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주희 시인의 시집 『나무 없이는 아무것도』는 감각의 깊은 미로를 거쳐 존재의 진동에 다다르는 한 편의 시적 탐사이다. 나무를 매개로 기억과 통증, 생명과 무의식을 감각적으로 직조하며,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되돌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정서들에 고유한 언어를 부여한다. 감정의 리듬, 존재의 실금, 그리고 어떤 침묵을 따라가는 이 시집은 지금, 가장 예민한 감각의 시선으로 한국 시문학의 새로운 풍경을 열어 보인다.이번 시집은 유기체적 감각과 사유의 나열을 통해 시적 존재론을 구축해가는, 한 편의 커다란 감각의 숲이다. 시집은 네 개의 부로 나뉘어 있으며, 자연, 감각, 역사, 여성, 음악, 도시 등과 같은 이질적인 층위들이 깊고 조용하게 얽혀든다. 이 시집은 시적 주체의 내면 풍경이자, 외부로 향한 긴장된 시선의 응축이며, 무엇보다 ‘나무’라는 근본적 이미지에 기대어 세계와 자신을 동시에 가늠하려는 시적 기획의 흔적이다.어릴 적 집 마당 한구석에 푸르게 익어가던 무화과, 무화과 익을 때면우윳빛으로 터져 나오던 알 수 없는 신음들개미와 부서진 달걀껍데기가 섞인 화단에서당신은 무슨 말인가를 중얼댄다가끔은 화가 난 것처럼하늘로 삿대질하고그러다 히죽대며 붉은 씨방 같은 잇몸을 드러낸다코피가 자주 나던 나는선인장 우린 물을 마셨고남은 물로는 얼굴과 손을 씻었다 행위가 중의적으로 반복될 때사람들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가령미쳤다거나, 들렸다거나지혈제처럼 달라붙는 시선들이집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사람을집요하게 끄집어낸다 눈물은 약간의 탄닌 성분으로 떫고풀어진 녹색의 기류를 포집하는 사람이마당에 서 있다 어쩌다 마당이 전부인 사람배열된 털 가시들이 모두 떨어지는 어린 선인장의 성장인지 비명인지 모를관계없이 자라난 무화과가 끝없이 담장을 넘기며바람은 검게 채색된 덩어리들을 굴리고 있다인디언과 무화과는 멀고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동자는 비어로드킬 당한 날것의 서사를 기억하지 못한다오랜 병구완에 갈급이었는지도 모를 시뻘건 울음주머니를 매단 체여름은 좁은 타원형의 원산지를 가진다― 「인디언 무화과」
교신을 끊으려 자신의 배를 태운 일이 도서관을 꺼뜨렸지요불길은 부두를 삼키고그리스 시집의 알렉산드리아 본을 만들던 연인들은점성술을 익혔지요되감기만 반복하는 먹구름처럼책장의 간격은 좁고 음침하고긴 사다리 끝에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책더미를 잃을 때마다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문헌으로 모여들었지만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어요링 위에 뻗어버린 사자들처럼밤은 양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요원본을 빌려와 다 베끼곤돌려줘야 할 영혼의 안식처커다란 돌 하나에 수직으로 뻗은실금은 무수한 뿌리라 적고월계수 나무는 죽어도 변함이 없는 시라 말해요여름밤 끙끙 앓는 이마를 짚곤나의 대리자처럼 흐느끼는 나무닳도록 읽고 잃어폼페이 기둥처럼 고독하고 위태로운음악가의 밤 산책자의 밤견고한 새의 종교와초사흘이면 물이 어둡다는 기록이 한데 있는 어둠의 구석 칸오래된 관습처럼 누군가 길을 잃어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작가 소개
지은이 : 고주희
2015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나무 없이는 아무것도』, 앤솔러지 『시골시인-J』가 있다. 2023년 제2회 여순 10.19 평화인권 문학상(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