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임해원의 시집 『드들강, 저 황홀한 내통』은 드들강이라는 지명을 존재와 세계를 비추는 거울로 확장한다. 강은 새의 죽음을 품어 순환을 노래하고, 유한한 계절과 기억 속에서 회귀의 질서를 드러낸다. 시인은 천주교적 기도, 불교의 무상, 유교의 성찰을 자연의 이미지 속에 교직하며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사유를 펼친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환이며, 상실은 회귀의 조건으로 나타난다. 새와 꽃, 강의 이미지는 생멸의 윤리를 환기하며, 존재의 근원적 순환을 보여준다. 시인은 비워내고 허락하는 윤리의 태도를 통해 타자와 세계를 감응의 기술로 다시 만난다.
드들강은 자연을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와 죽음을 성찰하는 철학적 장치로 제시된다. 강은 흐르고 새는 죽음을 넘어 노래하며, 시는 그 울음과 흐름을 기록함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세계는 살아 있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출판사 리뷰
임해원의 시집 『드들강, 저 황홀한 내통』은 드들강이라는 이름을 불러내는 일에서 출발하지만, 그 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를 비추는 거울로 확장된다. 강은 ‘들키는’ 존재로 나타나 인간의 인식을 교란하며, 새의 죽음을 품어 순환의 생태를 노래하고, 계절과 기억의 유한성 속에서 회귀의 질서를 드러낸다. 또한 시인은 천주교적 기도의 언어와 불교적 무상, 유교적 성찰을 자연의 이미지 속에 교직하여, 종교적 전통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사유를 펼쳐낸다.
『드들강, 저 황홀한 내통』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환이며, 상실은 끝이 아니라 회귀의 조건이다. 꽃은 지면서 다시 피고, 새는 강과 스며들며 이름을 노래로 남기며, 기억은 시차와 불일치 속에서도 존재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 시집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워내고 허락하며 보내는 윤리를 향한다. 강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기중심의 오만을 벗겨내고, 타자와 세계를 감응의 기술 속에서 다시 만난다.
오늘날 ‘드들강’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나 감상의 소재가 아니라, 존재와 죽음을 사유하는 철학적 장치이자 윤리적 훈련장으로 끌어올리고, 강은 여전히 흐르고, 새는 죽음을 넘어 노래하며, 꽃은 시들면서 다시 천 개의 눈을 뜬다. 임해원의 시는 이 흐름과 울음을 놓치지 않고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죽음 이후에도 세계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드들강, 저 황홀한 내통』은 그 깨달음을 서정의 언어로 건네는 한 권의 시적 의례다.
- 강나루(시인・문학평론가)
▣ 작품론
드들강, 삶과 죽음의 물길
- 임해원 시집 『드들강』
강 나 루
(시인·문학평론가)
1.
임해원의 시집 『드들강』은 잊힌 강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드들강은 전남 나주시 남평읍을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석강의 옛 이름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지도에서조차 지워진 이 이름을 시인은 되살려, 사라진 것을 환기하고 잊힌 것을 되불러낸다. 그러나 이 작업은 단순한 지명의 복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곧 존재와 시간의 심연을 불러내는 일이다.
「드들강」 연작에서 강은 자연 풍경의 배경이 아니다. 강은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초월과 구원의 물음을 담아내는 거대한 상징적 장치다. 빗방울이 강에게 들키듯, 강 또한 빗방울에 들키며, 그 물길은 바람과 산그늘, 새와 꽃, 그리고 인간의 불안을 비춘다. 강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바다로 가는지, 하늘로 돌아가는지, 혹은 되돌아오는지—그 알 수 없음 속에서 시인은 삶과 존재의 근본을 묻는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크게 네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강은 존재와 세계의 은유다. 강은 불가해성과 깊이를 드러내며, 인간 중심적 사고를 교란하는 타자의 질서로 나타난다. 둘째, 새와 죽음은 순환과 회귀의 상징이다. 새는 죽음을 넘어선 초월을 환유하고, 주검은 강과 스며들어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변환된다. 셋째, 시간과 기억은 상실과 회귀의 구조 속에서 형상화된다. 낙화와 회귀, 계절의 끝자락에서의 자기 성찰, 기억의 시차는 존재를 지탱하는 힘으로 드러난다. 넷째, 종교적 사유는 불교와 기독교의 상징을 교차시키며, 자연 속에서 구원과 해탈의 가능성을 탐문한다.
따라서 『드들강』은 단순한 자연 서정시의 범주에 가두기 어려운 작품집이다. 강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새와 꽃, 계절과 종교적 언어와 얽히며 인간 존재의 불안과 초월의 의미를 탐구하는 매개가 된다. 이 글은 강을 중심으로, 죽음과 기억, 종교적 사유가 어떻게 맞물려 순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드들강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의 훈련장이다. 강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얼마나 천천히 볼 수 있는가, 얼마나 정확히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 보낼 수 있는가. 강의 이미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계와 타자에 대한 감응의 기술로 완성된다. 이 훈련이 ‘드들강’이라는 특정 지명의 회복을 넘어, 사유의 지형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드들강’은 한국적 자연서정을 갱신하는 윤리적 미학의 현장이다.
다음 세 편의 시 「드들강 1」, 「드들강 5」, 「드들강 28」은 강을 사유의 장치로 세운다. 특히 어휘 선택과 호흡, 감각의 전환이 알아가려는 욕망에서 인간중심의 수정을 거쳐 타자를 허락하는 윤리로 이어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연출한다.
거미줄이 이슬에 들키듯
강에게 들킨 빗방울
빗방울에 들킨 강
저 강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生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간다고도 하고
하늘에 돌려준다고도 하고
돌아간다면
저 궁둥이 쳐든 비오리를 어떤 착한 말로 읽어야 하나
강의 물이 묻고 산의 그늘이 답하고
바람은 자취 없는 자취를 남기고
흰, 그 절박함을 집어삼킨 푸른 물빛을
새가 물 위에 꾹꾹 눌러쓴 상형문자를
시간의 저쪽 끝에 있는 너와
이쪽 끝에 있는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너만 모르고
나만 모르고
그림자에 그림자 포개지듯 어두워져 다만 쓸쓸함과 내통하는
저 하얀 맨발
아파라
저리 천천히 걸으면 바다까지 一生이 걸리겠다
- 「드들강 1- 첫, 그 이름이 내게 왔다」 전문
임해원의 시집에서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이다. 첫 시편 「드들강 1 – 첫, 그 이름이 내게 왔다」에서 시인은 “거미줄이 이슬에 들키듯/ 강에게 들킨 빗방울/ 빗방울에 들킨 강”이라며 ‘들키다’라는 동사를 반복한다. 주체와 객체가 번갈아 피사체와 관찰자로 뒤집히면서 관계가 순식간에 교란되는데, 이를 통하여 시적 세계의 초점은 누가 무엇을 ‘보는가’에서 ‘무엇이 무엇에게 드러나는가’로 넘어간다. 이때 강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들키는’ 존재로써 전면에 드러난다. 이 시는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인식의 물음과 더불어,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라는 호명의 윤리가 겹쳐 있어서, “시간의 저 쪽 끝에 있는 너와/ 이 쪽 끝에 있는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하나” 알지 못하는 상태가 단지 무지의 결핍이 아니라, 타자를 섣불리 명명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주저로 변환된다. “저 궁둥이 쳐든 비오리를 어떤 착한 말로 읽어야하나”라는 고민 또한 그러하다. 새를 ‘불쌍한 존재/자연의 희생’으로 즉시 명명해버리는 기계적·도식적 공감의 언어를 경계하며, 강-산그늘-바람이 이루는 자연의 문답을 먼저 듣겠다는 태도가 강조된다.
강기슭 저문 게 눈 흐려진 탓이라 믿었더니
물길 저리 깊은 까닭이고
바람소리 드문 게 귀 어둔 탓이라 믿었더니
산그늘 저리 깊은 까닭이었네
하루가 아슴아슴 저물어
강기슭이 물소리 되고
바람소리가 산그늘 되니
하염없어라
허공의 빗금에 진저리 치던 왜가리 한 마리
풀숲에 몸 숨기고 오래오래 서 있네
영원이라 착각하던 시간의 갈피에
놀 빛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사금파리 반짝이는 강물 위로 왼갖 소리들 뛰어다니네
- 「드들강 5- 내 탓 아니었네」 전문
이 시의 부제인 “내 탓 아니었네”는 자기변명이 아니다. 인간중심적 오독을 반성하는 말이다. “눈 흐려진 탓” “귀 어둔 탓”처럼 감각의 결함으로 돌리던 판단이 “물길 저리 깊은 까닭이고/ 산그늘 저리 깊은 까닭이었네”로 전환되면서 화자는 불투명한 것은 내 감각이 아니라, 자연의 본래적 심연이었음을 인정한다. 시선의 초점이 ‘나의 한계’에서 ‘세계의 깊이’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때 인상적인 대목은 감각의 치환이다. “하루가 아슴아슴 저물어/ 강기슭이 물소리 되고/ 바람소리가 산그늘 되”면서 강기슭이라는 ‘경계’가 물‘소리’로, 바람‘소리’가 산‘그늘’로 변환된다. 시는 시각·청각·촉각의 통로를 교차시켜 자연의 질서를 단일 감각으로 환원 불가한 복합성으로 제시한다. 이 치환은 곧 인간 인식의 언어가 자연의 층위를 따라가며 자기 자신을 수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금파리 반짝이는 강물 위로 온갖 소리들 뛰어 다니네”는 깨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미세한 빛들을 통해, 지식이 그림이 아니라 파편의 반짝임으로만 포착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내 탓’이 아니라, 그렇게만 허락하는 세계의 탓이다.
강의 깊은 한숨에서 시작된다
들어앉을 몸을 얻으려 원추리 허리 휘어놓고도
머무는 生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간다
어쩌면 회오리치는 것이 生일지 몰라
소리로 와서 소리 없이 사라질 줄 아는
바람이 바람 아닌 것 흔들어 저를 보여주듯
나 아닌 나를 깨운다
볕에 덴 그늘 가만가만 다독이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내 안이고 바깥이던 그대, 가버렸는가
제 그늘 삼킨 구름마저 품었나니
하늘의 비밀 엿듣고 어루더듬던 그대, 가버렸는가
지나가는 것들 제 소리로 유혹하지만
바람은 그 자리 그대로네
우두커니 멈춘 生
한 백 년쯤 시간 흐르고
소금처럼 깊어지려면 일어서서 더 걸어야겠다
두어 개 문살 부러진 문 열 듯
나보다 더 어두워진 사람을 곁에 두듯 바람을 허락하네
저녁이면 잎사귀들 캄캄히 몸 뒤집는데
열이레 달빛으로 길 밝혀 마음 떠나보내야겠다
- 「드들강 28- 바람은」 전문
이번 시는 강으로부터 바람의 기원을 여는데, “강의 깊은 한숨에서 시작 된다”. 강의 ‘한숨’은 고단함의 탄식이 아니라, 생성의 호흡이며, “머무는 生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간다/ 어쩌면 회오리치는 것이 生일지” 모른다며 정주(定住)보다 운동과 변환을 삶의 본질로 선언한다. 바람은 “소리로 와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운동으로서, 강의 호흡을 세계로 운반한다. “바람이 바람 아닌 것 흔들어 저를 보여주듯/ 나 아닌 나를 깨”우는 강과 바람은 ‘나’의 내부에 있던 타자를 건드린다. ‘나 아닌 나’라는 역설은, 초월이 외부에서 덮치는 사건이 아니라 내부의 타자성을 흔들어 깨우는 일임을 가리킨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내 안이고 바깥이던 그대”는 바로 그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선 타자다. 자연의 말을 듣던 “하늘의 비밀 엿듣고 어루더듬던 그대”라는 존재는 사라졌고, 자리를 비운 타자의 부재가 세계의 울림을 도리어 또렷하게 만든다. “지나가는 것들 제 소리로 유혹하지만/ 바람은 그 자리 그대로”라는 진술에서 움직임의 은유였던 바람이 머문다는 모순을 통해 무위의 운동을 드러낸다.
3.
그런가하면 다음의 세 시는 ‘새’라는 존재를 통해 죽음을 단절이 아닌 변환과 회귀로 사유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죽음-자연-언어의 삼항 구조를 만든다. 「드들강 13」은 죽음을 소실이 아니라 변환, 즉 등가로서의 초월을 보여주고, 「드들강 18」은 매질의 전환으로 순환의 생태를 드러내며, 「드들강 37」은 설명의 포기와 묘사로서의 기록을 통해 증언의 윤리를 확정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니라, 운동과 발화의 형식을 바꾸는 사건이다. 새의 길은 길을 남기지 않고(「드들강 13」), 강이 그 이름을 노래하며(「드들강 18」), 시인이 마침내 말한다(「드들강 37」). 이 자취 없음 → 노래 → 말하기의 순환이 바로 『드들강』이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방식이며, 강가에 선 시가 수행하는 작은 의례다. 주체의 시선은 ‘하늘로의 등가(等價)’, ‘강과의 침투(浸透)’, ‘증언의 윤리’라는 세 지점을 순차적으로 통과하며, 초월의 감각이 순환의 생태를 거쳐 발화의 책임으로 이동한다.
하늘 높다
흰 새 서너 마리
목 길게 세우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오래 기다렸으나
뺨이 붉은 새는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새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어떻게 눈 내리는 들판을 건너가는지
어떻게 놀 빛을 뚫고 들어가는지
공중의 새는 날아갈 뿐 따로 길을 내지 않았다
다만
모퉁이에 오래 서서 어두워진 사람이
손가락 들어
저만치 새의 자취를 가리켜 보일 뿐
기진해 두 날개를 접었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묻는다
까마득한 새
하늘이 됐다,고 대답한다
- 「드들강 13- 새의 길」 전문
「드들강 13」은 ‘길 없음의 길’을 이야기한다. “공중의 새는 날아갈 뿐 따로 길을 내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길은 흔적의 축적이 아니라 자취 없는 운동이다. 관찰자는 오래 기다리지만, 새는 “여전히 날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남긴 채 가시성의 경계를 벗어난다. 이때 “모퉁이에 오래 서서 어두워진 사람”은 시선의 윤곽이다. 그는 길을 만들 수 없고, 다만 가리켜 보일 뿐이다. 가리킴은 소유가 아니라 인접(隣接)의 제스처이고, 초월 앞에서 인간이 허락받은 최소한의 행위다. 마지막 행의 “지금 어디 있는가, 묻는다” “하늘이 됐다”는 문답은 존재의 상태를 위치가 아닌 하늘과의 동일성으로 바꾼다. “하늘이 됐다”는 말은 죽음을 사라짐으로 읽기보다, 질적 변환으로 읽힌다. 새는 죽어 ‘하늘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가 되는 전환을 수행한다. 여기서 죽음은 닫힘이 아니라, 확장으로서의 초월이다.
비오리 누워있다
뼈 드러나고 날개깃 부서졌다
자갈돌 몇 개 그 몸을 다물고 있다
꽉 다문 저 힘이 강을 흐르게 하고
새를 날게 했을 것이다
비오리 몸속으로 강이 흘렀고
흐르는 힘과 나는 힘이 서로 스치고 스미어
물속을 새가 날아가고
강은 새 이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저귀다, 지저귀다 목이 쉰 강
주검이 갈밭 틈새기를 다물고 있다
접힌 날개 여전히 강을 향하고
왼종일 물을 주시했을 부리는
죽음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갈꽃 난분분한 들녘
새 따라오고, 새 운다
부리 긴 새 하늘을 쪼면
너왓장 들추듯 버들치 튀어 오른다
더는 노래하지 못하는 새
적막에 오래 기대 울컥할 때
허공도 따라 울컥하고
그래도
갈밭 너머 햇살 희고
물빛 푸르고
나는,
- 「드들강 18- 갈밭」 전문
「드들강 18」은 “비오리 누워있다”는 진술으로써 죽어 널브러져 있는 비오리의 주검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자갈돌 몇 개 그 몸을 다물고 있”는 장면은 마치 매장의 순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비오리 몸속으로 강이 흘렀고/ 흐르는 힘과 나는 힘이 서로 스치”면서 살았을 때도 강은 몸 안을 흐르고 있었다는 인식은 이내 “물속을 새가 날아가고”라는 역설적 문장을 통해 죽음이 오자 강은 몸 밖의 흐름으로 돌출되었다는 인식으로 확장되고, 공중의 비행이 수중의 흐름으로 매질만 달리한 비행임을 보여준다. 즉, 화자는 생과 사는 매질의 전환일 뿐, 운동의 소멸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화자는 연이어 “강은 새 이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며 노래의 주체가 새에서 강으로 이동하는데, “지저귀다, 지저귀다 목이 쉰 강”이라며 더는 울지 못하는 새를 대신해, 강이 지저귄다. ‘목이 쉰’이라는 형용은 강의 물리성에 음성의 상처를 부여한다. 죽음을 목격한 강은 잠시 목이 쉰 합창자가 된다. 화자는 마침내 “접혀진 날개 여전히 강을 향하고” “부리는 죽음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며 비오리의 주검이 가진 물리적 형상을 의지의 잔상으로 승화한다. 이미 죽어버린 새의 자세는 더 이상 운동적이지 못하지만, 의지는 강을 향한다. 따라서 “그래도/ 갈밭 너머 햇살 희고/ 물빛 푸르고/ 나는,”이라는 화자의 독백은 값싼 위안이 아니라, 세계의 지속을 향한 미세한 귀환으로 상승한다.
흰 왜가리
물 아래, 더 아래를 가늠하듯 서 있었다
그 새, 갈밭에 누워있다
밤이었고
빛의 금을 치던 비와 불빛에 대해 이제 말해야겠다
새를 따라온 들녘이 주춤거릴 때
추운 바람이 잎들을 거둘 때
빗발이 줄곧 새의 몸에 스미던 일을
웅크렸고 소름 돋았고,
고이다, 고이다 새의 몸 밖으로 넘치던 빗물에 대해
그때
말을 잃은 적막이 울컥할 때
바람이 거두어 갈 몸인 줄 모르고
걷다
넘어지다
어떻게 갈밭에 누웠는지를
둘러보아도 다만 혼자
이제
온몸을 울먹이던 새의 목숨을 말할 차례다
저문 강의 물길에 한숨 내려놓은
새가 누워 있다고
날아오르던 높이에서 툭, 떨어졌다고
- 「드들강 37- 이제 말할 차례다」 전문
「드들강 37」은 증언의 순간을 호출한다. “이제 말할 차례다”라는 부제는 화자가 목격자에서 발화자로 이동했음을 표지한다. “물 아래, 더 아래를 가늠하듯 서있었다”는 살아있는 자세의 진술과 “그 새, 갈밭에 누워있다”는 죽음의 자세의 진술은 극적으로 대조되는데, 두 진술 사이의 공백은 시간의 경과를 재현한다. 그런가하면, “고이다, 고이다 새의 몸 밖으로 넘치던 빗물”은 반복과 동사의 느린 물결로 지속된 시간을 피부 감각으로 체현한다. “말을 잃은 적막”과 “울컥”의 병치는, 언어 이전의 울림을 드러냄으로써 말이 멈추는 지점에서, 발화의 필요를 역설적으로 발생시킨다. 그래서 바로 뒤에 “이제/ 온몸을 울먹이던 새의 목숨을 말할 차례”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 선언은 “저문 강의 물길에 한 숨 내려놓은/ 새가 누워 있다고/ 날아오르던 높이에서 툭, 떨어졌다고”라며 “흰 왜가리”의 죽음을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기록한다. 화자는 설명을 포기하고, 묘사로서의 증언한다. 이 선택은 윤리적이다. 죽음의 원인을 단정하는 대신, 몸과 세계가 서로를 통과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적는다.
4.
임해원 시인은 드들강이라는 장소에서 윤리적 미학의 현장을 발견하기도 하였고, 죽음은 단절과 상실이 아니라 변환이자 전환이며 순환으로써 연결될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제 시인의 목소리는 소멸마저도 완전한 끝이 아니며, 돌아올 시간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닿고 있다. 그러므로 “드들강”은 시간과 기억에 관한 회상이나 추억의 공간을 초월하여 상실을 견디고 삶을 지속하기 위한 세계이다. 즉, 상실과 회귀, 단절과 순환이 맞물려 빚어내는 세계를 사색하고 삶을 견디기 위한 윤리적 방법론을 모색하는 장소이다.
다음의 「드들강 15」, 「드들강 23」, 「드들강 35」, 「드들강 62」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간과 기억을 상실의 정동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끝에서 다시 순환의 질서를 발견한다. 이로써 계절의 유한성, 꽃의 낙화, 그리움의 시차, 오래된 기억이 시인의 세계에서 어떻게 생을 지탱하는 힘으로 변모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멀리 걷는 일이
눈빛이 깊어지는 일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
돌아오는 길
강둑 아래 노랑어리연을 오래 들여다보는 이유다
강을 들여다보는 나와 나를 들여다보는 내가 겹치는
가을이 며칠 남아있다
잎 지는 어느 날 강에게 나의 사소한 걱정을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청미래 넝쿨 손톱 세운 생채기에도
발부리에 차이는 주먹 돌에 허연 서리꽃이 피어도
나는 여전히 강둑을 걷고 있을 것이고
찬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
몸에 어리는 햇볕 한 줌씩 모으며
눈빛이 깊어져 돌아올 것이다
달이 둥글어지고
갈꽃 밟히는 소리 짠하게
날개를 끌며 걸어온 새가 자갈밭에 몸을 누이는
가을이 며칠 더 남아
나보다 더 숨죽인 나를 지켜보는 강에게
나의 사소한 걱정을 또 물을 것이다
- 「드들강 15- 가을이 며칠 남아있다」 전문
「드들강 15」는 며칠 남지 않은 가을을 배경으로 자기 성찰의 풍경을 펼친다. “멀리 걷는 일이/ 눈빛이 깊어지는 일”은 걷기를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인식의 심화로 연결한다. 가을이 끝나기 전 남은 ‘며칠’은 유한성의 시간이며, 그 시간 속에서 화자는 강을 들여다본다. “강을 들여다보는 나와 나를 들여다보는 내가 겹치는” 순간, 자연의 거울과 자아의 거울이 중첩되어 자기 응시의 깊이가 발생한다. 화자는 “강에게 나의 사소한 걱정을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진 않”는데, 중요한 것은 응답 여부가 아니라, 묻는 행위 자체가 화자의 사유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남은 ‘며칠’은 소멸의 시간인 동시에,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증하는 시간이다.
선암사 부활매
조실스님 걸음 따라 꽃잎 떨궈 절 마당을 가늠한다
낙화, 다시 꽃이다
봄, 가을 오고 가는 것 내 어쩔 수 없지만
세상은 기다리는 일을 가르쳐 준다
봄마다 환장하게 매달리는 흰 꽃, 흰 꽃들
꽃의 무게 못 견딘 하늘
여름 내내 붉게, 붉게 앓다가
가을, 잘 마른 이파리들 虛, 虛, 虛 강을 찢는다
때가 되면 푸르름 어기고 꽃으로 돌아가 볼 일이다
처음, 우리 모두 봄밤 배꽃 속으로
숨어드는 달처럼 그리 곱지 않았겠나
낙화를 때 늦은 회귀라 이름할 때
어둔 강에서는 눈물 냄새가 난다
- 「드들강 23- 낙화, 다시 꽃이다」 전문
「드들강 23」은 낙화(落花)의 역설을 집약한다. “낙화, 다시 꽃이다”라는 부제는 지는 꽃이 소멸이 아니라, 곧 회귀의 시작임의 선언으로 보인다. “봄, 가을 오고가는 것 내 어쩔 수 없지만”에서 드러나듯, 시간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나 그 질서 속에서 “세상은 기다리는 일을 가르쳐”주는 이유는 꽃이 지더라도 기다리면 또다시 피는 순환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 시에서는 ‘기다림’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시간의 직선성을 부정한다. 꽃의 소멸은 절망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 회귀의 조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둔 강에서는 눈물 냄새가 난다”는 사유는 순환을 단순한 위안으로 소비하지 않고자하는 화자의 의지가 드러나는 진술이다. 회귀의 뒤에는 여전히 상실의 비애가 깃들어 있다. 낙화는 곧 다시 꽃이 되지만, 그 과정은 눈물과 어둠을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회귀인 것이다.
너에게 닿을 거리쯤
나, 징검돌로 섰네
마주 보던 시간은 짧았으나 그리움은 길어
새벽이 빛을 모으던 강가
순정한 화석으로 흔들리는 동안
비워지는 것도 비운다는 것도 잊기로 했지
오래된 바람이 징검돌을 건너고 있어
새 한 마리 날아간다고 하늘이 흔들릴 줄
새 한 마리 날아간다고 나무가 멈칫할 줄
몰랐네
물에게 말 걸고
새에게 말 걸고
내 그림자에 말 걸 때
새벽이 어둠을 벗겨내고 있었지
새 가는 길 따라가다 하품처럼 눈물 맺히는
눈썹 없는 버들치처럼
지느러미 없는 자갈돌처럼
한 처음, 아무 소리 들리지 않던
너,
소실점
- 「드들강 35- 기억의 시차」 전문
「드들강 35」는 기억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마주보던 시간은 짧았으나 그리움은 길어”라는 진술에서 시간은 객관적 길이가 아니라, 정서적 체감에 따라 늘어나거나 축소된다. 시적 화자는 징검돌로 서서 강을 건너는 순간, 시간의 시차를 몸으로 경험한다. “새 한 마리 날아간다고 하늘이 흔들”리거나 “나무가 멈칫 할 줄” 몰랐던 경험은 사소한 사건이 세계 전체의 흔들림으로 확장되는 체험을 말한다. 이는 그리움이 세계를 진동시키는 방식이다. 시가 끝내 “소실점”으로 수렴함으로써 기억과 그리움이 시선의 소멸점에 도달함으로써, 기억은 사라지는 동시에 다시 세계를 조직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바람이 지우고 지워도
늘 새로 밝히는
슬픔 가득하나 청승은 없던 외할머니 닮은
봄,
참 오래된 기억
- 「드들강 62- 참 오래된 기억」 중에서
「드들강 62」는 기억의 가장 개인적 층위를 다룬다. 외할머니의 이미지와 봄날의 풍경은 개인적 역사와 세계의 정서가 겹치는 자리다. 흥미로운 것은 “슬픔 가득하나 청승은 없던”이라는 묘사다. 기억은 아픔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절망적 무너짐이 아니라 품위 있는 슬픔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정서적 원형으로 기능한다.
5.
임해원 시인은 천주교 신앙을 바탕에 두고 있으나, 유교적 관습과 불교적 세계관이 내면화되는 전형적인 한국인이기에, 그의 시에 성호(聖號)와 재의 수요일 같은 기독교의 표지가 불현듯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반야(般若), 연꽃, 무욕의 꽃 같은 불교적 언어가 자연스레 스며들고, 더 나아가 유교적 성찰의 어조가 배어드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기에 『드들강』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사유는 특정 종교의 관념에 갇히지 않고, 내재화한 전통 속에서 구원과 초월의 가능성을 탐문한다.
다음의 시편은 상실과 회귀, 단절과 순환을 동시에 보여준다. 「드들강 15」와 「드들강 23」은 계절과 꽃의 소멸 속에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보여주고, 「드들강 35」와 「드들강 62」는 기억과 그리움의 불일치 속에서 존재를 지탱하는 힘을 찾아낸다. 시간은 사라짐을 전제하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돌아옴을 예비하고, 기억은 불일치를 품으면서도 삶을 떠받친다. 『드들강』에서 시간과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상실을 견디는 윤리적 장치로 자리한다.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 없으리’
김종삼 시인의 고해가 못질하듯 들리는
삶이 내 것이 아님을 알아채는 곳
너무 좁아 온몸을 웅크려야 꽉 차고
너무 커서 온 세상 울음을 다 쏟아내고도 남을
몸에 묻혀온 검불 털어내는 곳
이제야 혼자가 되었냐며 눈 붉히는
항상 내 곁에
또한 너무 멀리 계시는 그 분께
갈증으로 넘치는 물을
허기로 가득한 위로를 청하네
사랑을 사랑했고
슬픔을 슬퍼했던 나를 찾아가려 하네
…(중략)…
나를 기도하지 마시고
이런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기도하소서
내 침묵은 묶어야 할 입이 너무 많다
- 「드들강 10- 침묵피정」 중에서
「드들강 10」은 기도와 침묵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김종삼의 「라산스카」에서 고해를 빌려와 시작하는 이 시는, 죄의식과 고해라는 기독교적 정서를 곧장 호출한다. “삶이 내 것이 아님을 알아채는 곳”에서 화자는 자기 주체성을 내려놓고, 절대적 타자의 앞에 서 있다. 시의 공간은 좁아 몸을 웅크려야 하지만, 동시에 너무 커서 “온 세상 울음”을 담아낼 수 있는 역설적 공간이다. 바로 그 공간에서 화자는 “사랑을 사랑했고/ 슬픔을 슬퍼했던 나”를 되찾고자 한다.
이 시의 핵심은 마지막 부분의 반전이다. “나를 기도하지 마시고/ 이런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기도하소서.” 구원의 청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향한다. 이는 신에게 ‘내 영혼을 살려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런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독특한 전환이다. 구원이 주체의 소유물이 아니라, 타자의 응시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얼른 나오세요
솔가지 삭정이들 손 모으고
참나무 장작더미 붉은 연꽃 피어
제 안에 소름 돋듯 타는 불을 감춘다
저승길 보인다는 오동꽃
가는 길 저리 환하다면
몸에 묻은 바람 내려놓으시라
칸칸이 묵언 들어앉은 연밥
턱 괴는 고요
모호한 자음 모음들 무심한 반야般若에 들듯
돌보다 깊은 잠에 들다
- 「드들강 19- 거화炬火」 전문
「드들강 19」는 불교적 장례 의례를 환기한다. “불 들어갑니다”라는 직접적인 구절은 화장(火葬)의 시작을 알린다. 불길은 “붉은 연꽃”으로 피어나고, 연꽃은 곧 불교적 해탈의 상징이다. 육신이 불태워지는 과정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몸에 묻은 바람 내려놓으시라”는 권유처럼 집착과 고통을 내려놓는 해탈의 과정으로 변환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모호한 자음 모음들”의 언어는 모호하게 흐려지고, “무심한 반야般若에 들듯” 깊은 참오는 이내 “돌보다 깊은 잠에 들”어서며 언어를 넘어선 고요의 세계가 열린다. 불길은 파괴가 아니라, 무심과 반야의 경지로 들어가는 문이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고요로 전환되는 것이다.
더위 먹어 죄다 풀죽은 한낮
홀로 직립 중
입 지우고 묵묵 귀만 남기고
빗방울도 빛도 다 꽃에 공양된다
세상 제일 허망한 것이 제 生인 줄 모르고
누구 詩에 제 이름 써지는 것 까마득히 모른 체
언제까지 서럽도록 붉으면 되냐고
언제 지면 되냐고 묻지 않는
황혼댈녘
풋잠들 듯 시듦을 예비한다
無慾, 더는 어려워
꽃이 열어준 환한 그늘을 전생의 에움길처럼 추억하는
가슴 저미는 슬픔의 배후를 곰곰 따라가다 보면
해서체 흘림 같은 마디마디가 풍화한다
시샘도 없고
욕망도 없는
부처꽃
천개의 눈을 떴다
- 「드들강 56- 부처꽃」 전문
「드들강 56 – 부처꽃」에서 시인은 한낮의 더위 속에서도 “홀로 직립”한 꽃을 묘사하며, 이를 욕망을 버리고 묵묵히 서 있는 존재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입 지우고 묵묵 귀만 남기고/ 빗방울도 빛도 다 꽃에 공양된다”는 구절은, 부처꽃이 언어와 욕망을 내려놓은 채 세계와 조우하는 방식—받아들임과 청취의 자세—를 드러낸다. 꽃은 자신이 언제까지 붉어야 하는지, 언제 시들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으며, 죽음을 “풋잠들 듯” 예비한다. 그러나 시는 단순히 불교적 무욕의 표상에 머물지 않는다. “무욕, 더는 어려워”라는 고백은 인간에게 무욕이 불가능한 과제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처꽃이 그 불가능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샘도 없고/ 욕망도 없는/ 부처꽃/ 천개의 눈을” 뜸으로써 꽃은 욕망을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다중적 시선의 존재로 거듭난다. 불교적 깨달음과 절제, 그리고 천주교적 초월의식이 겹침으로써 한 송이 꽃은 곧 인간이 닿지 못하는 초월의 지평을 대신 살아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6.
임해원의 시집 『드들강』은 드들강이라는 이름을 불러내는 일에서 출발하지만, 그 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를 비추는 거울로 확장된다. 강은 ‘들키는’ 존재로 나타나 인간의 인식을 교란하며, 새의 죽음을 품어 순환의 생태를 노래하고, 계절과 기억의 유한성 속에서 회귀의 질서를 드러낸다. 또한 시인은 천주교적 기도의 언어와 불교적 무상, 유교적 성찰을 자연의 이미지 속에 교직하여, 종교적 전통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사유를 펼쳐낸다.
『드들강』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환이며, 상실은 끝이 아니라 회귀의 조건이다. 꽃은 지면서 다시 피고, 새는 강과 스며들며 이름을 노래로 남기며, 기억은 시차와 불일치 속에서도 존재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 시집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워내고 허락하며 보내는 윤리를 향한다. 강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기중심의 오만을 벗겨내고, 타자와 세계를 감응의 기술 속에서 다시 만난다.
오늘날 『드들강』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나 감상의 소재가 아니라, 존재와 죽음을 사유하는 철학적 장치이자 윤리적 훈련장으로 끌어올리고, 강은 여전히 흐르고, 새는 죽음을 넘어 노래하며, 꽃은 시들면서 다시 천 개의 눈을 뜬다. 임해원의 시는 이 흐름과 울음을 놓치지 않고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죽음 이후에도 세계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드들강』은 그 깨달음을 서정의 언어로 건네는 한 권의 시적 의례다.
드들강 1
- 첫, 그 이름이 내게 왔다
거미줄이 이슬에 들키듯
강에게 들킨 빗방울
빗방울에 들킨 강
저 강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生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간다고도 하고
하늘에 돌려준다고도 하고
돌아간다면
저 궁둥이 쳐든 비오리를 어떤 착한 말로 읽어야 하나
강의 물이 묻고 산의 그늘이 답하고
바람은 자취 없는 자취를 남기고
흰, 그 절박함을 집어삼킨 푸른 물빛을
새가 물 위에 꾹꾹 눌러쓴 상형문자를
시간의 저 쪽 끝에 있는 너와
이쪽 끝에 있는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너만 모르고
나만 모르고
그림자에 그림자 포개지듯 어두워져 다만 쓸쓸함과 내통하는
저 하얀 맨발
아파라
저리 천천히 걸으면 바다까지 一生이 걸리겠다
✽드들강; 전남 나주시 남평읍을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석강의 옛 이름
드들강 2
- 소리의 회유
강변 수풀 어디
비명처럼 울어 댄다
놀랐냐?
야, 나는 더 놀랐다야!
새끼 품은 고라니였을까
견딜 수 없이 소란스런 세상
새끼 두고 갈 수 없어 몸도 일으키지 않았다
어린 것 파고들어 물큰한 젖 뚝 뚝 떨어지고
길 내준 풀잎들 슬쩍 비껴 앉는데
그 어미도 소리의 어미도 바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처음 그건 작고 연약한 숨소리였지
궁상각치우 어르는 풀 울음이 여린 잎 틔우듯
바람 드나드는 문풍지 같은 목젖의 떨림이
소리가 되려고 얼마나 많은 숨길을 귀에 담았을까
갈대와 바람, 겨루는 소리가
하루를 씻어내는 낭아꽃 얼굴 적시는 빗소리가
묵묵 귀만 남긴 내 발자국과 나란한 물결에
풀숲이 허락하는 만큼의 음역대로 스민다
새끼 품은 어미들
겨우 소리만 품은 어린 것들
숨어서 오직 견뎌내는 것들
애썼다
애썼다
드들강 3
- 적寂
헝클어진 묘지 길
혼魂 터
세상 어휘 부족하고 무릎 꿇는 일 서툴던
그가 누워있다
누군가를 위해 물길처럼 낮아지고
누군가를 덥혀주려 불길처럼 굽어지고
남의 그늘에 가려 제 그늘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
손가락 꼽으며 기다리는 상사
오는 이 없는 온전한 자유
죽음이 지루해
몸에 감긴 수의 벗어 던질 때
어스름 들쳐 업은 저 건너 비탈 밭
바람 소리 헤아려 거두느라 몇 종지 눈물, 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임해원
· 광주 출생·경희대학교 가정학과 졸업·200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2023년 《시와사람》 신인상 당선·다박솔 동인·광주문인협회 회원
목차
시인의 말
드들강 1 - 첫, 그 이름이 내게 왔다 _ 12
드들강 2 - 소리의 회유 _ 14
드들강 3 - 적寂 _ 16
드들강 4 - 봉인 _ 17
드들강 5 - 내 탓 아니었네 _ 19
드들강 6 - 적막, 그 긴 두려움 _ 20
드들강 7 - 새의 어둠에 대하여 _ 21
드들강 8 - 이팝꽃 _ 22
드들강 9 - 서로 닮은 고요의 눈썹들 _ 23
드들강 10 - 침묵피정 _ 25
드들강 11 - 오랜, 지극하거나 뻔한 사이 _ 27
드들강 12 - 소리의 무덤 _ 29
드들강 13 - 새의 길 _ 31
드들강 14 - 붉새가 떴다 _ 33
드들강 15 - 가을이 며칠 남아있다 _ 35
드들강 16 - 숫눈 1 _ 37
드들강 17 - 숫눈 2 _ 38
드들강 18 - 갈밭 _ 39
드들강 19 - 거화炬火 _ 41
드들강 20 - 멀다 _ 42
드들강 21 - 여기 _ 44
드들강 22 - 나무랄 일 아니다 _ 46
드들강 23 - 낙화, 다시 꽃이다 _ 47
드들강 24 - 물수제비 띄우다 _ 48
드들강 25 - 상응 _ 49
드들강 26 - 느티, 하늘에 뜬 섬이 되다 _ 50
드들강 27 - 시월이어서 _ 52
드들강 28 - 바람은 _ 54
드들강 29 - 달의 배후 _ 56
드들강 30 - 비 내려 왜가리 다리 짧아졌다 _ 57
드들강 31 - 문 열어라, 달 들어오게 _ 58
드들강 32 - 웃비 _ 60
드들강 33 - 12월 _ 62
드들강 34 - 돌을 위한 각서 _ 64
드들강 35 - 기억의 시차 _ 65
드들강 36 - 괜시리 _ 67
드들강 37 - 이제 말할 차례다 _ 69
드들강 38 - 꽃의 幻 _ 71
드들강 39 - 혼잣말을 알아듣네 _ 73
드들강 40 - 고요가 품은 이, 나뿐 아니었네 _ 74
드들강 41 - 발길질 없는 날개, 이겨낼 바람 없다 _ 76
드들강 42 - 그림자, 겹겹이다 _ 77
드들강 43 - 여우비 오는 날 _ 78
드들강 44 - 다 눈물의 일 _ 79
드들강 45 - 노을을 앓다 _ 80
드들강 46 - 물에 이르다 _ 82
드들강 47 - 나처럼 낯선 _ 84
드들강 48 - 멈추어, 말문을 닫다 _ 86
드들강 49 - 해거름을 듣는 물음 _ 87
드들강 50 - 꽃을 헛딛다 _ 88
드들강 51 - 바디소리에 귀를 묻는다 _ 89
드들강 52 - 그믐달, 내 소박데기 _ 90
드들강 53 - 안개초 _ 91
드들강 54 - 바람의 전언 _ 92
드들강 55 - 생각이 사라지는 곳, 거기 _ 94
드들강 56 - 부처꽃 _ 95
드들강 57 - 봄, 가지런하다 _ 96
드들강 58 - 내 귀는 둥글다 _ 97
드들강 59 - 빗소리는 응시가 필요하다 _ 98
드들강 60 - 꽃무릇 _ 100
드들강 61 - 다정한 이름들 _ 102
드들강 62 - 참 오래된 기억 _ 103
드들강 63 - 조팝을 의심하다 _ 104
드들강 64 - 절정, 그 후 _ 105
드들강 65 - 저녁은 _ 106
드들강 66 - 고사리가 눈을 가린다 _ 107
드들강 67 - 깨우지 마라, 고운 잠 _ 109
드들강 68 - 동백이 봄을 묻네 _ 110
드들강 69 - 그래도 다시 올, 봄 _ 111
드들강 70 -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달, 구월 _ 113
드들강 71 - 쉼 _ 114
드들강 72 - 닫힌다, 한 철 _ 116
|작품론|
드들강, 삶과 죽음의 물길 / 강나루 _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