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벗님』은 한 인간이 세월의 뒤편에서 건져 올린 사람들의 향기와 자신의 회한, 늦은 깨달음의 기록이다. 영국과 호주, 베트남, 태국, 중국에서 만난 인연들. 평범한 일상 속의 작은 선의(善意), 세월호·교육·역사·공동선에 대한 사유도 담고 있다.
또한, 이 시대에 굳건한 가치를 지켜낸 이들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엔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가치인 ‘함께 살아갈 이유’가 있으며, 우리가 잊고 지낸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헌사이다.
읽는 내내 당신의 곁에 있는 '향기로운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며, 잊고 살았던 삶의 태도와 인연의 소중함을 되찾고 싶은 이들에게 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당신 또한 누군가의 벗님이 되고 싶어질 것입니다.
시드니 김(KMS) 형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 모두 좋은 것일까? 전산 분야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으로 두 번째 입사했다. 동료 중에 나보다 한 살 적은 김(KMS) 형은 내게 과할 정도로 깍듯하게 형님 대접을 했다. 본부에 같이 근무하다가 사이트로 파견 나가며 둘이 근무했다. 내가 전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던 반면, 그는 전공도 했고, 다른 곳에서 몇 년을 일해온 터라 전문가였다.
프로그래밍을 알아야 했기에 당시 주로 사용하던 포트란(FORTRAN)과 코볼(COBOL) 입문서를 풀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프로그래밍의 첫걸음마였다. 포트란으로 간단한 수식을 이용한 표를 출력하기도 쉽지 않았으나,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배움의 기쁨도 컸다. 하나둘 문제를 풀고 막히는 부분은 옆에 있는 김(KMS) 형에게 물으며, 꽤 열심히 공부했다. 조금씩 난도가 높은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기쁨이 꽤 쏠쏠했다.
그러다 며칠을 해봐도 원하는 답을 구하지 못한 문제를 김(KMS) 형에게 물어보니, 잠시 보다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기에 그런 줄 알았다. 또다시 며칠이 흘렀으나 해법을 찾지 못해 헤맸고, 김(KMS) 형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달리 그 문제를 풀어보는 것도 아니었다.
사무실에 보고서를 출력했던 이면지가 많았기에 퇴근길에 한 움큼 가지고 퇴근하여 늦은 밤까지 그 문제에 몰두했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자면서 꿈에서도 그 문제에 매달렸다. 이면지를 머리맡에 펼쳐두고 연필을 둔 채로 잤다. 잠결에 일어나 불을 켜고 연필을 쥐었더니, 꿈속에서 찾은 그 해법은 불을 켜는 순간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머리맡에 어질러진 이면지에 연필도 여기저기 둔 채로 잤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연필을 찾아 쥐고, 생각한 해법을 끄적였다. 그러나 불을 켜니,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다 보니, 이젠 어둠 속에서 쓴 글씨도 해독이 가능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컴퓨터에 넣었으나, 정작 답이 프린팅되지 않는 오류였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면서도, 정작 김(KMS) 형은 외면한 채, 나 몰라라 하는 것에 화도 났다.
어느 날 새벽 불을 켜고 끄적인 것을 보니, ‘바로 이거다!’란 확신이 들어서 택시를 타고 사무실에 왔다.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한 뒤, 프린터를 보는데 찾던 정답이 출력되었다. 평소 소음이었던 프린팅 소리가 경쾌한 음악 소리로 들렸다. 그 한 장의 출력지를 보며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일찍 나오셨네요.’ 하며 사무실에 들어서는 김 형에게 ‘그 문제 풀었어요.’ 하니, 그저 무덤덤하게 ‘예, 해내셨군요.’ 하는 김 형에게 서운할 정도였다.
김 형에 대한 응어리로 내내 묻어두었던 그 사건을 6개월 뒤쯤인 연말 저녁 자리에서 물어보았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면서 겪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반드시 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수준이 있는데, 형님에게 그 문제가 바로 그것으로 보였기에 그랬습니다.’라고 답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의 가치는 무엇일까? 김(KMS) 형의 깊은 속뜻과 나를 위한 진정한 배려는 전문가이기에 가능했다.
나는 어땠나? 주변이나 후배들에게 알량한 것을 가지고도 ‘그것도 모르냐?’라며 면박을 주었다. 사회 초년병 시절에 김 형에게 배운 귀한 가르침을 정작 살면서 실행하지 못한 서푼짜리가 나였다.
(2019.10.15.)
호주 브리즈번에 두 달 출장을 갔었다. 김(KMS) 형을 본지도 오래되었기에 먼저 시드니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목적지인 브리즈번으로 갔다. 김(KMS) 형의 아담한 정원이 있는 집에서 남매(KBG, KKD)를 둔 김(KMS) 형 가족과 해후할 수 있었다.
브리즈번 날씨가 하룻밤을 지낸 시드니와는 또 달랐다. 참 큰 나라다! 담당 파트너와 주로 지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초대를 받다 보니, 답례로 가끔 음식을 대접하게 되었다. 대접하는 처지에서 약속하면 부인이나 동료도 같이 초대하게 되었고, 주로 한식당으로 갔다. 브리즈번에도 한식당이 있었고, 꽤 비쌌다. 숙소도 좀 편한 곳을 잡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아직 체류 기간이 열흘도 더 남았는데, 출장비가 부족할 것 같았다.
당시 호주 TV에는 IMF를 당한 한국의 ‘금 모으기 행사’가 연일 보도될 때였다. 국가 부도를 맞아 국민이 줄 서서 돌 반지 등 금붙이를 내놓는 것이 그들 눈에는 신기했을 터였다. 파트너에게 사정 얘기를 하며 부탁했다. ‘아무래도 남은 일정을 지내기에 경비가 모자란다. 내 조국에서 저렇게 하고 있는데, 한 푼이라도 외화를 쓸 수는 없다. 날 시드니로 좀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곳은 왜?’ ‘거기서는 친구 집에서 지내면 되니, 돈을 절약할 수 있다.’ 내 취지에 공감한 그가 일사천리로 어렵게 일정을 조정해 주었다. 말레이시아 본부에서 승낙 통지가 왔다며, 행복하냐고 묻기에 ‘그래. 정말 고맙다.’라는 내게 작은 귀국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도 호주의 대부분 공산품은 중국산이었고, 일정 조정 등으로 폐를 끼쳐 미안했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공항에 데려다주며, ‘이건 호주산이다.’라며 작은 화병을 내게 주었다.
그렇게 뜬금없이 김(KMS) 형 집으로 갔고, 거기서 일주일을 지냈다. 며칠 안방에서 혼자 지내던 중 옆방을 보니, 네 식구가 한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사이 이사를 해서 집이 바뀌었고, 방이 두 개밖에 없는 집인 걸 몰랐다.
민망했지만, 남은 며칠을 김(KMS) 형과 같이 지내고 귀국했다. 파트너의 고마운 배려 덕에 김(KMS) 형 가족에게 큰 폐를 끼쳤지만,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소중한 추억이다. (2020.1.11.)
김(KMS) 형의 또 다른 큰 가르침을 실행하지 못한 것이 있다. 김(KMS) 형이 나와 같이 입사한 친구들과는 달리 실무 경험도 많은 데다가 능력도 있어 김(KJS) 상무 등 윗분들의 신뢰가 컸다. 하루는 김(KJS) 상무 방에 불려 가 한참 있다가 내려온 김(KMS) 형이 나더러 상무님이 찾는다고 해서 올라갔다. 하나의 결정 사항에 대해 내 의견을 달라고 말씀하셨다. 별로 큰 사안은 아니었으나,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내 결정에 따르시겠다는데 많이 난감했다. 말씀하신 A와 B, 두 사안 중 A로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니, 그렇게 추진하라 하셨다. 김(KJS) 상무의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전문가인 김(KMS) 형이 왜 날 골탕 먹이냐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방에 와 김(KMS) 형에게 물어봤다. ‘A로 추진해야 할 것 같아 상무님께 A로 말씀드렸는데, 맞나요?’ ‘예.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김(KMS) 형이 말씀 안 드리고, 날 찾게 했나요?’ ‘그런 결정 사항은 형님이 하셔야죠.’ 김(KMS) 형은 별 쓸모없는 내 존재를 부각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 <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