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머리말
이 책의 교정지를 막 넘긴 다음 날, 나는 프롤로그를 다시 작성했다.
책을 집필하기 전 마음은 그랬다. 과학에서 다뤄지는 원자는 그저 퍼즐 같은 주기율표에만 지리적으로 기억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각각의 원소는 그 자체로 물질의 근본이고, 세상이었으며,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다뤄지는 대상은 원소였으나, 원소를 통해 투영되는 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원소 자체, 그 본질은 과학으로 이해되지만, 쓸모는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이다. 원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 더 확장해 과거의 과오 혹은 오만, 지금의 최선, 그리고 미래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는 게 프롤로그의 초고였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을 접하고 나는 냉정해야 했었음을 고백한다. 양립함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숨기고 희망만을 꺼냈다. 프롤로그에서 나는 비현실적 낙관보다, 현실적 비관이 솔직한 심정임을 숨기고 있었다.
교정을 마친 2025년 10월 10일, 이날은 자본주의의 지표와 같은 주식시장에 샴페인이 터진 날이다. 코스피 지수가 최초로 3,600을 넘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가 견인하며 미국 주식시장 역시 연중 최고가를 경신한 종목이 쏟아졌다. 같은 달 말에는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제(APEC)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유례없는 관세 압박을 시작으로 전 세계가 극도의 긴장 상태로 여러 달을 보내고 있던 터라 이번 정상회담에 기대감이 있었다. 지난 4월 미국과 중국은 서로 100% 넘는 초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관세 전쟁’을 벌이다가 이후 고위급 협상을 이어오며 긴장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혼란한 국제사회에서 풀리지 않는 매듭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느낌이 들던 그날 저녁, 중국은 무역과 관련해 극도로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중국이 전면적으로 ‘희토류’ 생산과 관련된 모든 요소에 대해 수출 통제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에 맞서 대중 추가 관세를 인상했다. 전례 없는 155%의 관세였다. 미·중 무역 갈등은 재점화됐다. 관세전쟁으로 다음 날 뉴욕 증시는 급락했고 전 세계 자본시장에 파란불이 일제히 들어오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도구이자 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과학책에서나 볼 수 있는 주기율표의 조각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재진행형 시제의 옷을 입고 안개와 같은 미래를 걷는 원소의 이야기를 써 온 것이다. 원소를 둘러싼 위대한 이야기에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하는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를 지탱하는 신념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 신념의 이면에는 세상과 이익을 나누지 않겠다는 배타적 의도가 숨어 있다. 이런 태도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인류가 원소를 처음 발견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질 시대 석탄기처럼 불안정한 시기를 오랫동안 거친 지구는 당시 지구가 품었던 에너지를 ‘탄소’라는 원소를 이용해 석탄과 석유라는 화석연료로 가두었고, 3억 년이 흐른 뒤, 인류는 근대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탄소에서 꺼내는 방법을 알아냈다. 탄소가 품은 에너지는 이전 인류가 가진 어느 에너지보다 강력했다. 마치 20세기 인류를 위한 과거 지구의 선물이라 착각할 정도로 주기율표의 6번째 원소를 통해 문명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마치 신을 위한 도전처럼 탄소를 동력으로 바벨탑을 쌓은 것이다. 높이 오른 만큼 깊고 넓게, 지각에 남은 자원을 퍼 올릴 수 있는 데까지 퍼 올리며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 자원을 마음껏 쓰기 위해 권력은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한계를 무시한 규제 철폐와 감세 정책으로 고소득층에 혜택이 돌아갔다. 사람들 눈을 가린 건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였다. 이 효과는 소비와 투자가 확대돼 경기가 활성화되면 그 혜택이 저소득층과 작은 기업에도 돌아간다고 하는 이론으로,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방임주의’의 한 이론이다. 시장에 맡긴 방임주의는 이후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으로 확대·재생산됐다. 1981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의 레이거니즘은 고소득자 감세, 기업 규제 완화, 정부지출을 축소했다. 이런 기조는 결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개발, 효율, 성장, 성공 같은 행위는 모두 파괴 위에 건설된 것들이다. 특히 냉전이 끝나자마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보존을 염두에 둔 적이 없고 파괴만 경험한 세대가 바로 인류세에 살고 있는 현 인류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최소한의 윤리는 없었다. 훗날 닥칠 재앙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그저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존재가 가장 어리석은 짓을 벌인 것이다. 미친 듯이 먹어도 인류의 허기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데메테르의 저주를 받고 스스로 손발까지 먹는 에리직톤의 모습이 현대의 인류와 겹쳐 보인다. 원소를 다루는 교양 과학서에서 정치, 경제 이야기가 생경하게 들리겠지만, 서두에 언급했듯이 원소는 과학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지식을 넘어 우리의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령, 지구 위 최고의 권력을 가진 나라가 극도로 참여를 거부하는 세계적 선언과 계몽 운동을 보자. 그 중심에 있는 대상은 과학에서 다루는 ‘탄소’ 아닌가.
화학 원소를 다루는 학술서와 교양 과학 도서는 적잖게 있다.
거기에서 빠지지 않는 원소가 ‘탄소’이다. 특히 최근에는 기후 변화를 다루는 대부분 수사의 도구로 탄소는 열외가 없다. 탄소가 기후 변화의 주범, 심지어 악당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원소라는 사실은 이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탄소를 줄이거나 탈출하기 위한 행위로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하지만, 탄소가 주범이나 악당이라는 표현은 늘 내게 거슬린다. 굳이 누구도 기소하지 않은 피의자를 내세워야 한다면, 그 대상은 자연의 일부인 탄소가 아니라 인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출판사로부터 집필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탄소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싶지 않았다. ‘탄소’라는 상징은 너무나 거대하고,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더 본질적인 문제들이 가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는 탄소를 회수하고, 더 이상 그 물질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운이 좋아 다시 찬란한 시절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늘 의심한다. 동일과정설이 말하듯, 현재가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다면, 역사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에너지Energy’라는 키워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소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고 유지할 수도 없다. 생명은 탄소를 매개로 대순환하며 문명을 지속하기 위해 여전히 어디에선가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지금까지 탄소였지만, 이제는 탄소가 아니어야 한다. 결국 ‘대안’ 혹은 ‘대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다른 물질로 관심을 옮겨가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똑똑한 인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주기율표의 다른 장소를 찾아냈고, 앞으로도 더 찾아낼 것이다.
이 책에서 꺼낸, 익숙한 혹은 다소 생경한 10개의 원소-철, 리튬, 알루미늄, 구리, 소듐, 수소, 우라늄, 코발트, 네오디뮴, 헬륨-과 같은 물질은 그 희망의 시작이고 분명 인류 미래의 지속 가능함을 위해 필요한 물질임이 맞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인류는 과거의 역사에서 좀처럼 교훈을 얻지 못했다. 탄소를 얻기 위해 지각을 파헤쳐 만든 거대한 구덩이를 다시 메우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더 많은 구덩이를 파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 기후변화, 탄소중립 등 인류가 직면한 수많은 숙제 속에서, 자연을 향한 ‘절제’와 ‘배려’, ‘관용’의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물질을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그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열차를 탄 것처럼 말이다. 이전처럼 여전히 자연은 파괴되고, 가난한 자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혜택받지 못한다. ‘지속 가능’이라는 선언하에 인류가 이토록 절박하게 대안을 찾기 위한 이유는 그동안 누려온 안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한 지속이고 안위일까. 이전보다 더 불편해지고 덜 편안해지는 게 오히려 더 빠른 해결책일 수 있음을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소개하는 10개의 원소는 지금의 희망이자 묵직한 임무이다. 이들의 발견 과정부터 현재의 개발 문제점, 특성, 장단점 그리고 앞으로의 개발 방향과 지속 가능성 등을 다루면서 이를 통해 원소의 화려한 능력과 희망의 얼굴 뒤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있으나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마치 52헤르츠의 울음을 내는 고래처럼, 지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인류와 자연의 외로운 울음을 듣고, 그들을 찾아내어 기억하고 지키는 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다 운 좋게 탄소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해방되더라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독자들에게 열 가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이야기는 태양과 같은 별과 그리고 행성의 바다를 채운 물방울과 한 줌의 푸르고 검은 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야기의 끝은 우리가 모두 함께 써야 할 것이다. 나와 당신이,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 함께.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병민
컴퓨터공학자이자 화학공학자다. 한림대학교 반도체·디스플레이융합스쿨에서 겸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반의 과학 콘텐츠 플랫폼 쏙SOAK의 프로덕트 오너이고, 시민들과 과학 나눔을 실천하는 재단법인 카오스KAOS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과학 대중화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저서로는 『병원에 간 과학자』, 『지구 파괴의 역사』, 『거의 모든 물질의 화학』, 『숨은 과학』,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슬기로운 화학 생활』, 『사이언스 빌리지』가 있으며, 옥스퍼드대학교 VSI 시리즈인 『화학의 역사』를 번역했다.
목차
프롤로그
제1장 별에서 만든 마지막 원소, 철
제2장 땅의 눈물 위에서, 리튬
제3장 가벼운 금속의 무게감, 알루미늄
제4장 문명을 흐르게 한 전류의 금속, 구리
제5장 평범한 것의 비범한 힘, 소듐
제6장 우주의 첫 번째 이야기, 수소
제7장 가장 무거운 원소, 가장 무거운 책임, 우라늄
제8장 푸른 금속의 검은 그림자, 코발트
제9장 보이지 않는 힘의 제왕, 네오디뮴
제10장 하늘에서 온 가장 가벼운 경고, 헬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