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상상인 시선 52권. 정선희 시집. 백지 위에 자신의 마음을 기록하는 동안 시인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마음의 중심인가, 마음의 바깥인가, 아니면 그저 헤맴인가. 정선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의 시가 가장 정확한 자리에서 헤매고 있다고 표현해 본다. 그의 시는 서정적 원리, 즉 세계를 주관화하여 표현하는 수사학적 원칙을 따르지만, 동시에 그의 시는 서정적 배반, 즉 자신의 마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한계 인식에 기초한다. 이 시집에서 도취적 자세가 예외적이라는 바를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시에서 반복하는 것은 단숨에 자기 욕망으로 향하지 않는 우회의 형식, 즉 머뭇거리거나 억누르는 침묵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가족사에 대한 순연한 고백, 더 정확히 말해서 삶에 충실할 수 없게 만든 가족사에 대한 원망과 체념까지 동반하는 자기 고백이 그에 뒤따랐다. 그러나 그러한 아픈 목소리를 곧 이러한 아름다움의 의지와 포개어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선희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자신을 오롯이 비워보려는 것이 아닐까. 시라고 하는 하나의 불길에 마음의 밑바닥까지 장작처럼 내던져 비로소 예술적인 ‘춤’을 이루려 하는 것은 아닐까.시인의 상상 속에서 근본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놓인 것, 끝내 사물화되어야 하는 것은 ‘나’이다. 동시에 ‘나’를 비우고 다시금 획득하고자 하는 것 또한 바로 그렇게 ‘텅 비운 나’이다. 이 시집의 자전적 고백은 끝내 자기 존재를 불살라 하나의 예술적 자유에 이르기를 꿈꾸는 것, 죽음에 가까운 자기 증여의 형식인 셈이다.칸나는 칸나 걱정조화 같은 꽃잎을 손톱으로 꾹 누르자 붉은 비명을 질렀지 좀처럼 지지 않는 칸나꽃이 지기만 기다렸어 칸나 때문일 거야 네가 서둘러 떠난 것은 지겨웠기 때문일까 뜨거운 태양의 지리멸렬, 태양과 칸나 사이의 계절이 너무 좁다고 했지 네가 붉은 옷 속에 그늘을 감추고 다녔다는 소식, 눈물은 나지 않았어 상처를 꾹 누른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진 채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열정을 살았으니까 내가 여기를 떠나야 태양이 질 텐데, 그래야 칸나가 뜨거워질 텐데
새를 바라보는 서쪽의 시간한 몸짓이 생의 단면에부딪히고 있다유리벽에 무성한 나무 그림자와쏟아지는 햇빛 사이로날마다 찾아오는 새의 콩트르주르작은 나뭇가지에 앉아 유리벽을 쪼며창에 엉기는 햇살 서랍에 비밀을 기록하고 있다캄차카와 아무르를 지나새는 유리의 강을 건넌다새가, 나를 닮은 새가바람과 일렁이며 구름 따라 간다투명하고 단단한 경계새는 끝내 유리창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날 것이다추운 곳에서 추운 곳으로 향하는새들의 이동 경로를 이해할 순 없지만해가 천천히 서쪽을 향해 돌아설 때 새의 행로가 경계를 넘어 죽음을 벗어난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선희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시집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엄마 난 잘 울어 그래서 잘 웃어』제20회 모던포엠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