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열두 살인데도, 나는 밤이 두려웠다. 거대한 괴물처럼 다가오는 어둠이 무서웠다. 밤 열두 시 괘종시계가 울리면 온몸에 피칠을 한 사내가 왔다.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자신은 억울하게 죽었다고 내 목을 졸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공포에 질려 안방으로 건너가서 엄마 옆에 누워도 귀신은 쫓아왔다. 그냥 가위에 눌리는 거라며 엄마는 귀찮은 듯 말했지만 내 눈에는 사내가 보였다. 다음 날 밤, 사내는 새벽 한 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내 귀에 무슨 소리를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는 내 목을 졸랐다. 밤이면 밤마다 피 칠갑한 남자에게 시달리고 나면 나는 오줌을 지리곤 했다. 지독한 밤이었다. 일부러 잠이 깨어 있는 날은 그가 오질 않았다. 사내는 유리창 밖에서 어른거리다 가버렸다. 그러면 은하수가 흐르는 꿈을 꾸었다. 사내가 온 날 아침이면 나는 늦잠을 자서 엄마에게 혼이 났다.
그날 내가 거적때기를 들추고 본 것은 기차에 치여 목과 다리가 잘린 사람이었다. 눈을 까뒤집고 죽은 사람의 머리가 몸통 옆에 피범벅이 되어 구르고 있었다. 몸통은 엎어져 있고 두 손은 전깃줄에 묶여있었다. 팅팅 부은 얼굴 옆과 가랑이 사이에 발목 위에서 잘린 양발이 ㄱ ㄴ 모양으로 버려져 있었다. 나는 목이 잘린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부어오른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누구더라, 잠깐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에도 피비린내가 났다. 가마니를 들춰보라고 내 옆구리를 찌른 계집애는 갑자기 미친 듯이 울었다.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기찻길 옆 시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산동네 개와 새들이 놀라서 달아났다.
인물과 작가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특히 작품이 작가가 처한 현실과 일견 닮아있을 때 작가의 삶은 참조되기 마련이다. 이런 인식은 지젤 사피로의 말마따나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언급할 때 응당 그의 작품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작품과 작가 사이를 환유로 묶는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은 실존 인물에 대한 조명, 작가의 경험에서 배태된 작품 그리고 온전한 허구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곧장 무색해지고 마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기원했든 작가가 욕망하는 상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지향의 끝점에 서 있는 인물의 형상 파악, 그것이 박인 소설의 중핵을 가려내는 일이 될 것이다.
―황유지(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인
소설가, 시인, 화가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영국 웨스트민스터대 족부의학 전공 졸업전북대 대학원 헬스케어공학과 졸업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누님과 함께 알바를』 『사랑의 기원』장편소설 『포수 김우종-부북기』시집 『외사랑』
목차
작가의 말 3
영(靈)을 만나서 6
소리의 아버지 32
다시, 봄 62
녹주 94
판라꾸 132
김산을 따라서 전진 168
수안 176
구두 한 켤레 194
후추나무 202
해설_황유지(문학평론가) 211
이토록 보드라운 복수, 그 위무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