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발문 중에서
이루어지는 건 사랑이다
―시집 『거꾸로 매달린 날』
증재록(한국문인협회홍보위원)
1. 아리땁게 나가는 길
동심으로 돌아간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돌려보고 가랑이 사이로 뒤를 바라보며 온갖 사물을 태생의 순수한 모습으로 새겨 본다. 거꾸로 서고 거꾸로 매달려 거꾸로 보는 사물은 거꾸로에서 바로 선다.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것마다 새로운 날을 세워 예리하게 헤치고 있는 시인은 분주하다.
이선희 시인, 정든 길 아리땁게 나가는 길, 아름지고 아람 벌어 아름다운 생각으로 땅과 하늘과 물 사이를 휘저으라는 ‘아리’를 필명으로 쓴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건 모두 사랑이라는 걸 안다. 달콤한 듯하지만 그 속은 쓰디쓴 게 사랑의 약이고 먹어야 하는 밥이다. 그득하지만 가마득한 거기에서 한숨의 목숨 줄기가 푸른 물결처럼 솟아나는 날의 낟알을 빻고 씻고 찌고 만난다. 오늘의 원초적 기준을 세워주는 바라보기가 약이 되어 한숨 깊이 뿌리를 찾아 아침을 맞고 한나절을 보내 저녁을 그린다. 사방에서 팔방으로 이어 십 육방에서 원으로 방향 따라 시선을 그으며 풍월은 읊는 여유, 사물에서 깊은 뜻을 새기는 아리 이선희 시인, 시간에 시달려 매듭 있는 생활의 차안(此岸)에서 앞으로 다가서는 사연의 고개를 오르며 내다보는 길목의 피안(彼岸)을 깊숙 깨치는 데는 약을 담뿍 담은 약 초항아리를 어려서부터 품어왔던 마음이 알차서다.
잠이 깨는 시각이면 숨결 쓰다듬는다. 한 번도 기침을 끓여 올리지 않은 목에 손을 모아 머리 숙이고, 심중에서 피어나는 시의 꽃을 함빡 피운다.
2. 숨길의 현장을 본다
시인의 발길은 디디는 자리마다 숨길의 현장이다. 아픔과 슬픔을 마주치면서도 당당하다. 삶의 길은 굽이굽이 돌아도 눈길은 올바르다. 목 한번 숙이지 않고 살아온 날 그 깊이를 어떻게 잴 수 있을까만, 비가 촉촉 물방울 맺는 날, 불에 탄 듯한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속을 부드럽게 흘려 다듬으며 아리아리 아리수의 첫머리를 쏟는다. 아리아리 영원한 깨달음이라며 흘러가세! 낮은 곳으로 그게 순리라고, 만남과 이별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심리적 고백을 한다.
추는 쉼 없이 바삐 가라고 재촉하지만
초침은 듣기나 하였는지
제자리 맴돌 듯 똑딱똑딱 허공을 찌르며
귓구멍 속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해가 오르면 갈 곳과 해야 할 일이
발길을 기다리는데
얽히고설킨 생각은
밖으로 나가지 못해 우왕좌왕
머뭇거리는 사이
해는 벌써 저만치 달아난 석양이다
―「느리게 가는 시계」 전문
바쁘다. 그만큼 일이 많고 그만큼 분주하고 해돋이와 해넘이를 바라볼 겨를이 없다. 시침은 여전히 똑같은 간격으로 하루를 셈본 한다. 하루가 얽혀 보고픔도 기다림으로 들어가 깜빡한다. 열렬과 열정이 한줄기에서 피우려는 꽃, 소용돌이 속에서도 올바른 길이 솟아오를 거라는 믿음,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며 지금 기쁨이 순간을 잡고 이어간다. 솟아오르는 힘의 동력은 희망이다. 초침은 여전히 제자리 돌기지만, 그 힘은 세상을 바꾸며 석양으로 내일을 예고한다.
*거꾸로 매달린 날
뜨거운 듯 찬물이 솟구치는 그곳
사랑이 무엇인지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주인 없는 숟가락을 들고 한 식구로 살아온 날
낮은 울타리 안에서 시루떡 콩떡을 찌고 갈라
온 동네 휘젓고 다닌 그 시절의 손이
쪼글쪼글 주름을 챙겨 세월을 불러세운다
해가 뜨고 달이 지면서 왁자지껄해진 나날
귀는 먹먹해지고 손은 굽어져 주춤해지는 사이
밤낮없는 하루에 흔들려
하나둘씩 낯설게 떠난다
반짝반짝하던 눈동자는 안경에 가려져 더듬거리고
입은 그때의 기억에서 터져 오르는
말문을 닫을 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게 돌아가는 초침은
어느새 그때 엄마보다도 더 세월을 보내고
그 향기를 헤집으며 뒤로 달린다
어느새 벌써 그런 게 아닌데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엄마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
*그리고 남은 자
이른 아침 귀를 찌르는 사이렌 소리에
설거지하던 손은 옥상 계단을 붙잡고
발걸음은 지난 시간 속으로 달린다
무거운 등짐이 버거워
아부지 부르짖을 때
꽉 잡은 짐을 풀어주던 따스한 손
지금 그 손에는 별이 담겨있다
단단히 동여맨 핏줄이라는 끈
항상 곁에 있을 거 같았는데
하나 둘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가을비와 텅 빈 눈물 창고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선희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짓시창작교실에서 시를 학습하고 한국작가를 통해 등단, 제1집 『poem & photo』(시사집)을 펴냈으며, 짓거리시문학회 짓거리시세상과 한국문인협회원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금왕읍 응천 둘레길과 고속도 평택 제천 간 금왕휴게소에 시화비, 백야호반에 시화판이 있다. 2025년 충북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 공모전에 시가 당선되어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목차
5 시인의 말
1아리 발길을 기다린다
12 거꾸로 매달린 날
14 느리게 가는 시계
15 그리움을 그리다
16 가야 할 길
17 그리고 남은 자
18 그래도 한 길
19 더미 시대
20 신호등
21 잠이 든 말
22 발은 내일을 간다
23 허허한 날
24 길을 연다
25 때는 때를 깨운다
26 안갯속 첫차
27 집으로 가는 길
28 거울
29 둥지
30 사랑은 눈물이다
2아리 오늘을 만드는 행복
32 삼월이 오는 길
33 꽃길은 혼란스럽다
34 벚꽃이 부른 오늘
35 벚꽃님 가실 때
36 벚꽃 지는 날
37 물에 뜬 꽃별
38 비를 부르는 날
39 망초꽃
40 새벽이슬
41 풍선 같은 날
42 가을 산
43 밤나무
44 가을 소식
45 가을 침입자
46 호숫가 저녁노을
47 겨울 갈대
48 겨울 나비
49 눈길
3아리 어디쯤 계실까
52 어디쯤 계실까
53 굼벵이 앞에서
54 커피 타임
55 뜨거운 밤
56 부러진 삽
57 엽전 꾸러미
58 눈치 바람
59 미나리
60 오월은 아버지의 눈을 가린다
61 할머니의 길
62 장마에 핀 꿀빵
63 노을 여행
64 한가위 풍경
65 어떤 밥상
66 할머니 뜰
67 약 초항아리
68 멈춰진 날
70 백야리의 아침
4아리 봄이 부른다
72 봄이 부른다
73 끽차(喫茶)
74 어머니 빨래터
76 싱그러운 무지개
77 발가락
78 가을 라일락
79 불청객
80 삼월이
81 헌 집 주고 새집 받다
82 빈 깡통
83 지푸라기의 힘
84 어머니 가시던 날
86 어머니의 봄나물
87 낯선 설
88 빈방
89 군화 소리를 기다리며
5아리 색을 칠한다
96 충천 중
97 반갑지 않은 손님
98 삶의 중심
99 상처
100 밤새
101 설 풍경
102 구정
104 도둑처럼 온 눈
106 어머니의 약손
108 12월
109 홀로서기
110 동행
111 잃어버린 시간
112 사랑 짓던 날
114 아오리와 산까치
116 핸드폰 속으로
118 용서
발문跋文_증재록(한국문인협회홍보위원)
120 _이루어지는 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