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 고 채명신 장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실록소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 장성들에게 기가 죽은 군수뇌부는 한국군 지휘권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 장성 중 유일하게 고 채명신 장군만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에 대해 주장했다. 그때 채명신 장군이 미군과 싸워 작전지휘권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은 위험한 작전에 미군보다 앞장서 투입되고,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채명신 장군은 6·25전쟁에서 조국을 구하고 베트남전쟁에서는 한국군의 용맹을 전 세계에 떨친 불후의 명장이다. 이 책은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의 삶에서부터 시작해 8평 장군묘역 안장을 마다하고 베트남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과 1평 사병묘역에 같이 묻힐 때까지의 일대기다.
출판사 리뷰
베트남전쟁과 6·25 백골병단의 전쟁영웅 채명신 장군
미군으로부터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목숨 걸고 지킨 진정한 지휘관
장군묘역도 마다하고 전우들과 함께 사병묘역 안장을 선택한 ‘참군인’
6·25전쟁에서 게릴라전의 시초인 백골병단을 지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 백전백승의 신화를 역사에 남긴 전쟁영웅 채명신. 그는 베트남전쟁의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미군에 예속되지 않은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하고, 새롭게 창안한 전투교리로 재래식 무기를 손에 든 한국군을 세계가 인정하는 정예 군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군인 채명신 장군의 참군인으로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꼭 기억해야 한다.
이북 출신인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 치하에서 벗어나 월남하기 전의 삶부터 월남전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과 1평 사병묘역에 같이 묻힐 때까지의 일대기를 가감없이 기록했다. 저자는 채명신 장군이 세운 업적은 전쟁사에 누구도 다시 세우기 어려운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한다. 채명신 장군은 공비토벌과 6·25 한국전쟁, 월남전 등에 참전하여 가장 오랜 전투경험을 갖고 있고,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상승의 기록으로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은 점에서 다른 어떤 장군보다 훌륭한 최고의 명장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채명신 장군은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평안도에서 교편을 잡은 교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김책과의 만남 이후에 공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껴 월남하였고, 국방경비대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군문에 들어섰다. 육군소위에 임관한 뒤 태백산 공비토벌작전에 나서 전공을 세웠고, 6·25전쟁에서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후방에 침투하여 북한군의 수뇌부인 길원팔을 생포하는 등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채명신 장군의 업적 중 후대에 가장 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한 것이다. 만약 그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한국군은 위험한 작전에 미군보다 먼저 투입되어 많은 희생을 당했을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군수뇌부조차 이런 위험한 결과를 인지하지 못하고 한국군이 미군사령부의지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으나, 채명신 장군은 박정희를 설득하여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했다.
또한, 그는 재래식 무기로 싸우는 한국군을 스스로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의 새로운 전술로 싸우게 하여 한국군이 연전연승을 거두는 세계 전쟁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세웠다. 그러면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칠 지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지시를 내려 세계 매스컴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 0순위였던 채명신 장군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면서 대장 진급에서 제외되었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채명신 장군을 예편 후 스웨덴 대사를 시작으로 그리스 대사, 브라질 대사 등으로 임명하여 무려 11년 동안 해외로 보냈다.
채명신 장군은 국가의 지도자로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세웠으나, 명예나 권력욕을 버리고 각종 애국 행사에 참여하면서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등 편안한 여생을 보내던 중 87회 생일을 이틀 앞둔 2013년 11월 25일,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채명신 장군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월남전에서 전사한 전우들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한국군 사상 처음 8평 장군묘역이 아닌 1평 사병묘역에 안장된 장군이며, 끝까지 부하 사랑을 실천한 불후의 명장이다. 우리는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식이 끝난 후,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김책은 채명신을 김일성에게 소개했다.
“김일성 동지, 내 옆의 채명신 동무는 공산주의에 통달한 인물입니다.”
“그렇소? 우리 김책 동지가 좋아할 정도라면. 어떻소. 그럼 아예 중앙에 올라와 같이 일하는게?”
당시 30대 중반인 김일성은 약간 검은 얼굴로 잔뜩 미소를 머금곤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유난히 많은 덧니가 기묘한 인상을 풍겼다.
“약탈은 총살형이다. 이번만은 경고로 끝낸다. 약탈한 물건을 원위치에 옮겨 놓고 원대에 복귀해 차후 명령을 기다려라!”
대대장의 분노와 권총사격에 놀라 죽을 줄만 알고 있었던 부하들이 벌벌 떨면서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다시 창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채명신은 부하들이 곳곳에서 약탈을 하고 있었던 정황을 확인하고 자신의 책임임을 통감했다.
채명신의 공격 방식은 이전 그의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포병사격 후 공격을 하는 국군과 미군의 일반적 전술과 달리 포병사격 후에도 계속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가 적을 기만한 뒤 일시에 기습공격하는 식이었다. 파머 장군이 떠난 뒤 열흘만에 포사격 직후 여명을 기해 순식간에 공격해서 아주 손쉽게 고지를 탈취했다. 중대가 공격 후 수색하는 가운데 대피호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적병 12명을 생포하는 전과도 올렸다. 채명신은 목표 탈취를 사단장에게 보고한 직후 즉시 적의 반격에 대비한 진지구축을 명했다.
작가 소개
저자 : 박경석
대전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미국육군보병학교,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등을 거친 전형적인 무관이었다. 육군대위 시절 필명 ‘한사랑’으로 시인, 소설가로 등단했다. 12·12 군란 직후 정치 군인과 결별을 선언하고, 육군준장 군복을 벗고 예편하여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_개정판을 내면서… 4
제1부 조국의 산야에서 … 13
제1장 자유대한의 품으로 … 14
제2장 국군 장교를 지망 … 28
제3장 제주도 4·3사태와 제9연대 … 35
제4장 개성 송악산 전투 … 43
제5장 태백산 공비 토벌작전 … 51
제6장 6·25전쟁 발발 … 60
제7장 채명신과 6·25전쟁 … 81
제8장 진격하는 채명신 대대 … 103
제9장 중공군 포위망 탈출 … 113
제10장 채명신과 백골병단 … 140
제11장 백전백승 채명신 연대장 … 171
제2부 베트남 전선에서 … 207
제1장 어려운 선택 … 208
제2장 채명신의 비책 … 229
제3장 상승 맹호부대 출진 … 237
제4장 빛나는 따이한의 긍지 … 261
제5장 군사작전 이외의 문제들 … 286
제6장 한국군의 초기 작전 … 310
제7장 맹호의 포효 … 323
제8장 백마부대 증파 … 350
제9장 청룡부대 작전 … 363
제10장 주요 작전의 승전보 … 372
제11장 진중 비화 … 390
제3부 격랑을 헤치고 … 401
제1장 부정부패의 늪 … 402
제2장 5·16 쿠데타와 채명신 … 412
제3장 영광의 그림자 … 425
제4장 종막을 내리는 신화 … 435
에필로그_채명신과 나 … 442
채명신(蔡命新) 장군 경력 … 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