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김근희의 시는 허무와 우울을 그 자신의 본질적인 정동으로 삼는다. 그의 시는 허무와 우울이라는 정동을 단순히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시인의 신체를 기반으로 한 정동들이 언어적 물질로 표현되는 시적 사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서(emotion)와 정동(affect)을 구분한다.
정동이 신체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라면, 정서는 사회언어학적으로 고정된 것이자 틀에 박힌 것에 해당한다. 정서는 인지적인 측면에 가까운 동시에 오래 지속되고 전 생애를 통해서 촉발되며, 이와 달리 정동은 일종의 신체적 현상으로서 스쳐 지나간다. 즉, 정서가 전기(biography)의 영역에 가깝다면, 정동은 생물학(biology)의 영역에 가깝다.
정서가 의미화의 시도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라면, 정동은 의미화의 시도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신체의 자질이다. 시적인 언어일수록 그러한 정동을 포획한다. 김근희의 시는 허무와 우울의 정동이 언어를 관통함으로써 물질적 실재가 되어버린 공간이다. 그곳에서 정동은 몸을 파편화하고 공간을 밀폐하며 인간에 대한 통념 자체를 해체시킨다.뭉크가시 돋친 노을을 욱여넣는 목젖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허연 동공이 하수구 속으로 소용돌이칠 때커다란 함성은 눈을 감는다혈흔처럼 말라가는 막다른 귀가 성대를 틀어막고서이제 버려야 할 것은 마음인가 사람인가지워지고 싶다한 점으로 쓰러져한 방울 핏물조차 삼켜버린 절명이고 싶다울음이 구멍 속으로 쏟아진다웃음이 더 큰 구멍에서 나를 분열시킨다메아리, 길고 긴 미로까지 끝끝내 거둬들인구멍투성이 가슴이다태양은 뜨고 변기통 물을 내린다흐물거리는 시간들이 콰르르 하수구 속으로 빨려든다지나간 시간은 가장 슬플 때입술에서 항문까지 매설된 강철 배관을 순식간에 통과한다
끈실오라기 한 올을 잡는다스웨터에서 털실을 굴려 감듯 줄줄이 흘러내리는 씨실 날실이 허리를 쓰러뜨리다 단 하나의 매듭에 간신히 일어서는뒤돌아보지 말라고 등 떠밀린 울음이 복부 한가운데 대못처럼 박혀만진다 배꼽을수태의 긴장을 기억하듯 옹골차다 눌러본다 그 깊디깊은 구멍을 풀면 전속력으로 해체될 내가 무서워 동여맨 하루를 손아귀에 꽉 쥐고 산다탯줄에서 떨어져 나간 후 수없이 매달렸던 손들은 흩어져 사라지고두 눈에 차오르는 물이 된 길뒤돌아 흘러가면 그 문을 다시 열 수 있을까 물그림자는 배꼽 언저리를 일렁이는데 거리는 또 무엇을 잡으려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것일까 무리를 놓친 새가 사라진 하늘 아래 환호와 비명의 노을은 내일보다 길다어제는 폭염을 비웃는 소나기가 성한 동아줄을 내렸다잠시 식다 음해진 열대야 속에서깃을 세운 불빛들이 부엽토처럼 쌓여간다
간유리 속의 나와 나의 어린 새들과 날개한 무리 새들이 허공을 그어 먹장구름이 화농처럼 흘러내려 두려웠다 버려지고 사라지는 깃털들을 겨드랑이에 매달면 새들이 떨군 둥지 하나 우연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불투명한 유리잔 속에 당신이 있어 나는 이내 액체로 젖는다 그리하여저녁이 올 것이다혼자 울 것이다액운은 운명처럼 투명해져 나를 껴입는다틈이 없는 털옷처럼 나는, 집착과 미련을 털어 낸 저물녘이 너무나 가벼운,내 몸을 줄곧 꿰매고 있다처음의 날개를 간직한 새장의 문을 연다허물이 된 살갗이 키우던 나의 병아리, 나의 어린 새들은 밤마다 열 개의 황금알을 낳고 개미와 벌과 나팔꽃 도마뱀을 낳다,빛나던 천국이 보이는 좁은 창틈으로 날개를 전해주던 이야기낮과 밤이 짧아지던 무렵반쯤은 흙빛이 되어가던 오후의 식탁은 정원보다 융성해져 새는 날아가지 못한다 창문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삼키려고 해사나운 바람 소리에 숨죽여 우는 밤 남겨진 나의 작은 병아리는 바닥으로 미끄러져 꿈은 줄행랑을 치고창은 벽보다 두껍고 캄캄해 거머쥔 손아귀로 홰를 치고 앉은 그 안위를,엄마, 급하게 닫은 닭장 문이 엄마처럼 날아가려 해추락을 허락한 날개는 바위를 덮쳐 뼛속보다 더 깊은 흉터를 들락거리고 있어 살의 무덤, 부재의 서식처, 간극을 비집고 들어가는 먹먹한 빛이 간유리 창에 부딪치는,이상하게도 더듬으면 아프지가 않아
작가 소개
지은이 : 김근희
서울 출생. 2013년 <발견>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외투>가 있다.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회복 10
바퀴 자국 12
높이뛰기 14
그림을 수정하다 16
길의 상상 18
끈 20
행방 22
상자의 속성 24
사월 26
절교 28
간유리 속의 나와 나의 어린 새들과 날개 30
뭉크 32
밀회 34
줄넘기 36
제2부
고사목 38
탈옥 40
사건번호 0 41
소리를 삼켰다 42
등 44
나무가 걸어간다 46
가위 손 48
휴식 50
도마질 52
우리들의 언어는 공기 방울이었고 54
해안선 56
동백, 날다 58
새벽에도 눈이 내렸다 60
제3부
그리고, 저녁 64
섬 66
만조 67
조우遭遇 68
여분의 온기 70
럭키 71
화이트아웃 72
여름 사냥 74
도어락 76
실종 77
무덤 78
알을 품고 싶다 80
소 82
엄마와 나와 가죽 소파와 애인이 84
제4부
살을 만지다 88
달맞이꽃 90
두 무덤 92
골목길 94
데칼코마니 95
집으로 가는 길 96
CUTTING 98
바바리 맨 100
크리넥스 102
피단 104
모색 106
최후의 창 108
안개 병동 110
버려둔 바다 112
▨ 김근희의 시세계 | 박대현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