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물민’ 개념을 통해 국민 개념의 확장을 시도한다. 빛의 혁명에는 다양한 직업과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비인간 사물들의 혼성체가 광장의 주권자였다. 그것은 물민들의 광장이었다. 거리의 열기 속에서 쓰인 이 책은 철학적 사고와 현장의 기록을 엮어 촛불과 응원봉 이후 민주주의의 미래를 탐색한다.
출판사 리뷰
빛의 혁명과 제헌활력
“제헌활력은 만들어진 헌정 질서 속에서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국가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2항)는 원칙 아래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제1항)하고 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국민이 헌법적 가치의 원천임을 의미한다. 국민의 구성적 힘이 권력의 실질이며 권력은 그 구성력, 즉 활력이 취하는 형식이다. 국민의 활력이 실질헌법이고, 헌정 질서는 이 활력이 역사적으로 만들어낸 형식이다.
저자는 헌정 질서를 뒷받침하는 이 실질적인 힘, 빛의 혁명에서 발휘된 구성적 힘을 ‘제헌활력’이라고 부른다. 빛의 혁명에서 제헌활력은 응원봉과 피켓을 든 집단정동, 집단지성, 집단상상의 무리로 광장과 거리에서 움직였다. 제헌활력인 시민의 저항권 행사가 없었다면 비상계엄은 성공했을 것이고 헌법은 휴지 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망설이고 있을 때 즉각 파면을 명령하고, 판사 지귀연이 내란 수괴를 석방했을 때 검찰에게 즉시항고를 명령했던 힘이 다중의 제헌활력이다. 이처럼 검찰이나 법원 같은 공적 기관이 사익 기관으로 기울어질 때 그것을 바로 세울 유일한 힘은 국민다중의 공통적 제헌활력에서 나온다. “제헌활력은 국가권력의 원천이며 국가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공통적 구성력이고 살아 움직이는 창조적 힘이다.”
주인을 유령으로 만드는 대의제의 마법
“법치주의적 대의주의에서 국민다중은 형식적으로 국가권력의 원천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국가권력의 피지배자로 나타난다.”
빛의 혁명의 시민들은 서울 여의도, 남태령, 한남동, 광화문, 안국동 등지에서, 광주 금남로, 부산 서면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모여 동시다발 집회를 열었다. 시민들은 주권자로서 국회에는 탄핵을, 공수처와 경찰에는 체포를, 법원에는 구속을, 검찰에는 기소를, 헌법재판소에는 파면을 명령했다. 빛의 혁명의 주요 국면마다 시민들은 헌법적 주권자로서 대의기관을 지휘하는 집단적 명령행동을 벌였다.
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직접행동에 나서야 했을까? 왜 대의권력자들을 압박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 호소해야 했을까? 헌법 제1조 제2항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규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주권은 대의자에게 위임된 상태에 머무르며 직접민주주의의 통로는 차단되어 있다. 이 책은 이처럼 헌법이 어떻게 다중주체성의 현실적 표현을 가로막는지를 문제 삼는다.
대의주의적 국민주권 개념은 국민을 권력의 원천으로 선언하지만 권력의 실체로 설정하지 않는다. 국민은 주인이지만 자신들의 주권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하고 맡기는 사람들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위임의 시간 동안 국가권력의 점유권과 사용권은 대표자들에게 있다. 주인은 형식적이고 선언적인 소유권만 갖고 있다. 주권의 이 형식적 소유권자는 위기의 시기에만 자신의 형식적 소유권을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상이 회복되면 그 소유권은 다시 형식화되며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로 밀려난다.
특히 대의제는 우리를 유권자로 만든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는 주권자가 한 표를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절차다. 선거가 끝나면 유권자들은 대표자의 영웅적 선의에 기대는 존재가 된다. 국민다중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투표의 시간에 주권을 되찾지만 투표가 끝난 후에는 주권에서 멀어진다.
제헌활력의 표현인 직접민주주의는 나라의 평형수다
“국회의원을 의사당으로 달려오게 하고 표결장으로 떠밀어 넣고 경찰과 군대에게 타협과 퇴각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 힘은 시민다중에게서 나왔다. 시민다중이야말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 국가권력을 움직이는 섭정 주체다.”
이 책은 제헌활력의 표현인 직접민주주의가 나라의 평형수라고 말한다. 평형수가 부족한 배는 쉽게 전복된다. 이 비유를 정치에 가져와 보면, 나라가 수구와 보수 쪽으로 기우는 이유는 진보가 약해서라기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평형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평형수가 충분하다면 화물의 무게와 배치가 배를 뒤흔들지 못하듯, 시민의 직접 참여가 충만하다면 정치적 불균형도 쉽게 교정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따르면 좌우, 보수·진보의 대립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내부에 직접민주주의적 활력이 얼마나 또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이다.
이 책은 직접민주주의가 대의주의에 대해 헤게모니를 갖는 섭정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혁명이나 빛의 혁명에서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는 일시적으로 커다란 힘을 발휘했지만, 그것은 일시적, 간헐적, 단속적이었다. 평상시에는 시민의 정치적 관심이 약해지고, 대의권력자들은 통제되지 않은 채 권력을 휘두른다. 직접민주주의라는 평형수가 부족해지는 것이다. 시민은 주권을 위임한 대표자에게 다시 간청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밀려난다. 이 책은 평상시에도 제헌활력의 직접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국민다중은 만들어진 법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라 법들을 집단적으로 발의하고 집단적으로 숙의하고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주체여야 한다(국민발안권). 국민다중은 대표자를 선출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소환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국민소환권, 해임권).
섭정은 여기서 핵심 개념이다. 이 책은 시민다중이 대의권력을 포함한 국가권력을 섭정하는 주체라고 말한다. 사전에서 섭정은 “군주가 통치하는 군주국에서 군주가 아직 어려서 정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거나 병으로 정사를 돌보지 못할 때 군주를 대신해서 통치권을 받아 국가를 다스리던 사람이나 그 일”로 정의되곤 한다. 섭정민주주의는 다중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면서 권력이 자신의 삶의 필요에 맞게 행사되도록 지휘하고 통제하는 민주주의다. 임기 초부터 윤석열 탄핵을 주장하면서 윤석열 정권의 무능, 비리, 부패, 불법을 고발하고, 국회의원을 의사당으로 달려오게 하고, 표결 장으로 떠밀어 넣고, 경찰과 군대에게 타협과 퇴각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 힘은 시민다중의 섭정력이다. 실제로 시민다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 국가권력을 움직이는 섭정 주체다.
극우화와 직접민주주의라는 평형수
“극우화는, 근대사회가 대중봉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구축해온 대의민주주의를 벗어나려는 충동을 함축한다.”
이 책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내란을 전 세계적인 극우화 경향 속에 위치시킨다. 12․3 내란은 친위 군사쿠데타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극우 파시즘이 부상하는 시대의 예외주의적 폭력 흐름의 일부로 볼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 윤석열은 싸워야 할 적의 형상(좌파)을 국민 앞에 제시하고, 자신을 그 적에 맞설 강력한 도구로 포장함으로써 주권을 강탈하려 했다. 극우는 대중의 불안과 분노가 표적을 향하게 하고, 자신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내세운다. 표적은 나라와 정치적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좌파,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 중국, 다문화 같은 집단이 선택된다.
윤석열은 특전사, 수방사, 방첩사, 정보사 등의 군부 내 장성세력, 국민의힘이라는 의회 내 수구세력, 검찰 내의 보수세력, 그리고 전광훈 같은 종교 내 극우 기독교 포퓰리스트 세력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청년 내 남성주의 세력을 동원했다. 극우 유튜브와 같은 디지털 매체가 선동과 행동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최근의 재판 과정은 사법세력 일부도 내란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박근혜나 윤석열, 또는 국민의힘에 투표하지 않고 이른바 ‘진보’ 후보에게 투표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시민들의 경험이 이러한 극우화의 배경에 존재한다는 점을 이 책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좌절의 경험은 파시즘적 감성으로 쉽게 이어지며,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환멸로 나타난다. 극우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직접민주주의라는 평형수의 회복과 확충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빛의 혁명에서 보았다. 법치와 대의를 중심으로 한 87헌법 정신에서의 예외성을 주장하는 내란세력을 타파할 힘이 시민들의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비상대권은 대통령이 아니라 주권자 국민에게 있다
“비상대권은 주권 외에 다른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윤석열과 내란세력은 내란과 재판 과정에서 ‘비상대권’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헌법 제77조 제1항이 규정하는 계엄 발동권은 대의민주주의 안에 숨겨진 예외주의적 특권이며, 군주제적 요소이다. 이것은 윤석열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집권자를 독재로 유혹할 수 있는 예외의 구멍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에 비상대권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상태로서의 비상사태는 독일어에서는 Ausnahmezustand, 영어에서는 state of exception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법의 지배를 넘어설 수 있는 ‘주권의 예외적 능력’을 뜻한다. 대의체제는 우리 헌법 제77조 제1항에서처럼 제헌활력의 대의적 위임 없이 제헌활력을 압류, 강탈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는 예외주의 장치를 헌법 속에 숨겨두고 있다.
헌법에 ‘비상대권’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이 책은 우리 헌법에 비상대권에 해당하는 단어가 명확하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주권이다. 가장 중요한 권력, 주인의 권력,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힘이 주권이다. 주권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sovereignty는 over, upper, super를 의미하는 말에서 나온 단어로서 그 무엇보다 위에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비상하며 그 무엇보다 위에 있는 힘이다. 그것은 만들어진 헌정 질서 속에서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창출하는 힘이다. 저자는 제헌활력이라는 말을 이런 의미에서 사용한다.
비상대권은 헌법 제77조에 근거한 대통령의 권한이 아니라, 헌법 제1조에 규정된 국민의 권력, 즉 주권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야말로 비상대권의 근거다. 그러나 대의제는 제헌활력을 위임하도록 강제하는 체제다. 저자가 보기에 제헌활력을 대의제에 의해 위임당하는가 계엄으로 몰수당하는가의 차이는 정도 차이이지 원리의 차이가 아니다. 따라서 예외주의의 정치적 뿌리는 제헌활력의 섭정 밖에 있는 대의주의 자체에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윤석열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나은 후보를 뽑는 것이기보다는 헌법 제1조가 규정하는 주권이 실질적인 섭정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직접민주주의의 통로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물민(物民)은 광장이 ‘다시 만들 세계’의 새로운 주체성이다
“ ‘물민’은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비생물을 넘어선 다양한 민주주의 정치적 주체성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에서 행동한 헌법적 주권자들은 누구였는가? ‘국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국민 개념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빛의 혁명에는 카페 종업원, 금속노동자, 건설노동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 자폐 장애인,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 퀴어, 전세사기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중국인 2세 노동자, 몰락하는 자영업자, 취업 준비생, 중고등학생, 술집 여자, 가정주부, 회사원, 사회활동가, 농사짓는 농부 등등 다양한 직업과 정체성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 다양성을 담아내기에 국민이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주민, 외국인, 동물, 깃발, 트랙터, 스피커, 스마트폰, 택배 오토바이가 남태령으로 배달해 준 담요, 펄펄 내리는 눈 등등을 추가해야 한다. 광장의 주권자는 인간·비인간 사물들의 혼성체였다. 물민들의 광장이었다.
물(物)은 한자에서 여러 가지 색, 여러 가지 것을 의미한다. ‘물의를 빚다’에서 물의(物議)는 글자 그대로 사물들의 토론을 뜻한다. 영어 thing이나 독일어 Ding도 ‘여러 가지 것들의 회집’을 의미하는 말로 지금도 북구어 계통에서 Ding은 의회, 집회 즉 assembly를 의미하고 있다.
빛의 혁명은 사람, 깃발, 꽹과리, 피켓, 소리, 행진 등 다양한 차원의 물들의 저항적이고 창조적인 결집이었다. 민(民)은 원래 한쪽 눈이 찔려 앞을 보지 못하는 성 밖 노예를 뜻했지만, 오늘날에는 당당한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주체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물민’ 개념이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비생물을 아우르는 다양한 민주주의적 정치 주체성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촛불에서 빛의 혁명으로
“이 책은 나 혼자 쓴 책이 아니다. 나의 신체를 통과한 무수한 시민들의 자기 기록이다.”
빛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의 촛불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전에 레즈(붉은악마)가 등장하고 미선·효순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시위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권에서는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계기로 촛불이 타올랐고, 2014년에는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촛불이, 2016~2017년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이 광장을 밝혔다.
『빛의 혁명 183』의 저자 조정환은 이 모든 사회적 투쟁 현장을 직접 기록하고 책으로 펴냈다. 저서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갈무리, 2003),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 『절대민주주의』(갈무리, 2017)는 그 참여의 기록이다. 공익제보자 윤지오의 증언 진실성을 지지하는 두 권의 책 『증언혐오』(갈무리, 2020)와 『까판의 문법』(2020)은 박근혜 탄핵 촛불봉기 이후 그것의 2차 파도로 일어난 미투와 페미니즘 투쟁에 대한 참여적 기록이자 분석이었다. 『빛의 혁명 183』은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책 제목에 붙은 숫자 ‘183’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내란부터 2025년 6월 3일 조기 대선까지의 183일을 뜻한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집회에 참여했고, 매일 SNS에 글을 썼다. 12월 3일 내란의 밤,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독재 타도, 계엄 철폐, 윤석열 체포를 외칠 때도 저자는 현장에 있었다. “출판인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포고령 3조를 보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빛의 혁명 183』은 이렇게 183일 + α의 시간 동안 저자가 “걸어가며 묻기”(사빠띠스따)의 방식으로 거리와 서재를 오가며 쓴 글들을 바탕으로 한다. 글마다 작성 일시가 본문에 함께 적힌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빛의 혁명에 참여한 한 정치철학자-시민의 기록이자, 빛의 혁명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이다.
혹자는 빛의 혁명을 수사적 표현으로 보지만 나의 경험에 비춰 보면 그것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 이상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실재하는 분노, 외침, 실망, 좌절, 탄식, 재기의 노력, 환호, 환희, 연대, 돌봄의 정동적 순간들로 실재할 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권의 예외주의 파시즘 기획을 무너뜨린 강력한 삶정치의 에너지로 실재한다. 혁명이 정치권력의 교체라는 생각은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낡았다. 혁명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인간, 비인간 다중의 끈질긴 몸부림이고 운동이다. 권력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을 때에도 혁명은 두더지처럼 그 구조물 아래를 파고 들어가 권력이 딛고 선 자리를 비게 만든다. 빛의 혁명은 그런 방식으로 윤석열 정권을 텅 빈 기표로 만들어온 힘이며 그 정권의 반혁명 폭력을 좌초시키고 결국 파면으로 이끈 힘이었다.
― 책머리에
법이 계약적 합의인 한 자본과 그 권력은 원리적으로 법이라 불리는 계약적 합의 밖에 있지 않다. 권력은 아래로부터 다중의 요구와 감시가 약할 때 법 밖으로 나가며 그것이 강할 때 법 안으로 들어온다. 법치주의 권력은 기회주의적이다.
― 1장 탄핵이 다가왔다
무속과 과학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이다. 합리와 비합리 역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제헌활력의 포획, 안정화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 정치는 불안정한 제헌활력을 안정화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포획장치다. 파시즘도 불안정한 제헌활력을 안정화하여 지배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포획장치다. 전후 복지 정치나 역사적 사회주의 정치도 위로부터 제헌활력을 안정화하여 포획하기 위한 당·국가주의 체제로 나타났다.
― 3장 내란을 체포하라
작가 소개
지은이 : 조정환
1956년 경남 진양군 대평면 내촌리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68년 국민학교 6학년 때 아이러니하게도 전교어린이승공회 회장을 맡았다. 진주중학교에 진학했으나 남강 댐공사로 마을이 수몰되어 서울로 전학했다.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으나 군인들이 교문을 지키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학교가 싫어서 자취방이나 다방에서 소설과 시를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연구하던 중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알게 되면서 친구들과 모여 맑스주의 미학을 공부했다. 이후 문학은 노동자·민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민중미학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민중미학연구회> 사건으로 1986년 12월 31일 오후에 남산 안기부로 끌려가 고문당했다. 1987년 1월 19일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는데 소내에서 1월 14일에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서울구치소에서 벌어졌던 재소자인권투쟁 현장이 대학, 대학원보다 더 진정한 학교이고 함께한 동지들이 교수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느낀다. 감옥에서 구상한 노동계급 당파성 문학을 실천하기 위해 1988년 김사인, 박노해, 신은주를 비롯한 여러 문학예술가들과 『노동해방문학』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활동했다. 1990년 10월 30일 전국 지명수배가 되어 1999년 12월 24일 수배해제되기까지 안기부(국정원)의 추적을 받았다. 이십여 년의 기간이 나에게는 1980년대에 가졌던 정통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을 자기비판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었던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1994년경부터는 국가, 자본, 당에서 독립적인 다중의 제헌활력에서 사회혁명의 동력과 지도력을 찾는 자율주의적 관점을 갖게 되었고 갈무리 출판사를 만들어 관련 출판물을 내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호서대, 중앙대, 성공회대, 연세대 등에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와 탈근대사회이론을 강의했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월간 『노동해방문학』 주간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다중문화공간왑>, <다중네트워크센터>, <다중지성의정원>으로 이어지는 집단지성 공간을 만들어 현재 대표 겸 상임강사로 활동 중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분석한 『공통도시』, 21세기 자본주의의 거대한 전환을 다룬 『인지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하에서 다중 누구나가 예술인간으로 되고 있음에 주목한 『예술인간의 탄생』, 대의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섭정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다룬 『절대민주주의』 외에 십수 권의 책을 썼고 수십 권의 책을 번역했다.
목차
책머리에 : 촛불 이후, 빛의 시간 7
1장 탄핵이 다가왔다 ─ 12·3 이전의 혁명적 고양 (2024. 10. 6 ~ 2024. 12. 2) 15
2장 내란을 혁명으로 ─ 빛의 시민의 등장과 탄핵광장 (2024. 12. 3 ~ 2024. 12. 14) 57
3장 내란을 체포하라 ─ 남태령을 넘어 한남동 키세스로 (2024. 12. 15 ~ 2025. 1. 15) 105
4장 아무 일도 없지 않았다 ─ 헌법 속에서의 제헌활력 (2025. 1. 16 ~ 2025. 2. 25) 183
5장 8 대 0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 법치주의 심리와 내란세력의 역습 (2025. 2. 26 ~ 2025. 3. 8) 277
6장 국민이 헌법이다 ─ 파면광장의 한과 꿈 (2025. 3. 9 ~ 2025. 4. 4) 297
7장 대의민주주의라는 난감한 실험실 ─ 정권 교체와 그 너머 (2025. 4. 5 ~ 2025. 5. 8) 401
8장 오래 지연된 과제 ─ 물민다중의 섭정민주주의와 사회대개혁 (2025. 5. 9 ~ 2025. 6. 3) 481
9장 문제는 삶이다 (2025. 6. 4 ~ 2025. 6. 9) 551
맺음말 : 혁명 이후를 사유하기 577
부록 : 파시즘이 도래했다 (해리 클리버 글, 조정환 옮김) 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