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나와 세계 사이에 놓인 팽팽한 긴장감에서 독특한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차분하면서도 활달한 감각을 지닌 시인 연정모의 첫 시집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가 아침달 시집 55번째로 출간되었다. 제1회 반연간 《문학수첩》 시 부문 신인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당시 “시적 공간에서 상상력과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변주하여, 춤을 추듯 뛰어놀 줄 알고, 시적 사유를 끝까지 자신만의 언어로 밀고 나아”간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번 시집은 그에 걸맞게 풍성한 입맛과 단단한 사유가 만난 시들이 자유분방한 매력을 보여준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정원은 이번 시집을 “사랑을 지우지 않기 위해 결핍을 보존하는 윤리”를 지닌 세계라 말하며 시인이 보여주는 사랑의 양면성을 정확히 짚는다. 끝내 ‘사랑하기’라는 태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명랑함은 시집 속에서 여러 태도로 분화하며 비운의 세계를 돌파한다. 이번 시집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으로 힘차게 헤매는 방식으로 정확해지는 존재의 사랑을 그린다.
출판사 리뷰
“진짜 아름다움은 원래 두려운 거야”
탄생과 죽음의 이인삼각
달콤해지는 몸통이 가진 사랑의 점액성
제1회 반연간 《문학수첩》 작가 신인상 수상 당시 “시적 공간에서 상상력과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변주하여, 춤을 추듯 뛰어놀 줄 알고, 시적 사유를 끝까지 자신만의 언어로 밀고 나아”간다는 호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연정모의 첫 시집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가 아침달 시집 55번째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나와 세계 사이에 놓인 팽팽한 긴장감에서 독특한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시인의 명랑하면서도 단단한 사유를 지닌 문체로 탄생과 죽음의 문제에 관해 다룬다. 시인은 시집 속에서 다채로운 태도로 분화해 대상을 성실히 바라보고, 풍부한 상상력과 질감을 동원해 입체감 있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한 사람의 고유한 생의 내력을 훑는 것처럼 서로 중첩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48편의 시로 연결되어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각 부에서 주요하게 드러내는 사랑의 실물감을 구체적인 시선으로 포착해 담아낸다. 1부에서는 인간의 탄생이 갖는 존재론적인 비극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몸통만 한 공포를 지니고 살 운명에 처”(「사랑하기」)한 화자들은 아직 ‘아기’인데도 이미 삶을 다 살아버린 듯한 존재 같다. 탄생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에서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둘러싼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서/ 울지 않을 수 없”을 삶은 일찍이 “큰 사랑이 두렵단 건/ 벌써 사람이란 뜻”을 다 헤아리고 만다. 여기서 시인이 주로 찾는 존재는 천사나 유령이나 새처럼 “착지를 두려워 않는/ 가벼운 몸”(「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을 가진 것들이다. 그는 “안전히 추락하고 가볍게 사랑하는 꿈”을 꾸면서 “이어지는 작은 삶들”이 이루어내는 “삶의 가능성들”(「에버에버옐로그린」)이 조금이나마 다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2부에서 탄생에 대한 공포와 죽음 의식은 점점 더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낸다. “없는 삼촌”이 본 적 없는 영화를 보고도 영화 속 인물들의 죽음을 예언하고(「스토리라인」), 아득한 시간을 살았던 존재들이 전시된 곳에서 “뼈 아래를” 걷는 이들이 느낀 “으스러지는/ 실물감”은 묘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레플리카」), “삶에서 팽/ 당한 사람들”은 몸이 찌그러지지 않는 숨을 물으며 다채로운 디저트가 남발되는 여름 속에서 “달콤해지는 영혼”이 된다.(「엘렉트라, 열 살」) 3부는 균열을 일으키는 일상의 표면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사랑의 점액성을 더욱 강조한다. “사랑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이 삶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낭만주의자를 위한 오토시」) “탄생의 기미만을 유지하는 것”(「언타이틀」)이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한 슬픔이라고 볼 수 있다. “끈적해진 형체들이// 바닥에 닿자마자 굳는”(「성탄」) 존재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썩고 조각나고 터지고 갈리는 등 여러 형태로 분리되어 몸통의 분화를 겪는다. 이는 우리가 생에 있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존재 방식들이기도 하다. 마지막 4부는 다시 탄생의 배경으로 돌아가 죽음보다는 삶을 향한 의지로 나아가는 자세들이 담겨 있다. 앞서 말한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을 다시 호출해 “신체다운 신체를” 얻고, “끝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어떻게든 물 위에 뜨고/ 어떻게든 호흡”(「입춘」)하려고 한다. “하나의 아름다운 삶이 끝나면/ 또 다른 아름다운 삶이 시작된다는 절망”(「농담」)을 갖게 되겠지만 시인은 이 삶을 결코 놓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으며 나아간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인삼각으로 묶이는 삶은 사랑을 더 끈끈하고 달콤한 것의 성질로 만들어 보관한다.
“우리를 구해줄 고통, 이것을 기다려왔지”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 사랑을 깨무는 시
시인의 기억은 종종 부서지고 으깨지는 형상들이 많다. “실수로 너무 많이 자란 천사의/ 날개”(「보육원」)는 뜯겨서 천사라는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다. 그렇게 “은퇴한 천사”는 햇빛에 섞인 채 도로를 바라보고, 그 “찻길에는 온통 사과가 으깨어진 상태”(「소일거리 잼잼」)다. 시인이 자주 부르는 장소인 수영장에는 “잎과 벌레와 푸른 열매와 죽은 사랑”이 건져진다. “곱게 갈려 뽀얗게/ 흩어지는 비명” 속에는 “사랑하는 마음만이 최후까지 남아 있다”(「파우더」)고 말하는 시인. 그가 발화하는 시의 입자들은 모두 삶을 새롭게 구성하는 가능성이자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다. 해설을 쓴 정원 문학평론가는 이를 두고 ‘Haecce(라틴어로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바로 이것’이라는 뜻)’라는 말을 통해 각기 지닌 “고유한 개별성”을 짚는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은 삶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고 답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언은 “오래전 죽은 친구에게서 썩지 않는 냄새가 난” 이후로 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다시 말하면, 삶은 “흉한 것도 다시 봐야 한다는 당부”(「유리온실 혹은 거대한 프리저브 유리병」)를 내가 어떤 식으로 듣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연정모가 삶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선택한 방법은 부서지고 으깨진 사랑을 모두 그러모아 “프리저브 유리병”에 담는 일이다. 그런 다음 아주 달콤한 “단것”으로 만들어 보관한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과일이나 잼, 케이크 같은 다채로운 디저트들이 향연을 이룬다는 점이다. “달고 새콤하다/ 우리를 구해줄 고통/ 이것을 기다려왔지”(「아열대 사랑」)라 말하는 시인은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생의 결핍을 한데 모아 잘 휘저어 점성화한다. “나를 다른 물질로 바꿔줄” 능력으로 쓰인 시에는 결핍과 고통 속에서도 발견되는 뭉근한 사랑이 있다. “떫은 위에 인공 설탕의 맛”(「잼팟」)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이유는 아마도 이 삶의 맛이 혀를 마비시키는 씁쓸함으로 채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종종 삶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일들에도 지혜를 구하는 존재들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쉽게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 두려움은 다양한 형태로 발화되어 우리 삶을 지켜주는 일종의 보존 법칙으로 작용한다. 시인 연정모는 앞으로도 “슬프고 상냥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계속 자신을 아프게 하는 고통과 슬픔을 찾아 나설 것이다. “나는 이게 어떤 사랑보다 재밌고 좋더라” 말하면서 “훌륭한 슬픔이 채워지는 동안에도”(「천국에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택할 것이다. 사랑 앞에 펼쳐지는 이 능동적 수행은 가끔 삶이 버거울 때 가벼운 일탈을 시도하기도 한다.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 모든 아픔을 다 짊어지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로 사랑은 결연해지고 달콤해진다.
태어나 보니 전부가 단단하고
단단한 틈에 둘러싸였고
둘러싼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물속에도 물길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큰 사랑이 두렵단 건
벌써 사람이란 뜻이다
―「사랑하기」 중에서
찢어지던 것들은 계속해서 찢어지고
달라붙는 것들만이 영영 끈적해지는 과정
체온과 기온이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음을 안 후로
여름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자유형」 중에서
한 손에 올릴 수 있는 하루들이 점차 줄어들면
너는 내 이름을 불러주겠니?
둥글어진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면
쏟아지는 먼지와 빛
플레어 플레어
○
과일잼 넣은 쿠키를 구웠다
손에 쥐었더니 따뜻하기에
입술을 오므려 입을 맞추었다
―「소일거리 잼잼」 중에서
목차
1부 부드러운 영구치를 드러내고
사랑하기
보육원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
분지
오층
자유형
앵무
에버에버옐로그린
유리온실 혹은 거대한 프리저브 유리병
아열대 사랑
딸과 뿔
잼팟
2부 점점 더 달콤해지는 몸통
스토리라인
소일거리 잼잼
흰
유진의 세계
레플리카
진화의 방식
크림
요거트
엘렉트라, 열 살
쿤스트캄머
샹들리에
하지
헛것들
3부 안전하게 으깨진 일들
이 세계에서 만난 첫 친구
기일
도착지에서 하는 말
성탄
유리온실 혹은 거대한 프리저브 유리병
무환수 어항
수영장
언타이틀
낭만주의자를 위한 오토시
디렉터스 컷
홀리데이
파우더
4부 어떻게든 물을 좋아하기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
입춘
겹겹이
농담
Good Dog
생일의 밤
방학숙제캠프
댄스댄스댄스
파우더
천국에서
지옥의 문 앞에서 자전거 타기
해설
Haecce! -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