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출판 담당 기자의 첫 독서 에세이
“세상엔 좋은 책이 너무 많다.”독서가 곧 밥벌이였던 사람이 있다. 20년 가까이 이어온 기자 생활 가운데, 문화부에서 출판 분야를 담당한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꼽는 박지훈이 “책에 포위됐던, 때론 포박당했던” 시절을 더듬어 회상하는 독서 에세이 《책에서 시작한 불은 책으로 꺼야 한다》를 선보인다. 숱한 문장들을 눈과 마음에 이고 지고 살아온 저자가 이제껏 마주한 책 세계를 한 권에 담았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일간지 출판 담당 기자의 일상을 생생히 보여주고, 사물사물 눈에 밟히는 문장들도 함께 전한다. 신문기자로서 박지훈의 눈은 매섭고도 살뜰하게 세상 구석구석을 향하는데, 그때마다 그의 “마음을 휘감았던” 책 속 문장들이 경이로운 힘을 발휘한다. 책을 읽는 우리 또한 그 힘에 이끌려, 발 디딘 땅에서 한 뼘 벗어나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더 큰 세계’를 꿈꾸게 된다. 
시종일관 찬찬하면서도 뚝심 있게 아름다운 그의 글은 여러 대목에서 독자를 멈추어 서게 한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아니한 온기와 객쩍음과 다정한 믿음을 건넨다. 그리하여 책 속 문장은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종내 독자의 일상과 연결된다. 가까워지고, 커다래지고, 어떤 마음을 주고받는다. “책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손에 들 책이 출간되었다. 일렁이는 세상 속에서 붙잡아온 아른거리는 문장들이 독자들을 찾는다. 
출판 기자로 일한 경험이 내게 어떤 유산을 남겼노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내게도 지성이라는 게 있다면 거기에 엷은 무늬를 새겼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확실한 게 있다면 그 시절을 통과하면서 내가 책을 더 사랑하게 됐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고나 할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새삼 깨닫는 게 있다. 세상엔 좋은 책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야릇한 조바심을 느끼곤 한다. A라는 책을 읽으면서 B라는 책이 보고 싶어 마음이 바빠지고, 어느 순간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C라는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식으로. 아무튼 나는 내 이런 습관이 참 마음에 든다. _21쪽
‘직업’에서 ‘삶의 방식’으로,
눈도 마음도 동하게 하는 단 한 권을 찾아서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던 시절, 저자의 일상을 복기하자면 이렇다. 한 주에 문화부 사무실 책상에 쏟아지던 신간은 200권 안팎이었다. 그는 이를 “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가다가 받아먹었다는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15쪽)에 비유한다. 신간이 가득 담겨 불룩해진 에코백을 들고 집으로 향하던 퇴근길에는 묘한 포만감을 느꼈지만, 머지않아 깊은 숙고의 시간에 잠긴다. 총 2개 면에 ‘금주의 책’으로 비중 있게 소개할 수 있는 책은 많아야 서너 권에 불과했던 까닭이다. 저자는 “시의성과 깊이, 저자의 이름값과 출판 시장에서 가지는 의미 등을 두루 살펴 ‘결선’에 오를 책을 선별”했다. 그러고 나면 주마간산 수준으로 책들을 훑어본 뒤, ‘최종작’을 선정해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으로 기운 독서 취향을 가졌던 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처음에는 그저 ‘직업’이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열독만이 내가 지켜야 할 직업윤리였다”(16쪽)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고백이 뒤를 잇는다. 《랩 걸》의 호프 자런이 “우주의 비밀을 움켜쥐고 푸른 새벽을 맞았을 때 느낀 감흥”은 영영 마주하지 못할지언정, 그의 마음을 호리고 또 홀리는 책과 만나는 순간이 무시로 찾아왔고 그때마다 일의 기쁨이 배가되었다. 물론 세상 모든 직업인이 그러하듯, 고뇌와 좌절 또한 툭하면 문을 두드렸다. 그는 “솔직히 말해 요즘 세상에 일간지 서평 코너를 찾아 읽는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17쪽)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책과 만났을 때 용솟음치는 환희가 훨씬 더 컸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매주 쏟아지는 온갖 장르의 신간을 아주 빨리, 출판사들이 동봉한 살뜰한 보도자료와 함께, 심지어 공짜로 받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사무실에 쌓이는 신간들을 통해 나는 매번 저자들이 벌인 고군분투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크고 작은 흠집이 있더라도, 그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모든 책엔 하나같이 저자의 노고와 진심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자맥질하다가 최후에 터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같았다. _66쪽
책에서 시작된 불을
책으로 끄며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독자보다 먼저 원고를 읽고 추천사를 쓴 《공부의 위로》의 저자 곽아람의 말마따나, 이 책은 “교양서 독자들에겐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만족감을, 문학 독자들에겐 서사와 문장을 즐기는 기쁨을” 안긴다. 직장인으로서 품은 고민은 〈그래봤자 일, 그래도 일〉〈동그라미 공동체를 향해서〉 등에서 풀어냈고, 언론인으로서의 경험은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하여 말라지 말라〉〈호모 사피엔스의 거울엔 항상 전쟁의 얼굴이〉 등에 여과 없이 녹여냈다. 부모가 되어 비로소 알게 된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관해서는 〈고양이가 되지 못해 미안해〉〈나를 키운 엄마의 밥상, 세상의 음식〉 등에서 논한다. 총 34개의 꼭지에서 문학부터 사회과학, 경제경영, 철학, 역사,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알록달록 다채로운 책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적재적소에 따라붙는 ‘꼬리 잇는 책’들이다. 저자는 한 꼭지 안에서 한 권의 주제 책을 선정해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한때 다독을 넘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남독의 수준까지 간 적이 있다”(335쪽)는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절묘하게 꼬리를 잇는다. 마치 “네가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면, 이 책 또한 마음에 꼭 들 것이다” 말하며 제목도 저자도 몰랐던, 그러나 이상하게 낯설거나 성기지 않은 책을 가슴팍에 폭 안겨주는 것만 같다.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충실한 안내자를 따라가며 독자들의 책장과 장바구니는 한층 풍성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이 책은 매주 수백 권의 책을 마주하던 출판 담당 기자의 첫 에세이인 동시에, 책과 삶이 서로를 비추며 남긴 독서 기록이자, 세상 모든 책을 향한 가슴 절절한 연가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에서 건져 올린 위로와 뜨끈한 사유의 불씨를 독자와 나누며 책을 둘러싼 다양한 질문을 건넨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만난 경험이 있으리라. 저자는 바로 이 타오르고 사라져도 다시 시작되는 독서의 이야기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 그런 작품을 만난다면 그다음 이어질 일은 뻔하다. 대형 산불이 나면 불로 불을 끄는 맞불의 방화선(防火線)을 구축해야 하는 것처럼 책에서 시작한 불은 책으로 꺼야 한다. _336쪽

출판 담당 기자로 일한 시기는 2017년 1월부터 2020년 6월까지였다. 출판 기자는 매주 나오는 신간 가운데 ‘금주의 책’이겠거니 싶은 작품들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는데, 처음 몇 달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다.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그 내용을 요약하는 일은 버겁기만 했고, 여기에 뾰족한 논평을 보태는 일은 언감생심일 때가 많았다. 그 시절 내가 쓴 서평을 찾아 읽는다면 문장 곳곳에 묻어나는 진한 구상유취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일같이 능력치의 바닥이 어디인지 확인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때의 일은 내게 엄청난 즐거움을 주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장 생활의 열반, 그 자체를 경험했다고나 할까. 독서가 곧 밥벌이가 된 희귀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 주는 만족감도 컸다.
대학에 진학해 마음 둘 곳이 없던 내가 밤낮으로 머문 곳은 학교의 도서관이었다. 제대로 된 도서관 하나 없던 지방에서 상경한 내게 그곳은 광활한 별천지였다. 제 몸의 상처를 할짝할짝 핥는 짐승처럼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서 야금야금 책을 읽었다. 제페토 할아버지를 찾아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간 피노키오의 심정으로 책의 동굴 속을 헤매면서 내게 간절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시절 도서관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나만의 요새였다. 미국 <뉴요커> 전속 작가 수전 올리언의 논픽션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에 적힌 다음과 같은 대목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