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사유의 방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꽃과 동물, 인간이 남긴 기억과 흔적은 모두 시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자연의 작은 생명까지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며, 생명의 경이와 탄생과 소멸의 질서를 받아 적는다. “발길 멈추고 예식을 본다”는 증언의 태도다.
일상의 사소한 풍경은 시간을 매개로 환상과 신비로 확장된다. 여우의 조우와 멸치 똥을 고르는 노동이 현실과 허상을 잇는 통로가 된다. 이국의 춤과 남국의 바다는 육체와 자연의 리듬으로 시간을 체현하게 한다. 기억은 현재와 이어져 미래를 구성하는 자원이 된다.
1부는 존재 앞에서 멈추고 듣고 기록하는 법을, 2부는 일상의 환상을, 3부는 낯선 풍경의 숭고를, 4부는 개인과 공동체의 시간을 보여준다. 자연과 인간, 실제와 허상을 시간이라는 축으로 엮어 “시간을 향한 경건한 태도의 기록”을 완성한다.
출판사 리뷰
경건한 응시와 시간의 기록일지
- 정영숙 시집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
강 나 루
(시인, 문학평론가)
1.
정영숙의 시집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는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사유의 방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이 사유하는 시간은 존재와 존재를 이어 주는 매개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존재이다. 꽃이 피고 지는 순간, 동물의 숨소리, 인간이 남긴 기억과 흔적은 모두 시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시인은 꽃과 동물, 인간을 관찰하고 알고자 탐구하듯, 시간 또한 관찰하고 탐구하려 시도한다. 시간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심하게 듣고 바라보며, 마치 의례에 참여하듯 공손하게 태도를 유지하는 근간이 그러하다. 그러나 시인의 시간에 관한 사유는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매개하고자 하는 여러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이뤄진다.
자연은 살아 있는 생명의 장으로 나타난다. 직박구리, 목련, 민들레, 여우, 멸치, 나무와 꽃들은 시간을 품고 존재를 드러내는 증언자이다. 시인은 그 증언을 받아 적으며, 작은 생명까지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 그렇게 자연은 시 속에서 생명의 경이와 탄생과 소멸의 질서를 보여준다.
시간은 또한 인간의 기억을 매개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터, 잃어버린 가족과 이웃, 고단한 생계의 풍경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다. 시인은 그 흔적을 다시 불러내어 삶의 의미를 확인한다. 기억은 단절되지 않고 현재와 이어지며, 미래를 구성하는 자원이 된다. 그래서 이 시집은 개인의 삶을 넘어 세대와 공동체의 시간을 함께 안아낸다.
시인은 현실의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여우를 마주치는 순간, 멸치 똥을 고르는 노동, 이국의 풍경과 우주의 상상은 모두 현실과 허상을 잇는 통로가 된다. 시간은 이 통로를 열어 주는 힘이다. 현실은 시간 속에서 환상으로 이어지고, 상상은 다시 현실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는 자연과 인간, 실제와 허상을 모두 시간이라는 축으로 엮어낸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시간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존중하며 맞이한다. 그래서 이 시집은 결국 시간을 향한 경건한 태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
정영숙 시인의 시선은 자연의 미세한 생명과 풍경을 포착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시인은 직박구리, 목련, 심해의 생물 등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도 시간을 품은 존재로서 존중하며, 생명의 경이와 내밀성을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생명 자체가 지닌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목련이 터지고
직박구리 한 쌍
새하얀 침구에
신방 차렸다
햇볕도 눈부시게
그들을 비추고
하얀 드레스 입은
신부처럼 단아한 모습
발길 멈추고 예식을 본다
봄바람에 축가가 흐르고
셔터 터지는 소리
부케 한 다발 날아간다
- 「직박구리」 전문
화자는 자연의 짝짓기를 혼례로 치환하고 있다. 목련의 꽃잎은 “새하얀 침구”가 되고, 가지 위의 둥지는 “신방”이 된다. 이 장면은 생물학적 번식의 기록이 아니라, 삶이 새로운 질서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의례로 격상된다. 흰 목련의 색채는 순결의 표상일 뿐 아니라, 겨울의 공백을 지나온 봄의 강렬한 빛을 상징한다. 눈부신 빛이 “그들을 비추”는 순간, 화자는 오래 응시하지 못하고 “발길을 멈”춘다. 그 멈춤은 곧 자연 앞에서 취해야 할 겸허의 태도이다.
인간의 결혼식은 주인공들을 비추는 조명과 음악이 필수 요소인데, “햇볕도 눈부시게/ 그들을 비추”며 조명이 되고, “봄바람에 축가가 흐”른다. 자연의 사건에 화자의 인간적 인식이 덧입혀지면서, 생명은 하나의 합주 속에서 숭고하게 드러난다. 또한 이어지는 “셔터 터지는 소리”는 인간적 개입의 흔적이지만, 방해가 아니라 기록의 행위로서, 의례의 순간을 장면으로 간직하게 하는 장치이다. “한 다발 날아”가는 부케는 이 혼례가 단발성이 아닐 것이라는 화자의 확신으로 보인다. 이렇듯 자연의 번식과 인간의 의례가 겹친 자리에서 시인은 시간의 바통은 다음 존재에게 전해지는 연속성과 반복성을 가짐을 확인한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자의 위치다. 그는 주례도, 주인공도 아닌 ‘증인’이다. “발길 멈추고 예식을 본다”는 진술은 관찰을 넘어선 증언의 태도다. 자연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다만 그 존엄한 순간을 경건하게 목격한다. 이 증인의 자리가 바로 시인이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정의하는 지점이다.
한편, 시인은 다음의 「심해」에서 인간적 감각과 사고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무대로 삼아, 존재의 또 다른 양식을 드러낸다.
몇백억 년의 물질을
어둠의 세계에 가두고
단 한 줄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 곳
눈도 귀도 필요하지 않아
오직 감각의 더듬이로
일 밀리 움직일 때 십 년쯤
그렇게 수억 년을 살아가는 생물은
그곳이 세상의 전부일거야
복잡한 생각과 일머리 같은 건 없어도
수압에 익숙한 존재로
진화해 온 은밀한 곳
비밀을 털지 마
그 깊고 깊은 속은 세상의 전부
때론, 혼자이고 싶어
- 「심해」 전문
화자는 까마득한 시간과 깊이로 인해 인간의 생애나 역사적 척도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심연을 제시한다. 이 세계는 “눈도 귀도 필요하지 않아”서 “오직 감각의 더듬이”만이 감각기관으로써 사용되는, 인간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각이 무가치하다. 생명은 촉각적 감각을 통해 세계를 탐지하며, 빛과 소리 대신 진동과 접촉으로 자신을 연명한다. “일 밀리 움직일 때 십 년쯤”이라는 과장된 표현은 인간적 시간 체계와 다른 리듬을 상기시키며, 지연과 정지가 오히려 삶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질서를 환기한다.
이러한 세계를 화자는 외부에서 함부로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일거”라는 화자의 감상은 이 세계가 그 내부에서 완결되는 독립적 생존의 질서를 가졌음을 강조한다. 이어서 “비밀을 털지” 말라는 부탁은 화자의 것인지 심해생물의 것인지 모호하다. 이 모호함은 이 독백이 독백이 아닌 군집의 권위를 갖는 듯하여 심해의 은밀함은 폭로하거나 해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존하고 존중해야 할 질서로 여겨진다. “때론, 혼자이고 싶”다는 독백 또한 발화자의 모호함에 의해 심해라는 공간의 진술을 넘어, 인간 내면의 깊은 고독을 드러내는 고백으로 여겨지고, 나아가 자연의 은밀한 심연은 인간의 내면적 심연과 겹쳐지며, 서로의 거울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심해」는 빛이 닿지 않는 바다의 깊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인간 내면의 고독과 내밀함을 비추는 은유적 장치로 기능한다. 시인은 그 세계를 폭로하지 않고, 존중하며, 경건하게 응시한다.
지금까지 다룬 두 편의 시는 자연을 하나의 증언자로 불러내는데, 정영숙의 시선은 그 증언을 받아 적는 태도, 즉 공손함에서 비롯된다. 사소해 보이는 생명과 풍경을 존엄한 기록으로 남기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시집의 출발점이다. 그렇기에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의 1부는 존재 앞에서 멈추고 듣고 기록하는 법, 곧 시간과 생명 앞에서 공손히 서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깨워 준다.
3.
2부에서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 속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드나드는 체험을 보여준다. 시인이 응시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순간들이지만 시간을 매개로 하여 낯설고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상은 평범한 기록의 차원을 벗어나, 환상과 성찰이 교차하는 무대로 변모한다. 이처럼 2부는 일상이라는 틀을 통해 세계의 내밀한 차원을 열어 보인다.
똘망한 눈동자는 여시가 아니다
브이 라인 확실한 턱과 주둥이
웅크린 작은 몸
멀지 않은 숲에서 마실 나온 강아지처럼
자동차 불빛에 반짝이는 눈과
한참 동안 숨죽이고 대화를 나눴다
여우 꼬랑지가 풀밭에
그림을 그린다
크리스탈 호수위에 붉은 물감을 풀어 놓고
슬그머니 멀어져가는 노을과
붓칠한 여우 꼬리는 숲으로 멀어져 갔다
- 「여우를 보았다」 전문
「여우를 보았다」는 일상의 순간을 환상으로 바꿔내는 시적 전환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 여우의 외양은 처음에는 세밀하게 묘사된다. “브이 라인 확실한 턱과 주둥이/ 웅크린 작은 몸”이라는 구체적 이미지 속에서 여우는 현실의 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곧 화자는 그것을 “강아지처럼”이라고 치환하며 경계선을 흔든다. 일련의 관찰에서 여우와 강아지, 야생과 가축 사이의 분명해야 할 구분은 점차 희미해지고, 이내 “자동차 불빛에 반짝이는 눈”을 통해서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의 빛을 동시에 반사한다. 화자는 “한참 동안 숨죽이고 대화를 나눴다”고 말하는데, 이 대화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응시와 응시가 교차하는 순간이 마치 교감의 언어가 된 듯 묘사된다. 이어서 “여우 꼬랑지가 풀밭에/ 그림을 그리”면서 현실의 사건을 미학적 형상으로 끌어올린다. 이러한 화자의 미학적 시점의 관찰은 “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노을과 “붓칠한 여우 꼬리”가 겹치면서, 자연과 환영이 회화적 장면으로 완결된다. 이로써 여우는 결국 숲으로 사라지지만, 화자의 시선 속에서 그 흔적은 그림처럼 남는다. 이 시에서 화자는 환영과 현실을 오가며, 순간을 시간의 회화로 기록하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여우를 붙잡거나 해명하려 시도하지 않고, 다만 증언하듯 그 장면을 남긴다.
즉, 화자는 일상의 풍경에서 환상을 목격하는 순간을 기록한다. 화자가 본 여우는 뚜렷한 형체로 확정되지 않는다. “똘망한 눈동자”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숲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이 모호함 속에서 화자는 여우의 눈빛과 “숨죽이고 대화”를 나눈다. 말이 아닌 응시의 교감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흔들어 놓는다. 여우 꼬리가 풀밭에 남긴 흔적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숲에 새겨진 상징적 도상이 되고, 마지막에 노을과 꼬리가 겹쳐지면서 자연현상은 환상적 이미지로 변모한다. 현실 속 동물이면서 동시에 환영인 여우는, 시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존재의 이면을 상징한다.
마른 멸치 한 포를 풀자
은빛 바다가 파도를 타고 밀려온다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물고기
렌틸 콩알만 한 머리에 딸려 나온 내장
까만 똥에 바짝 눌러붙어 보이지 않는
위, 대장, 간, 쓸개와 그 밖의 장기를 상상하며
등줄기에 실선처럼 가는 핏줄
두근두근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
작은 목숨들이 띠를 만들며
깊고 푸른 긴 터널을
좁쌀보다 작은 눈알 반짝이며
生의 문장을 읽어 나갔을 거친 바다의 숨
똥, 똥, 소화 덜 된 똥 찌꺼기를
손으로 만진다, 비릿한 똥의 질감
멸치 똥만큼의 하루를 따면서
바다의 심장 속으로 유영하는
한 마리 작은 물고기를 꿈꾼다
- 「멸치 똥을 따면서」 전문
「멸치 똥을 따면서」는 사소한 노동을 우주적 상상으로 전환한다. 멸치 한 포를 푸는 순간 “은빛 바다가 파도를 타고” 밀려오는 이미지는 노동과 풍경을 겹치게 한다. 시인은 멸치의 내장을 상상하며 “위, 대장, 간, 쓸개”와 같은 장기를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이 상상은 단순한 해부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작은 생명에 내재된 세계의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로 읽힌다. “두근두근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이라는 구절은 이미 죽은 멸치를 살아 있는 존재로 다시 불러내는 증언의 언어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작은 눈들이 반짝이며 “生의 문장을 읽어 나갔을 거친 바다의 숨”으로 확장된다. 멸치가 개체의 삶을 넘어 바다 전체의 호흡과 맞닿는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환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똥, 똥”이라는 의성어와 “비릿한 똥의 질감” 같은 직접적인 감각 묘사는 환상과 현실을 동시에 붙잡는다. 결국 화자는 “멸치 똥만큼의 하루를 따면서”라는 문장에서 노동과 시간을 등가로 겹친다. 하루의 삶이 멸치 똥만큼 작아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바다의 심장과 연결된 시간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마지막에 “한 마리 작은 물고기를 꿈꾼다”는 대목은 노동을 넘어선 환상적 상상으로 이어진다. 현실적 촉각과 환상적 꿈이 교차하는 이 결말은, 노동조차 시간의 매개 속에서 신비로운 성찰로 변모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번에 읽은 2부의 시는 서로 다른 대상을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사소한 일상이 시간 속에서 환상과 신비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우와의 조우는 현실 속 환영의 경험으로, 멸치 손질은 노동에서 의례로 변환되는 경험으로 드러난다. 두 시에서 시간은 현실을 환상으로, 일상을 의례로 바꾸는 힘이다. 따라서 2부의 시들은 일상적 현실을 존엄한 증언으로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집 전체의 주제의식인 시간 앞의 경건한 태도를 또 다른 층위에서 드러낸다. 2부는 이렇게 일상의 순간을 환상과 신비로 확장하며, 현실과 허상이 서로를 드나들게 한다. 여우와 멸치라는 구체적 장면이 결국 시간의 매개를 통해 환영과 성찰로 변환되고, 일상의 사소함이 존엄한 기록으로 남는 순간, 시인은 시간 앞에서 다시 한번 겸허히 서게 된다.
4.
3부는 낯선 공간과 풍경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탐구한다. 시인은 이국적 장면과 장대한 바다의 풍광을 그리면서, 타자의 세계 속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원초적 힘과 숭고한 한계를 드러낸다. 이 장에서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낯섦과 친숙함,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접점으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육체와 자연, 리듬과 시간은 하나의 무대로 결합한다.
야자나무 아래
남자가 춤을 춘다
태양의 배꼽을 사알짝 들어
뱅글뱅글 백스탭으로
원을 그리며 클라이맥스에
꼭짓점을 엄지발가락에 고정시키고
구릿빛 근육으로
완급을 조절하며
태평양 푸른 파도를 타듯,
날것의 무대는 완벽하다
- 「타우랑가-남자1」 전문
「타우랑가-남자1」은 신체의 원초적 움직임을 통해 세계와 시간을 연결한다. 시의 중심 도상은 원이다. “백스탭으로/ 원을 그리며”라는 구절은 춤의 동작을 반복과 회귀의 상징으로 전환한다. 원은 단절 없이 이어지는 궤적이며, “엄지 발가락에 고정”된 꼭짓점은 원의 정점과 인간 신체의 중심을 포개 놓는다. 이 순간 춤은 공간적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순환을 몸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이어지는 “태양의 배꼽”이라는 이미지가 하늘의 중심을 끌어내리고, “태평양 푸른 파도”라는 거대한 리듬과 연결되면서, 춤의 리듬은 우주적 리듬과 합일한다. 춤추는 남자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매개자다. 그의 육체는 “완급을 조절”하는 박자로 세계의 흐름을 체현하며, 원운동의 회귀성과 파도의 주기성을 겹치게 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자연의 파동이 만나 하나의 제의적 시간을 만들어내는 사건으로 읽힌다.
울렁이는 바다
그을린 근육질이
질긴 노끈처럼
파도의 벽을 갈긴다
흔들대는 보트가 한 몸이다
물색 좋은 바다에
빛 튀김이 베일처럼 내려와
아른거리는 먼 바다로 떠내려간 남자가
끄스름으로 벗겨진 남은 태양을 안고
돌아오는 시간
바다는 고요한 어둠이다
- 「남국의 바다」 전문
「남국의 바다」는 장대한 바다의 숭고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시험받는 장면을 그린다. 시는 “그을린 근육질”이라는 힘의 형상으로 시작한다. 남자의 몸은 “질긴 노끈처럼/ 파도의 벽을 갈”기며 거대한 힘과 맞서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곧 “흔들대는 보트가 한 몸”이라는 진술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도구의 결합조차 바다의 거센 진동에 휘둘린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어지는 “빛 튀김이 베일처럼 내려와”라는 표현은 숭고의 장막을 드리우며, 인간은 “아른거리는 먼 바다로 떠내려간다.” 이는 의지적 항해가 아니라, 경계가 해체되어 바다의 심연으로 흡수되는 체험이다. “끄스름으로 벗겨진 남은 태양”은 소멸 직전의 잔광을 상징하며, 인간의 힘은 빛의 마지막 흔적으로 환원된다. 결국 “돌아오는 시간”은 승리의 귀환이 아니라, “바다는 고요한 어둠이다”라는 결말 속에서 숭고 앞에 귀속되는 경험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의 힘은 숭고의 차원에 삼켜지고, 남는 것은 고요와 어둠이라는 시간의 침잠이다.
3부에서는 낯선 세계 속에서 인간이 시간을 체험하는 방식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지만, 공통적으로 낯선 풍경이 신체와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열어 준다는 점을 드러낸다. 「타우랑가-남자1」에서 춤의 원운동은 신체가 우주적 리듬과 합일하는 체험으로 나타나고, 「남국의 바다」에서는 육체적 힘이 바다의 숭고 앞에서 해체되는 체험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신체의 원운동과 파도의 주기가 공명하는 순간, 후자는 힘과 숭고의 충돌이 어둠으로 귀결되는 순간을 기록한다. 결국 두 시 모두 시간의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즉, 모두 신체의 경험을 통해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는 반복과 리듬의 박자를 통해, 다른 하나는 소멸과 귀속의 침잠을 통해 시간을 살아낸다. 춤은 순환과 반복의 시간으로, 바다는 소멸과 침잠의 시간으로 제시된다. 시인은 이를 설명이 아닌 이미지와 질감의 언어로 기록하며, 낯선 풍경을 시간 인식의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장으로 세운다.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 3부는 이처럼 타자적 세계의 인간이 시간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탐문한다.
5.
4부는 기억과 추억을 통해 인간 존재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시인은 사라진 시절과 인물을 호명하며, 그것을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이어지는 힘으로 소환한다. 이 장에서 시간은 단순히 흐른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여 미래를 구성하는 토대가 된다. 시간은 과거의 풍경을 단순히 되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재와 이어져 삶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네를 타거나
모래 장난을 하며 놉니다
네 살 오빠가 두 살 동생 손을 잡고
형아들을 따라
삼학도로 도마뱀 잡으러 갔다네요
작은 발로 얼마나 멀리 갔는지요
저물녘에야 새까맣게 돌아왔죠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형아들이 도마뱀 잡으러” 할 뿐
설명할 줄 모릅니다
동생 손은 놓지 않고 데리고 온 기특함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녀석은 종종 네 살 아이가 됩니다
무릎을 베개 삼아 귀를 만져 주면
순한 양이 되어 눈 코 입이 조각처럼 빛이 났죠
어릿광을 피우고 싶은 거죠
가끔은 별이 되어서
형아들 틈에 끼어 모래 언덕을 오르고
그네를 타면서 해 저물 때까지
도마뱀을 쫓아다닙니다
놀이터가 너무 작아 보입니다
녀석의 놀이터는 점점 자라서
높이높이 올라갔거든요
- 「놀이터」 전문
「놀이터」는 어린 시절의 형제애와 순수한 놀이를 회고하며, 공동체적 삶의 의미를 일깨운다. 시의 첫머리에서 아이는 “형아들을 따라” 먼 곳까지 모험을 떠난다. 아이는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했지만, “동생 손은 놓지 않고 데리고 온 기특함”을 통해 공동체적 책임감을 보여준다. 놀이의 순간이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의례적 체험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이는 “무릎을 베개 삼아 귀를 만져 주면/ 순한 양이 되어” 빛나는 얼굴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순수한 어린 생명의 내적 빛을 묘사하면서, 인간 존재의 존엄이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후반부에서 아이는 “가끔은 별이 되어서” 하늘의 존재로 겹쳐지고, 놀이가 환상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놀이터는 현실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상상의 무대로 변하며, 그 안에서 시간은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회상을 교차시킨다. 결말에서 “놀이터가 너무 작아 보인다”는 구절은 아이의 성장과 함께 추억의 공간이 협소해졌음을 드러내지만, 그 협소함은 곧 과거의 놀이가 미래로 확장되었음을 역설한다. 이 시는 결국 놀이를 통해 배운 공동체적 삶과 순수한 기억이 현재를 살아가는 힘으로 남음을 증언한다.
미군을 따라 태평양 건너갔다는데
감나무 아래 풋감 하나 베어 물고
고약한 놈의 인기척에 목구멍이
뻑뻑하게 매어오던 눈물범벅인
가난하고 비루했던 명자언니
가난이 죄가 되어
명자꽃 피기도 전에
서울로 갔다는데
다시 볼 수 없었으니
낯설고 무서운 코쟁이 하나 믿고
떠난 후론 명자꽃이 몇십 번
피고 졌는지 몰라
이제는 하얀 명자꽃이 머리에
함박만하게 피었을 텐데
초복이면 색색으로 피어나는
명자꽃을 보면 메주 같은 언니가 생각난다
- 「명자꽃」 전문
「명자꽃」은 가난과 이주, 여성의 삶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는 서사적 시편이다. 화자는 “가난이 죄가 되어/ 명자꽃 피기도 전에” 타지로 떠난 명자 언니를 회고한다. 명자꽃의 개화 시기가 삶의 성숙과 겹쳐지면서, 피지 못한 청춘과 단절된 생애의 상처가 드러난다. “코쟁이 하나 믿고 떠난 후”라는 구절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여성의 삶이 놓였던 불안정한 조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회고는 단순한 한 인물의 상실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으로 자리한다. 명자꽃이 “몇십 번 피고 졌”다는 진술은 시간의 반복을 드러내며, 그 반복 속에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된다. “이제는 하얀 명자꽃이 머리에 / 함박만하게 피었을 텐데”라는 구절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상실의 지속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삶의 존엄을 애도하는 행위가 된다. 마지막에 “메주 같은 언니”를 떠올리는 장면은 고단했던 과거를 인정하면서도, 그 존재를 따뜻한 애정으로 불러내는 시적 제스처다. 이 작품은 기억을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세대의 상처와 여성적 삶의 존엄을 증언하는 기록으로 전환한다.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4부는 형제의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기억이나 이주의 상처와 같은 전혀 다른 내용의 기억들을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기억이 현재와 이어지는 힘을 보여준다.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그것이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지탱하고 미래를 여는 힘임을 드러낸다. 「놀이터」에서는 어린 시절 놀이와 형제애가 인간의 순수한 관계성과 공동체적 삶의 토대를 증언하고, 「명자꽃」에서는 가난과 이주의 서사를 기억함으로써 세대와 공동체의 상처를 현재로 불러낸다. 시인은 기억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묻고, 그것을 경건히 기록한다. 그 결과 4부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을 매개로 시간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장으로 자리한다. 과거를 회상하는 동시에, 그 회상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지탱하는 힘임을 보여주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시집 전체의 주제의식, 곧 시간을 경건히 응시하고 증언하는 태도와 맞닿는다.
6.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는 네 개의 장을 통해 자연, 일상, 낯선 풍경, 그리고 기억을 차례로 탐구한다. 1부에서 시인은 작은 생명과 자연의 심연을 증언자로 세우며 생명의 경이와 고독을 기록하는데, 그럼으로써 자연의 생명과 감각을 경건히 응시하며, 작은 존재와 심연의 세계를 존엄한 증언으로 불러낸다. 2부에서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 속에서 환상과 신비를 발견하며, 현실과 허상이 시간을 매개로 서로를 드나들게 한다. 앞에서 다룬 두 편의 시에서는 이를 여우의 환영과 멸치의 내장을 통해 일상과 환상이 연결되고, 현실의 사소한 풍경조차 시간 속에서 신비를 품게 되는 과정을 관찰하는 형태로 드러냈다. 3부에서는 낮선 문화와 풍경, 이를테면 이국의 춤과 남국의 바다를 통해 낯선 세계와 인간 존재의 관계가 드러난다. 시간은 타자적 세계와 인간을 이어 주는 매개가 되어, 존재의 나약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인식하게 한다. 4부에서는 놀이터의 기억과 명자꽃의 서사를 호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추억과 기억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과거를 현재와 연결하는데, 개인과 공동체의 과거가 다시 소환됨으로써 기억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구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렇듯 각 장은 생명, 일상, 타자적 세계, 기억이라는 층위를 통해 시간을 다르게 체험하고 사유하게 한다. 시간은 생명의 질서를 드러내고, 일상에 신비를 부여하며, 낯선 세계와의 관계를 열어 주고, 기억을 통해 공동체를 이어 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집 전체가 드러내는 주제는 분명해진다. 자연의 생명은 시간을 품고 생의 존엄을 증언하며, 일상의 풍경은 시간을 통해 환상과 신비로 변모한다. 낯선 풍경 속에서 시간은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기억은 시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이처럼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는 자연과 인간, 실제와 허상을 모두 시간이라는 축으로 엮어낸다. 따라서 시인은 시간 앞에서 함부로 단정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경청하고 증언하며, 경건한 태도로 서 있게 된다. 결국 이 시집은 시간에 대한 공손한 응시를 통해 존재와 세계를 다시 사유하도록 이끄는 하나의 기록이자 길잡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시집의 의의는, 시인이 개별적 체험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세계·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시간의 총체적 의미를 탐구했다는 점이다. 시 속에서 직박구리와 목련, 멸치 똥이나 여우, 남국의 바다와 명자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시간을 매개로 인간과 세계가 서로의 존재를 증언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곧 시적 상상력이 시간과 존재의 경계에서 발휘되는 방식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시간의 새로운 감각을 체득하게 한다.
따라서 『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는 개별적인 서정시집을 넘어, 시간의 윤리와 미학을 동시에 사유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작은 생명의 기록에서부터 이국의 장대한 풍광, 공동체적 기억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며, 그 모든 순간을 경건한 증언으로 길어 올린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빠른 속도로 소모되는 시간 감각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자, 우리가 다시금 존재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환기하는 힘을 가진다. 결국 이 시집은 시간과 존재를 잇는 시적 사유의 귀중한 증언록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직박구리
목련이 터지고
직박구리 한 쌍
새하얀 침구에
신방 차렸다
햇볕도 눈부시게
그들을 비추고
하얀 드레스 입은
신부처럼 단아한 모습
발길 멈추고 예식을 본다
봄바람에 축가가 흐르고
셔터 터지는 소리
부케 한 다발 날아간다
봄
죽은 듯 숨을 멈추고
땅속으로 손발 감춰
작은 온기까지 끌어모아
꽃눈 틔워 낸
경이로운 봄이다
개나리 노란 눈물처럼
그렁그렁하더니
시샘하던 바람에 주춤,
입 꾹 다물고
침만 꿀꺽 삼킨다
며칠 사이 가지마다
노랗게 터지는
웃음 참을 수가 없어
밀어내고 끌어내도
어쩔 수 없는 탄성
사월
봄은 느리게 왔다
목련이 촛불 올리고 있을 때
한파가 지나가고
벚꽃이 멍울 부풀릴 때
세찬 바람이 불어와
두터운 패딩을 다시 껴입었다
며칠 온화해져
전국에 벚꽃이 피기 시작해
화사해지나 싶을 때 종일 비가 내려
하나둘 떨어지는
“꽃잎 아까워 어짜쓰까”
마음졸인다
목련이 지고 개나리 노란빛 드문드문
새싹이 두드러지는데
햇살 가득 벚꽃 길 열린 완연한 봄이다
아이들은 꽃 속으로 달려 나가고
꽃길 사이로 빨간 버스도
울렁거리며 통통 지나가고
화사한 봄날을 마냥 붙들 수 없어
철없는 아이처럼
마냥 쿵쾅거리는 꽃밭 사이로
발걸음 옮기고 이 꽃 지고 나면
꼬박 일 년, 어찌 기다릴꼬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영숙
•2011년 《시와사람》으로 재등단•시집 『아찔한 길』『이제 숲은 점등을 시작한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직박구리
직박구리
봄
사월
거미
숲길에 앉아서
목련
생존전략
까치
소리
도라지꽃
구슬나무
심해
알비노
백로
동백
행복이의 여행
호접란
제2부 여우를 보았다
여우를 보았다
민들레 꽃씨
가을볕 따끔따끔 살갗을 쏘는데
봄비
본양에서
은 고사리 언덕
분꽃
더덕을 캐다가
4월에
방죽
가을 풍경
꽃비
숨
맹그로브
알맞게 천천히
멸치 똥을 따면서
스페이스 푸프 챌린지
제3부 타우랑가
타우랑가
타우랑가
타우랑가
타우랑가
남국의 바다
정글
바람 불어 좋은 날
결혼 했어요
아스가르디아ASGARDIA
폭우
장마철
소낙비는 내리고
갯바람
신시도
흰 섬
함평역에서
잠의 비명
영산역
생선 가게
밤의 분자들
바람 부는 날
제4부 놀이터
놀이터
토끼
장미와 소년
택시는 날아간다
아이는 꿈을 꾼다
토요일 오후
접영蝶泳
10월에
명자꽃
대기점도 홀아비
남자는 사랑이다
노인
고요가 찾아올 때
보름달·1
보름달·2
포도밭
눈 오는 날
| 작품론 |
경건한 응시와 시간의 기록일지 / 강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