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1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김샴 시인의 첫 시집 『샴을 위한 변명』이 가히 시선 17권으로 출간되었다. 김샴 시인은 샴쌍둥이로 태어났고, 그 운명을 받아들여 ‘샴’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샴의 첫 시집에 등장하는 디지털 문화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현대 자아를 구성하는 서사 장치로 작동한다.
그의 다중적이고 불안정한 자아는 푸코가 말한, 주체가 담론과 권력, 사회적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변화하는 존재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김샴의 시는 이해보다 경험에 가까우며, 전통 서정의 정서적 응결과 이미지 일관성은 의도적으로 해체된다. 다다이즘적 병치와 만화적 상상은 불안을 피하지 않고 형식화하려는 김샴 시인의 전략으로 보인다. 이는 의미를 넘어 감각의 잔여물을 언어화하는 작업이다.
출판사 리뷰
[해설 엿보기]
김샴 시인의 시는 정체되고 지연된 현실에 대한 감각적 응답으로 시작된다. 온전한 기능을 잃은 도구들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가득한 이 세계는 단순한 부정이나 패배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은 새로운 감각의 출발점이며, 켜짐과 꺼짐, 접속과 단절 사이 ‘스위치’처럼 시적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장이다. 시인은 기술과 매체가 만든 분열된 자아를 포착한다. 메타버스, 버튜버, 게임, 아이돌 문화 등 디지털 현실 속에서 유동적으로 전환되는 주체는 미셸 푸코가 말한 ‘담론 속에서 생산되는 주체’와 맞닿아, 고정된 본질 없이 다양한 서사를 통해 ‘변형’의 과정을 반복한다. 언어는 더 이상 안정적인 의미 전달의 도구가 아니다. 의미보다 감각이 앞서고, 논리보다 충돌이 우선한다. 김샴의 시는 해석보다 ‘경험’을 중심에 둔다. 산문적·만화적 표현과 다다이즘적 병치, 인터넷 언어의 유희가 혼재한 시편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을 감각적으로 기록하며, 감각적 생존의 공간을 구축한다. 이는 냉소나 체념이 아니라, 고장 난 감정으로라도 살아내려는 태도다.
기계와 사람 사이 내 지문을 로그인해
어제의 꽃이 피고 또다시 빛이 오지
태양이 찾지 않는 방 컴퓨터가 일력일 뿐
나는 온라인에서 버그 같은 삶을 살아
이 방을 나가본 지 오래인 폐쇄 족속
의식주 그 모든 생존이 의자에서 기생하지
내가 사는 20인치 0의 귀와 1의 혀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는 새
벌레와 교접하는 사이 경고 경고 로그아웃
― 「로그인에서 로그아웃까지」 전문
시인은 ‘가상공간 속에서의 삶’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희미해진 현대의 고립된 일상을 묘사한다. “기계와 사람 사이 내 지문을 로그인”하는 행위는 정체성이 기계에 의해 인식되고 등록되는 장면이다. 지문은 인간을 식별하는 가장 개인적인 정보지만, 이 시에서는 단지 기계와의 접속 수단으로 전락한다. “어제의 꽃이 피고 또다시 빛이 오”는 일상의 반복이 무의미함을 드러낸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실내, 즉 창 없는 폐쇄 공간을 은유하는 “태양이 찾지 않는 방”에서 시간은 오직 시스템상의 날짜로 흐른다.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버그 같은 삶”이라 표현하며, 온라인 속에서도 비정상적이고 기능 오류 같은 상태임을 고백한다. “폐쇄 족속”이라는 표현은 자발적으로 고립된 존재로서 자신을 냉소적으로 지칭한다. “의식주 그 모든 생존이 의자에서 기생하”듯, 최소한의 생존조차 움직임 없이 앉은 자리에서 해결된다. 인간의 신체조건은 점차 사라지고, 전자적 존재로만 연명하는 삶이다.
주체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20인치’ 화면으로 한정한다. 그곳에는 “0의 귀와 1의 혀”만 존재하는데, 이는 디지털 언어인 0과 1, 즉 이진법의 세계를 뜻한다.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새’는 타인과 소통이 끊긴 감정만 남은 존재다. “벌레와 교접하는 사이 경고 경고 로그아웃”은 인간과 기계, 또는 타 존재 간 경계가 무너지고, 정체성 붕괴와 정신적 위기를 암시한다. ‘경고’와 ‘로그아웃’은 시스템 종료나 존재의 일시적 사라짐을 알리며, 온라인 속 탈락과 이탈의 불안한 상태를 드러낸다. 시인은 극도로 고립된 현대인의 초상을 디지털 장치와 공간을 통해 조형한다. 자발적 격리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적응한 삶 속에서, 주체는 점점 비인간화되고 있음을 안다. 기술문명 안에서 인간성이 희미해지고 존재 감각이 평면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시는 단순한 자조나 풍자에 그치지 않고 현실 본질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 이송희(시인)
칼날을 들이밀어 손톱을 깎는다
숨겨진 손톱 밑이 나체가 되는 순간
주먹이 되지 못한 소시지의 말랑함
배고픈 저녁에는 안개만 자욱하고
갈 길 잃은 젓가락은 허공에만 휘적휘적
한없이 멀어져 버린 식사 메뉴 찾는다
고장 난 전자레인지 버튼만을 교체하니
띵 소리 경쾌하게 찬밥을 데우는데
비 오는 저녁노을만 그 속에 남아 있다
― 「스위치①」 전문
가난함이 밀려드는 옥탑방에 앉아
쏟아진 장마를 막을 새도 없는 사이
엇나간 키보드 소리 빗방울이 되는데
오기로 먹으려던 라면 하나 버린 채로
파전 하나 배달하는 어리석은 방구석 갑부
습관이 중독과 고소, 그 사이에 자리 잡고
두 손을 벌벌 떨며 따로 노는 검은 혀는
당신을 묶어두는 막걸리만 들이켜는데
오늘도 한 마리 늑대가 물어뜯는 밤이다
― 「늑대인간」 전문
사람 많은 도심지대
싫어질 때 있는 법이야
푹신한 함박눈이 겨울을 알리는 날
컴퓨터 화면 속에서
나 홀로 크리스마스
티켓조차 필요 없는
무제한의 콘서트
메타버스 가로지른 새로운 행복 속에
불안은 차원을 넘어
날아가는 부속물
전기 망토 뒤집어쓴
복화인형 노래하고
눈밭에 쏙쏙 쌓인 달콤한 말 대신해서
기계음 응원 소리가
깊어지는 겨울밤
― 「이세계 아이돌」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샴
1993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201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에 시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샴을 위한 변명』이 있다.
목차
제1부
스위치①•13/한 그릇•14/장마의 노래•15/스위치②•16/늑대인간•17/이세계 아이돌•18/버튜버를 보다가•20/스위치③•21/공룡발자국공원•22/악질•23/이세계 잔혹동화•24/스위치④•26/UFO를 먹다가•27/코스프레•28
제2부
바둑 두는 남자•31/스위치⑤•32/당뇨를 먹은 여자•33/게이미피케이션•34/스위치⑥•35/게임몽•36/로그인에서 로그아웃까지•38/스위치⑦•39/모래시계•40/스위치⑧•41/송곳니의 밤•42/스탬프 투어•44/SKY ZOO•45/키오스크 강의실•46
제3부
출근길•49/스위치⑨•50/사랑니를 뽑다가•51/스위치⑩•52/당신이 앉아 있는 변기 속을 본 적 있나요•53/샴을 위한 변명•54/스위치⑪•56/바니걸•57/두더지게임•58/휴식이 필요해•59/난難 제 봤어요 멀미인가요?•60/시각을 저축하는 시간•62/스위치⑫•63/패배자는 상처가 깊다•64
제4부
스위치⑬•67/누군가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68/재고조사•69/스위치⑭•70/스트레스 검사•71/서점 견문록•72/스위치⑮•74/푸어 여행가•75/보수동 책방골목•76/스위치⑯•77/큐브•78/핑거프린스•80/지하 아이돌•81/당신이 튜브를 사 온 날•82
제5부
프로게이머•85/갤럭시 Z 플립•86/경계에 서서•87/스위치⑰•88/스위치⑱•89/데이터의 거인•90/탑돌이•91/쓰레기통에 대한 잡념•92/이중나선•93/스위치⑲•94/스위치⑳•95/먼저 간다는 것에 대하여•96/재떨이 같은 인생•97/윤회팝•98
해설 이송희(시인)•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