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김해에서 활동하는 정보암 시인이 서사시집 『오늘은 어제의 내일』을 통해 김원일·김원우 소설가의 부친과 교육선구자 강성갑 목사 등 현대사의 비극적 희생자를 소환한다. 월북과 보도연맹 검속이라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삶을 사실에 기반한 서사 형식으로 구성하며, 불과 수십 년 전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고난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본다.
시집은 1부 ‘아버지의 독백’, 2부 ‘딸의 혼잣말’, 3부 ‘부녀의 대화’로 나뉘어 식민지 수탈, 전쟁의 분단,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 세대 간의 소통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역사적 상처를 공감하는 기록이자 현대시에 드문 서사시 형식으로 현실의 리얼리티를 되살린 작품이다.
출판사 리뷰
요즘 보기 드문 서사시집이 나왔다. 경남 김해에서 활동하는 정보암 시인이 서사시집 『오늘은 어제의 내일』(작가마을시인선 74)을 펴냈다. 정보암의 이번 시집은 김해를 중심으로 뼈아픈 현대사를 살다간 비극적인 정치적 희생자를 소환한다. 서사시집의 대상자는 한국 문학사에 익히 알려진 김원일, 김원우 소설가의 아버지와 김해의 교육선구자로 알려진 한얼학교 설립자 강성갑 목사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김원일, 김원우 소설가는 이미 한국문단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들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두 소설가의 부친은 김원일 소설가가 8살 때인 6.25 전쟁 때 월북하였다. 강성갑 목사는 보도연맹 검속으로 총살당했다. 당시 지식인이라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론에서 어느 것이 가족을 살리고 민족을 위한 일인지 선택의 중심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김원일, 김원우 소설가의 아버지도 이러한 고민 끝에서 항일 독립운동가임에도 이름에 빨간 점이 찍혀 어쩔 수 없는 월북을 선택하게 된다. 자신의 선택이 가족과의 영영 이별이 될 줄 알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당시의 혼란한 나라 사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정보암 시인이 주목한 것은 현대사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몇백 년도 아니고 자신보다 불과 수십 년 앞서 살아온 분들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책과 기록으로만 보았던 일들이 불과 몇십 년 앞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그것도 같은 땅 김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2025년 대한민국은 자동차, 반도체, 음식, 화장품 등 이른바 K문화로 세계인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한 세계의 리더국가로 회자되는 마당에 불과 이삼십 년 앞서 살아온 분들의 고난을 마주하고는 외면할 수 없어 작품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정보암의 서사 시집 『오늘은 어제의 내일』은 모두 3부로 편재하고 있는데, 1부는 월북 아버지와 일경에 총살당한 강성갑 목사 속으로 들어간 화자의 독백시 ‘아버지의 독백’으로 꾸며졌고 2부는 그러한 아버지를 둔 딸(모든 자식들)의 눈으로 추측해보는 ‘딸의 혼잣말’이 3부는 비극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현대사의 비극을 담담히 담은 아버지와 딸의 대화를 표현한 ‘부녀의 대화’로 구성하고 있다. 1부 ‘아버지의 독백’에는 “먹어야 살 수 있다/먹어야 생명체다/먹고 지탱하는 건 본능”(「하자마 농장」)처럼 당장의 끼니부터 걱정해야 하는 가장의 고뇌와 “황국 신민 황도를 외쳤지만/내선일체는 빛 좋은 개살구/선인은 뛰어봤자 손바닥 안/조합에서 높은 자리는 일본인”(「철창」)처럼 일제의 수탈을 보여주는 혼란한 사회상을 보여준다. 2부 ‘딸의 혼잣말’에서는 “북한은 사상투쟁/비판생활총화로 세뇌사업 주력하고/남한은 전향자 검속/반공을 통한 정체성 우선 내세워/한 뿌리서 났어도 생김새는 달랐다”(「인민반과 보도연맹」)고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면서 “카빈 총탄에 발기발기 찢기고/이 골 저 골 한처럼 피었구나/새하얗게 질린 꽃잎 숨어”(「계란꽃 개망초」) 살아온 가족들의 비애를 담았다. 3부 ‘부녀의 대화’에서는 “밤새 고독한 북간도 사투리가/남도 거시기로 동주길 흩뿌리며//생명 담보해 유고 품은 마루/결 고운 우정 화신처럼 뭉클하다”(「동주길 걸으며」)며 서로를 소통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서사시집은 역사적으로는 현대사의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고 공감하고자 하는 후대의 시선이 담긴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점이며 문학사적으로는 한국문학사에서 자유로운 현대시의 다양성으로 인해 리얼리티를 내세운 서사시가 사라지다시피 하였는데, 정보암 시인이 허구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스토리의 생생한 리얼리티가 시집을 창작했다는 점이다.
하자마 농장
결국은 먹는 것이다
굶주림 못 채우면
모든 것은 흰소리
먹어야 살 수 있다
먹어야 생명체다
먹고 지탱하는 건 본능
상인은 돈 먹고
농민은 농사를 먹는다
7할 도지는 죽으란 말
참다못해 들어 올린 손
떨릴 수밖에 없었으리
생사가 달린 문제니까
무라이든 하자마든
읍장이든 나랏님이든
당장 급한 건 밥이다
조선인 지주 홍조 어른은
흉년이라 오히려 깎아준다는데
하자마는 소작조차 몰수라니
물정 모르는 어린 내 맘도
이건 아니다 싶다
예부터 환곡제 왜 있었겠나
내지 반도 따질 거면
뭐 한다고 일한병합 했을꼬.
늦은 귀가
아버지의 빛바랜 일지첩은
첫 장부터 눈동자를 적셨다
어릴 적 서울내기 생각난다
내 첫사랑 민수
난생처음 달콤한 아픔을 준 아이
사변 때 총 맞아 죽었단 말도 있고
슈샤인 보이 소문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야음 틈타 들른 집에서
딸의 사랑통 엄마께 들었나 보다
이렇게 다정한 분이
가족을 팽개치고 월북이라니
한때는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연좌제가 목을 죌 때마다
억하심정 풍선처럼 부풀었지만
어쩌겠는가 숙명인 것을
전쟁 나던 해
사상 찾아 떠난 아버지는
너덜너덜한 유품 한 권으로
속초에서 이복동생 손 잡고
꿈처럼 시공 건너뛰어
늦은 귀가를 했다
엄마도 동생들도 없이 나만
상처 딱지 겨우 앉은 집에.
희망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
나도 상급학교 진학하면서
이웃 볼 수 있었고 세상 알았다
금융조합 막내에게
농민들은 묻기조차 어려워한다
글자 모르는 죄인이라
납부금 이자 영문도 모른 채
억지 춘향이로 내거나
어린 내게 하소연하거나
한 줄기 빛 브나로드
민중 속으로 상록수처럼
농사도 배워야 잘 짓는다
산업도 알아야 잘 만든다
뭣이라도 알아야 발전이 있다
우리는 쉬운 한글 있으니
김해에 한글 선생님 많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성 충분하다
매달 급료 받아 기생 치마폭 꽂지 말고
내 고장 들판에 브나로드 희망 꽂자.
작가 소개
지은이 : 정보암
1960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1997년 《창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창조문학 대상(2014년)을 받았다. 김해외국어고등학교장으로 퇴직했으며 시집 『오후 네 시 출발할 시간』, 소설집 『나무는 어찌 거목이 될까요』가 있다. 시향문학회, 포앰하우스 동인.
목차
Ⅰ. 아버지의 독백
사랑을 놓친 딸에게
하자마 농장
횃불
철창
희망
야학
팍팍한 가슴
항심회
진영 형무소
편안한 구속
대한 광복 만세
혁명이 다가온다
귀향
다짐
정치
선배의 품격
불길
동문
상경
가을 추수
전쟁
진영의 별
추모
구세주
나의 사랑 나의 님
이산가족
재회
Ⅱ. 딸의 혼잣말
늦은 귀가
유학
친구에게
바깥양반
낙인
아버지
인민반과 보도연맹
나밭고개
설창고개
변덕
계란꽃 개망초
삼남 킬링 필드
토지개혁 농지개혁
사랑 어원 가설
Ⅲ. 부녀의 대화
아버지의 우리말
기윽, 디, 시읏
아버지의 연인
동주길 걸으며
호모 미스티쿠스
아버지의 내자
민주에게
선택적 역사
세월의 세월은 보약
투석(透析)
아버지의 별
이주민 수로의 이상향
동경
침묵은 은, 웅변은 금
금시작비
오늘은 어제의 내일
♤ 해설 - 세기의 서사시 / 조승래
♤ 발문 – 서정적 감성으로 역사적 교훈 담아 / 김광호
♤ 추천사 – 은유적 서사로 펼친 우리들의 이야기 / 심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