜 정치 | 당장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 ‘공정성’을 어찌할 것인가 | 장애와 질병이라는 ‘범주’ | 변형과 변혁, 그리고 기후위기 |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2장 ‘섹스와 젠더’ 담론을 통한 ‘손상과 장애’의 재성찰 • 49
젠더와 장애,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개념 | 사회적 모델의 손상 및 장애에 대한 설명과 비판 지점 | 섹스와 손상에 대한 하나의 잠정적 이해 방식
3장 차별, 장애화, 불안전의 정치: 안전할 권리에 대한 관계론적 성찰 • 67
참사에 노출된 삶/생명, 장애인 | 문제는 위험이 아니라, 위험에 대처할 수 없는 무능력 | 사회구성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서의 장애인 | 국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No one left behind’와 ‘Leave no one behind’
4장 장애학, 장애사, 《장애의 역사》 • 91
장애사 분야에 대한 기본적 이해 | 북아메리카 토착민 사회에서의 장애 | 비장애중심주의와 능력주의 |
에이블리즘에 맞선 저항의 교차성 | 노동권과 탈시설, 장애해방을 향한 미완의 과제
5장 장애해방운동의 역사와 향후 과제 • 115
해방운동으로서의 장애인운동 | 제1기: 노동권 중심의 변혁적 장애인운동의 구축과 단절 | 제2기: 기본권 중심의 전투적 자립생활운동과 부모운동의 성장 | 제3기: 개별적 권리를 넘어선 시스템 전환을 위한 투쟁 | 향후 과제: 시설사회의 철폐와 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구축
6장 장애인 개인예산제, 무익하거나 혹은 나쁘거나 • 139
논의를 위해 확인해두어야 할 것 | 장애인 개인예산제의 무익함과 해로움 | 스웨덴이 개인예산제를 하고 있다? | 대안은 ‘서비스별 자기주도 사정’에 기반한 장애인권리예산제 | 정치의 신자유주의화와 장애인 개인예산제
7장 노동해방의 ‘잠정적 유토피아’, 기본소득인가 공공시민노동인가? • 159
언네서세리아트의 시대, 인간의 노동 | 노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노동의 이중적 성격과 노동해방으로의 두 가지 길 | 공공시민노동의 문제의식과 기본적 내용 | 기본소득 vs 공공시민노동
8장 기후위기와 장애 • 193
온난화의 시대는 끝났다 |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로서의 장애인 | 국제 인권 규범에서의 장애와 기후정의 | 기후행동과 기후정책에서의 참여적 (부)정의 | 정의로운 전환과 공공시민노동
미주 • 221
찾아보기 •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