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부모님 > 부모님 > 소설,일반 > 소설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하늘 세트 이미지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하늘 세트
열린책들 | 부모님 | 2022.03.25
  • 정가
  • 38,000원
  • 판매가
  • 34,200원 (10% 할인)
  • S포인트
  • 1,900P (5% 적립)
  • 상세정보
  • 11.2x11.8 | 0.868Kg | 1240p
  • ISBN
  • 9788932922096
  • 배송비
  • 2만원 이상 구매시 무료배송 (제주 5만원 이상) ?
    배송비 안내
    전집 구매시
    주문하신 상품의 전집이 있는 경우 무료배송입니다.(전집 구매 또는 전집 + 단품 구매 시)
    단품(단행본, DVD, 음반, 완구) 구매시
    2만원 이상 구매시 무료배송이며, 2만원 미만일 경우 2,000원의 배송비가 부과됩니다.(제주도는 5만원이상 무료배송)
    무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
    무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일 경우 구매금액과 무관하게 무료 배송입니다.(도서, 산간지역 및 제주도는 제외)
  • 출고일
  • 품절된 상품입니다.
  • ★★★★★
  • 0/5
리뷰 0
리뷰쓰기

구매문의 및 도서상담은 031-944-3966(매장)으로 문의해주세요.
매장전집은 전화 혹은 매장방문만 구입 가능합니다.

  • 도서 소개
  • 출판사 리뷰
  • 작가 소개
  • 목차
  • 회원 리뷰

  도서 소개

다가오는 2023년,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가 출간 100주년을 맞이한다. 열린책들은 한국시사 10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맞으며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을 출간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20세기 초는 시대적 고통과 개인의 천재성이 만나 탁월한 시집이 다수 출간된 시기이다.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시리즈는 당대 시인들이 남긴 시집을 엄선한 것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이들 시집을 접할 기회가 될 것이다.

총 두 세트, 스무 권의 시집으로 구성된 기념판은 한국 현대시 탄생의 순간을 충실히 재현하여 예술사의 가장 높은 성취를 현재화함으로써 이를 다음 세대에 계승하고자 한다. 가격은 세트당 38,000원으로, 권당 3,800원의 저렴한 가격이다. 세트로만 판매하며, 각 세트는 합지로 만든 견고한 박스에 담았다.

  출판사 리뷰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100주년 기념
한국시 탄생의 순간을 20권의 시집으로 재현


다가오는 2023년,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가 출간 100주년을 맞이한다. 열린책들은 한국시사 10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맞으며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을 출간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20세기 초는 시대적 고통과 개인의 천재성이 만나 탁월한 시집이 다수 출간된 시기이다.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시리즈는 당대 시인들이 남긴 시집을 엄선한 것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이들 시집을 접할 기회가 될 것이다. 총 두 세트, 스무 권의 시집으로 구성된 기념판은 한국 현대시 탄생의 순간을 충실히 재현하여 예술사의 가장 높은 성취를 현재화함으로써 이를 다음 세대에 계승하고자 한다. 가격은 세트당 38,000원으로, 권당 3,800원의 저렴한 가격이다. 세트로만 판매하며, 각 세트는 합지로 만든 견고한 박스에 담았다.

일반 독자가 20세기 초의 시집을 접하는 데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시집 자체가 망실되거나 절판됨에 따라 입수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간 한글 표기법의 변화나 출간 당시의 오식 등으로 인해 독서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본 기념판은 당시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초간본 그대로 배열 및 편집하였고 말미에 정확한 간기(刊記)를 수록하여 초간본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였다. 동시에 시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의 표기를 오늘날의 법칙에 맞춰 바꾸었으며 이남호 고려대 명예교수의 책임편집 아래 오기를 수정하는 등 철저한 교정 과정을 거쳤다. 나아가 시에 대한 상세한 각주와 시집이 가진 문학사적 의의를 설명한 해설을 첨부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의 접근성을 더욱 높였다.
시집을 선정함에 있어서는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남아야 할 작품성이 있는 시집, 그중에서도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시집에 주목하였다. 그렇게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부터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까지 사반세기를 아우르는 스무 권의 시집이 선정되었다.
각 열 권으로 구성된 세트는 독자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게 시집을 읽어 나갈 수 있도록 서로 다른 테마로 구성하였다. 하늘 세트에는 주로 이상적인 세계(자연, 종교, 고향, 유년 시절 등)에 대한 향수를 서정적이고 차분하게 노래한 시집을 모았으며, 바람 세트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당대 현실로 인한 고통을 이야기하는 시집을 모았다. 각 테마는 수록된 시집 간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독서에 추가적인 재미를 부여할 것이다.

한국시의 다양성과 시적 성취를 반영한 선정 기준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며


한국 현대시사가 곧 100년을 맞이하는 지금, 한 세기 전 시집을 출간하는 것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출간의 의의가 과거에 대한 회고에 머문다면 이 시집들은 과거의 것으로 박제된 채 어떤 현재적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기념판에는 과거에 대한 회고를 넘어 이들 시집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여 이들이 여전히 오늘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런 만큼 본 기념판에 수록될 시집을 선정하는 데에 특별히 많은 고민과 신중함이 필요했다. 수많은 시집을 편견 없이 검토하면서 그 문학적 성취에 대해 논의하였고 그 현재적 의의를 고민하였다. 또한 시리즈 전체가 지나치게 하나의 흐름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다양한 성격의 시집을 담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대표적 시인들의 시집이 우선 선정되었다. 예컨대 김소월, 한용운, 백석, 윤동주, 정지용 등과 같은 시인들의 시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들이 보여준 탁월한 시적 성취를 통해서도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아 왔다. 다만 독자들이 이들의 시를 대개 선집의 형태나 개별 시의 형태로 접했다는 점에서 이번 시리즈가 이들의 시집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읽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물론 기념판의 취지를 반영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문학적 성취가 탁월한 시집 역시 선정하였다. 섬세하고 간결한 언어로 어두운 현실을 강렬하게 드러낸 박남수 시인의 『초롱불』, 젊음의 비애와 허무에 대한 감각이 예리하게 드러나는 오장환 시인의 『헌사』, 감정의 과잉을 지양하고 지적이고 기발한 착상을 보여준 모더니스트 김기림 시인의 『태양의 풍속』, 한국 현대시가 지닌 심미와 서정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김영랑 시인의 『영랑 시집』 등이 그러한 시집들이다. 또한 시대적 한계로 인해 작품이나 정보 자체를 접하기가 어려웠던 작품들, 대표적으로 카프계 시인들인 김창술·권환·임화·박세영·안막의 『카프 시인집』을 수록하여 태초 한국시가 보여준 한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국시의 전통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

이번 기념판의 디자인은 지난 백 년과 다가오는 백 년의 만남을 시각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개별 시집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주제 의식을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한국시의 지난 100년과 앞으로의 100년이 만나는 교차점에 놓인 이 특별한 세트의 표지는 한국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서정성과 격동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하늘과 바람, 매일 만나지만 손에 닿지 않는 이 두 소재를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형상화했다. 아주 작은 픽셀 수백, 수천 개가 모여 우리가 익히 아는 풀밭과 산맥 그리고 물결을 이루는데, 여기에 더해진 몽롱한 색의 부딪힘으로 마치 언젠가 꿈속에서 만난 풍경인 듯 눈과 마음에 어른거린다. 이 이미지들은 뒤표지에 담긴 시구절과도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언어와 함께 시각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영랑 시집』의 이미지는 그의 시어들처럼 동글동글하고, 『현해탄』의 이미지는 부글부글 끓는 파도처럼 거칠다. 반면 『진달래꽃』의 표지에는 누구나 쉽게 한 구절 외울 법한 「진달래꽃」의 구절 대신 〈들꽃은 피어 흩어졌어라〉 라는 담백한 시구와 그에 어울리는 풍경을 담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긴 구절은 그의 시 「병원」의 한 부분으로 명확한 형태가 없는 거친 드로잉과 만나 새롭다. 어두운 현실에서도 이상과 고통을 개성 있는 언어로 노래한 한국시처럼, 짙고 어두운 색을 입힌 박스 안에 담긴 색색의 시집을 뽑아 드는 순간은 독자에게 반전의 즐거움 또한 제공할 것이다.〉 (열린책들 디자인 팀장 함지은)

하늘 세트

『해파리의 노래』(1923) 김억

시뿐만 아니라 서구시와 시론의 수용 그리고 민요시 운동의 측면에서도 한국시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김억의 첫 시집이자 한국 최초의 시집. 정형시 창작으로 선회하기 전의 시 75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서구시의 분위기를 띤 자유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연을 예찬하는 시들이 다수이며, 자유시임에도 불구하고 정형시에 가까운 리듬감은 전통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진달래꽃』(1925) 김소월
민족시인 김소월이 스무 살 전후에 쓴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등의 시를 묶어 1925년에 펴낸 시집. 전체 16장 12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집은 친근한 언어를 통해 보편적인 주제인 상실과 그리움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한국 서정시의 원형이라 평가받는다. 한국 현대시에서 최초로 널리 주목받은 시집이자 가장 폭넓게 또 가장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시집이다.

『님의 침묵』(1926) 한용운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한용운의 시집. 총 88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역설과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사랑의 형이상학을 고찰하고 있다. 세련된 언어와 품위 있는 어법 그리고 화려한 비유적 상상력으로 1920년대 한국 시단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시집이다.

『정지용 시집』(1934) 정지용
정지용의 첫 번째 시집. 89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당시 시집이 발간되었을 때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라는 극찬을 받았다. 근대적 체험의 재현, 민요풍의 서정, 종교적 탐구, 일상에 대한 성찰 등 시집은 다양한 성격의 작품을 수록함으로써 언어 예술로서의 시의 가능성을 발현하고 있다. 한국어가 발랄한 감수성과 생생한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증명해 냄으로써 우리 현대시사에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영랑 시집』(1934) 김영랑
김영랑의 첫 시집. 총 53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시문학』과 『문학』에 발표된 것이지만 발표 당시 제목을 없애고 일련번호로만 구분되어 있다. 순수미를 탐닉하고 호사스러운 풍류를 즐겼던 김영랑 시인의 미적 감수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집이다. 한국 현대시가 지닌 심미와 서정의 한 극단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슴』(1935) 백석
백석의 첫 시집. 〈향토적인 동화와 전설의 나라〉를 그리면서도 감상주의나 복고주의에 빠지지 않은 탁월함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발표 당시 100부 한정판으로 나왔던 이 시집은 표지, 종이, 활자, 편집 등에서 세련된 감각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유니크한 시집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망향』(1938) 김상용
김상용의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대표작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비롯하여 27편의 시가 수록된 이 시집은 단순하고 순박한 상상력과 자연적 삶이라는 주제가 잘 조화된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순수한 서정의 세계를 직정적이고 소박한 어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청마시초』(1938) 유치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열렬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청마 유치환의 두 번째 시집. 초기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깃발」을 비롯하여 54편의 시가 담긴 이 시집에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보여 주는 작품도 있고, 백로처럼 날개를 펴는 애수와 허무를 노래한 작품도 있으며, 슬프고도 애달픈 순정을 그린 작품도 있다.

『백록담』(1941) 정지용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시 25편, 산문 8편이 실려 있는 이 시집은 첫 번째 시집인 『정지용 시집』의 시들이 보여 준 감각과 언어 조탁을 좀 더 심화시킨 한편, 동양 고전에서 주로 다루어지던 자연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다만 이때 자연은 관념적 공간이 아니라 생생하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시적 탁월함이 드러난다.

『청록집』(1946) 박목월·박두진·조지훈
<자연 지향>이라는 공통적인 시 세계를 추구하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시를 모은 시집. 이들은 1939년을 전후하여 『문장』을 통해 등단한 젊은 시인들로, 해방의 감격 속에서 공동 시집을 냈다. 시집 제목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으로, 이 때문에 이 세 시인은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이 시집은 해방 전과 해방 후의 한국 현대시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고 새로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의 출현을 알렸다.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
머나먼 저 바다의 수평선 위로
끊지도 아니하고 홀로 가는
언제나 하소연한 나의 꿈……
― 「바다 저편」,『해파리의 노래』

들꽃은
피어
흩어졌어라.

들풀은
들로 한 벌 가득히 자라 높았는데,
뱀의 헐벗은 묵은 옷은
길분전의 바람에 날아돌아라.
― 「들도리」,『진달래꽃』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 「당신은」,『님의 침묵』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지은이 : 김영랑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지은이 : 박목월
1916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부친 박준필(朴準弼)과 모친 박인재(朴仁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고성이지만, 본적지는 경상북도 월성군 서면 모량리(毛良里) 571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영종(泳鍾)인데 동시를 지을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계성중학교 재학 중에 동요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1933년, 윤석중(尹石重)이 편집하던 ≪어린이≫란 잡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이란 여성 잡지의 현상 공모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어릴 적에 누구나 애송했던 이 동요도 목월의 동시인 <얼룩송아지>를 가사로 하고 있다. 목월은 1939년 9월호에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로 첫 번째 추천을, 같은 해 12월에 <산그늘>로 두 번째 추천을, 그리고 1940년 9월에 <가을 어스름>과 <연륜(年輪)>이란 시로 세 번째 추천을 받고 공식적으로 시단에 등단했다. 후세에 남겨진 박목월(朴木月)이란 이름은 목월이 ≪문장≫지에 응모할 때 본인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작명할 때 아이디어는 수주(樹洲) 변영로(卞榮魯)와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에게서 따왔다. 수주의 나무 수 자를 나무 목으로 바꾸고 소월의 달 월 자를 그대로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조국이 해방되자 당시 출판계에 발이 넓었던 조풍연(趙豊衍)은 ≪문장≫의 추천 시인 몇 사람을 묶어 합동 시집을 내면 좋겠다고 을유문화사에 제의해서 ‘자연(自然)’을 공통분모로 시작을 하고 있던 박목월,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등 3인의 합동 시집을 기획하게 되었다. ‘청록집(靑鹿集)’이란 시집명은 목월이 제안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46년 6월 6일, 해방 후에 처음 나온 창작 시집으로 ≪청록집≫이 간행되었다. 1947년 목월은 10여 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에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의 교사로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서울의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으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산아방(山雅房)’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했다. 1950년 6월에는 ≪시문학≫ 창간호를 조지훈, 박두진, 이한직(李漢稷) 등과 함께 발행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창간호는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목월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휴전 후에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다가 1959년 4월 한양대학교에 부임해 1978년 은퇴할 때까지 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1968년에 시인협회 회장에 선임된 이래 작고할 때까지 연임했다. 1955년에 시집 ≪산도화(山桃花)≫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에는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으로 서울시문화상을, 그리고 197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지 ≪아동≫(1946), ≪동화≫(1947), ≪여학생≫(1949), ≪시문학≫(1950) 등을 편집하고 간행했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했다.교수로, 시인협회 회장으로, ≪심상≫의 발행인으로 1인 3역을 감당하던 목월은 과로가 쌓여 갔다. 당시 그는 이미 고혈압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다. 1973년 삼중당에서 ≪박목월 자선집(自選集)≫을 간행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무순(無順)≫을 발간했다. 한양대 교수직에서 퇴임한 목월은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인 1978년 1월, 서울 원효로의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장로 장립을 받은 지 약 두 달 만인 3월 24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뒤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누워 지극히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용인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지은이 : 백석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지은이 : 유치환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아버지 유준수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한문 교육은 이후 그의 시에서 빈번한 한자 사용의 바탕이 되었다. 이후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22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형인 극작가 동랑(東朗) 유치진과 함께 도쿄 교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무렵 유치진이 주도한 토성회(土聲會)에 참여해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6년에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귀국해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27년 20세의 나이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해에 통영 지역 문인회가 간행한 ≪참새≫ 제2권 1호에 <단가(短歌)> 9편을 발표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원에 다녔다. 이해 10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安東) 권씨(權氏) 재순(在順)과 결혼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 구사노 신페이 등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해 형 유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발간했다. 이해에 그의 장녀 유인전이 태어났다. 1930년 유치진의 이름으로 ≪소제부 제1시집≫이 발간되었고 여기에 유치환의 시 <오월(五月)의 마음> 외 25편이 수록되었다. 1931년 24세에 시 <정적(靜寂)>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해에 차녀 유춘희가 태어났다. 유치환은 1932년 평양으로 이주했다.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아 폐업하고 시작(詩作)에 전념하게 되었고, 3녀 유자연이 태어났다. 1934년 다시 부산으로 이주했다. 1935년에는 화신연쇄점에 1년간 근무했다. 1937년 통영으로 이주해서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시 동인지 ≪생리(生理)≫를 부산에서 발행했다. 1939년 12월, 32세의 나이로 첫 시집 ≪청마시초≫를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간행했다. 이 첫 시집에는 <기빨> 외 53편이 수록되었다. 유치환은 1940년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일제의 압박을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는 한편 정미소를 경영했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여러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 북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1945년 광복 직전인 6월에 귀국해 부인은 통영 문화유치원을 운영하고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으며, 8월 15일 광복 이후인 10월에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46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초대 부회장에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수상했다. 이해 6월에 시집 ≪생명의 서≫를 행문사에서 간행했고 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1948년 3월 통영여자중학교를 떠나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1948년 8월에 시집 ≪울릉도≫, 1949년 5월에 시집 ≪청령일기≫를 행문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이주했고 문인구국대를 조직해 육군 제3사단에 종군했다. 1951년 9월에는 문예사에서 종군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1953년 4월에는 ≪예루살렘의 닭≫을 간행했다. 그는 1953∼1954년에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지냈으며 1954년 4월, 47세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10월에 시집 ≪청마시집≫(시집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합본)이 문성당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1954∼1957년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1955년에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경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56년 3월에는 경상북도 제1회 문인상을 수상했으며 1957년 50세의 나이로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57년 12월에 시집 ≪제구시집≫을 한국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58년 2월에는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2월 ≪유치환 시선≫을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1959년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피선되었으며 산문집 ≪동방의 느티≫를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경주고등학교 교장을 사임했으며, 12월에는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를 신흥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60년 12월에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동서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61년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1962년 7월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2월에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1963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이 되었으며, 산문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평화사에서 간행했고, 7월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4년, 57세에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이 되었고 그해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평화사에서 간행했으며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5년 4월에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으며,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1월에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평화사에서 간행했다. 1967년 2월 13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 : 정지용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지은이 : 조지훈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경북 영양 출신으로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과 유노미(柳魯尾)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불경과 참선을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큰사전》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 형성된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연결해 준 큰 시인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한국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만해 한용운을 이어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며 한국 근대정신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경기여고 교사, 동국대 강사,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주요저서로는《청록집》,《풀잎 단장》,《조지훈 시선》,《역사 앞에서》등의 시집과《지훈전집》(《시》,《시의 원리》,《문학론》,《수필의 미학》,《지조론》,《한국민족운동사》,《한국문화사서설》,《한국학 연구》,《채근담》)이 있다.

지은이 : 한용운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지은이 : 박두진
시인.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정지용에 의해 〈향현〉, 〈묘지송〉 등이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민족적 울분과 해방에 대한 소망을 자연과 신앙에서 구하는 시풍에서 출발하여,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영적 성숙을 위한 언어적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적 편력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다.연세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등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상, 동북아 기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청록집》, 《해》, 《오도》, 《포옹무한》, 《수석열전》, 〈박두진 전집〉(전10권), 〈박두진 산문 전집〉(전7권)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다.그의 고향 안성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되살리는 뜻에서 해마다 10월에 ‘혜산 박두진 문학제’가 열리며, 공모를 통해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시상한다.(올해 제13회) 2018년 가을에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296 안성맞춤랜드 내에 박두진문학관이 이전·개관할 예정이다.

지은이 : 김억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지은이 : 김상용
1902년 태어나 보성고등학교, 일본 릿쿄오대학을 거쳐 이화여전에 교수로 제직했다. 1935년 문단에 등장한 이후 자신의 작품 뿐만 아니라 해외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1946년 도미하여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고 이후 구(舊)〈코리아 타임스〉의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목차

해파리의 노래
진달래꽃
님의 침묵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사슴
망향
청마시초
백록담
청록집

  회원리뷰

리뷰쓰기

    이 분야의 신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