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홍서연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A형 나는 BB형』이 시인동네 시인선 270으로 출간되었다. 홍서연의 시가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조화의 형식이 아니라, 조화를 유예하는 태도다. 이 유예는 무책임한 방기가 아니라, 차이를 지우지 않겠다는 결단에 가깝다. 불화를 제거하지 않고, 그것을 견디며 말하는 것. 세계와 화해하지 않으면서도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신은 A형 나는 BB형』은 동시대 시가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화의 미학이 곧 타자를 지우지 않는 윤리, 그리고 세계를 성급히 봉합하지 않는 사유의 형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이 끝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조화로운 세계의 이미지가 아니다. 대신 이 시집은 불화 속에서도 가능한 ‘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이야말로 오늘의 시가 감당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책임일 수 있음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해설 엿보기]
오늘날 많은 시들이 상처와 고통을 다루면서도, 결국에는 화해·치유·연대·회복이라는 이름의 조화로운 결말을 요청받는다. 이러한 요청은 종종 선의의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세계가 지닌 구조적 불화와 존재론적 차이를 서둘러 무화시키는 폭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홍서연의 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발 물러선다. 이 시집의 화자는 “섞이고 싶었다/속하고 싶었다”(「동의」)라고 말하면서도, 끝내 섞이지 못하고 속하지 못한 채 남는다. 그러나 이 남겨짐은 실패나 결핍의 징표가 아니라, 성급한 동일화에 저항하는 주체의 위치로 재배치된다. 가발과 머리가죽, 중력과 절벽, 공장과 상담실, 신앙과 기술의 이미지들이 끝내 하나의 의미망으로 통합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집에서 사물들은 서로를 보완하지 않고, 의미들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의 차이를 끝까지 유지한 채 충돌하고, 그 충돌 속에서 시는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 시집의 미학은 ‘조화로운 세계를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조화되지 않는 세계를 견디는 형식’인 셈이다.
누군가는 멧돼지라 하고
누군가는 뱀이라 하고
자라고 날고 뛰고 속이고 짓밟고 뭉개고
이미지는 읽고 먹고 쓰고 덮는다
이것은 이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것이 아니어서
이미지의 꼬리가 요들처럼 떨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비명
물방울처럼 부딪히는 요란한 언어들,
장면은 계속 바뀌고
소리는 여전히 off
들리지 않는다고 드러나지 않는가
― 「off」 전문
이러한 불화의 미학은 동시대적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효율과 투명성, 가시성과 설명 가능성이 미덕으로 승인되는 사회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분류되지 않는 것·회복되지 않는 것은 빠르게 제거되거나 주변화된다. 『당신은 A형 나는 BB형』은 이 흐름에 맞서, 분류 불가능한 BB형의 자리를 끝까지 고수한다. 이 시집에서 시는 이해를 강요하지 않으며, 독자에게 공감의 즉각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시는 불편한 상태, 미결의 상태,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를 지속시키며 묻는다. 과연 모든 것은 이해되어야 하는가, 모든 상처는 회복되어야 하는가, 모든 불화는 조화로 귀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망부석이 되지 말라고 당신은 떠나갔습니다
한참을 궁리하다 그만,
가장 환한 꽃나무 아래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 「그냥 지나갑니다」 전문
누군가는 애플을 열고
누군가는 애플을 열기 위해 돌을 깬다
본사는 주문을 넣고 콩고민주공화국의 아이들은 서둘러 광산으로 간다
한 조각을 더 깨기 위해서
망치를 들면
사과의 귀에 울리는 타닥타닥
갱도 속에는 삭은 빛 하나
어린 광부가 내리친 곳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사과
코발트를 오래 들여다보면 눈이 먼다
사과는 애플인데
애플은 왜 사과가 될 수 없을까
벌레 먹은
나라,
그곳엔 너덜거리는 꽃들이 수두룩하다
― 「사과가 애플이라면 애플도 사과일까요」 전문
전동자전거는
사람이 다니는 인도
자전거가 다니는 전용도로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
─ ── - ──-- -- ─〉 어느 길이든 다닐 수 있습니다
다만 속도에 따라
사람이었다가
오토바이였다가
자동차가 되기도 합니다
리미트 풀었냐고 묻는 선한 선배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는 말에서
번뜩이는 입술을 보았습니다
불행은 꽃잎과만 상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오늘도 서커스」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홍서연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수미산」 외 1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차
제1부
그냥 지나갑니다13/사과가 애플이라면 애플도 사과일까요14/어쩌다 염색16/새벽에 읽은 책19/저녁은 걸어서22/숨24/행간을 읽어가듯26/아마도27/나는 리본벌레를 키운다28/과일만 먹는 새가 있다30/클림트는 키스만 하나?33/휘발34/문상 버스36/검침원38/가발과 중력39/산산조각40/가두리42
제2부
오늘도 서커스45/YH 노동자의 가발공장46/흑백 포인세티아48/봉급 다음 날51/하얀 밤52/인형은 자라서56/아침은 소녀처럼 밝아 왔다59/내일 또 내일60/불쾌한 골짜기62/끝나지 않는 그만64/유리 감옥65/쇼룸66/사랑68/경계인70/절규72/쿨럭쿨럭 CU74/발모벽76/지구는 서둘러 가발을 쓰고78
제3부
off81/수상한 알리바이82/동의84/수미산86/정전기87/얼룩88/불타는 카르텔90/카메라 옵스큐라92/사라진 풀94/프리다 칼로96/불구의 두께에도98/쉿! 쉿! 쉿!100/수국101/패러독스104/글로리홀106/물감108/새로 고침110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