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꽃샘바람이 세차던 날, 터벅터벅 산언덕을 오르는 남편의 뒷모습이 무거우면서도 허허로워 보였다. 한 줌 재로 돌아온 동생의 모습에 꺽꺽 기에 질린 눈물을 삼키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가슴이 미어졌다.
남편은 삼 남매였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각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서도 우애 있고 돈독하게 잘 지냈다. 최소한 서방님에게 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방님이 암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 그때는 코로나까지 심하여 자유롭게 면회도 할 수 없었던지라 삼 남매는 생이별이 되고 말았다. 서방님은 병실에서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그리움의 고통까지 감내해야 했다.
동생 생각에 마음을 잡지 못하는 남편과 길을 나섰다. 낯선 듯 눈에 익은 길을 달려 시골 어느 공장 입구에서 차를 멈추라고 했다. 건축할 때 쓰는 시멘트 기둥들이 적재해 있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말없이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던 남편은 무엇을 본 듯 무겁게 입을 떼었다. 이곳이 채광하던 곳이고 저쪽은 광석을 부숴 금을 분리하던 곳이라고 했다. 저 아래 작은 사거리 왼쪽에는 조문 와서 함께 밤을 보냈던 동생 친구의 집이 있었다고 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여기는 우리 집이 있던 곳인데 하며 말끝을 흐리던 눈엔 눈물이 핑그르르 돌기도 했다. 다시 한숨을 몰아쉬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겨울이 되면 눈이 내려 쌓이고 얼음이 얼면 동생과 손을 잡고 언덕마루에 올라 나란히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단다. 두 살 터울 남동생이니 서로 얼마나 개구쟁이였을까. 그때 하늘로 부서진 웃음소리를 혼자서만 느끼는 듯 앞산의 낮은 봉우리에 눈길이 머물렀다. 땅이 꺼져 내릴 듯 깊은 탄식을 쏟아내더니 이내 공장의 사무실 건물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여기에 일본식 일자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고 하며 본인이 아플 때마다 손을 따주시는 등 도움을 받았던 이 씨 할아버지 댁, 친구 창식이네, 형순이네…… 등등 지도를 보며 설명하듯 기억을 토해냈다. 저쪽 저기쯤엔 할머니 채마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잊은 척했던 기억들이 툭툭 올라왔지만 정말 남편에게 소중한 것은 없었다. 남편이 겨우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 할머니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넓은 세상에 삼 남매는 기댈 곳 하나 없게 되었다.
그때의 생생했던 슬픔과 아픔, 칠흑 같은 두려움 등을 가슴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었는데……. 또 하나 묻어두고 싶은 기억에 몸부림치며 동생과의 마지막 정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옆에 있으면서도 억지로 고개를 돌려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직도 생생한 가족들과 행복했던 저 기억의 조각들을 어쩔거나. 가슴속 보이지 않는 남편의 피눈물은 닦고 닦아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동생을 먼저 보낸 남편은 함께 자랐던 그곳에서 마지막 추억을 확인하며 하나하나 조각 난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듯했다. 나란히 등교하던 그 모습을 기억하고 그 시절 추억의 작은 조각들까지 주워 가슴 속 깊숙한 곳에 꾹꾹 튀어나오지 못하게 담는 듯했다. 언제쯤이면 구멍이 뻥 뚫려 찬바람 드나드는 남편의 가슴이 채워질 수 있을까. 아버님도 어머님도 할머니까지 떠나보냈던 곳, 행복했던 기억과 슬픔의 기억까지 많은 조각의 기억을 차곡차곡 가슴에 담는 남편의 뒷모습이 한없이 슬퍼 보였다. 지나간 추억의 조각은 때론 슬펐다가 때로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모두 지난 기억의 조각들이 맑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 <기억> 중에서
난 얼굴보다 손이 예쁜 여인이 더 부럽다. 하얗게 보드라운 살결에 손가락은 길쭉하며 손톱은 단단하고 손톱뿌리는 뽀야니 하얀 반달 모양이 선명한 손, 평생 모래놀이 한번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손 말이다. 농사꾼의 딸이었지만 밭에 나가 풀 한 포기 뽑아보지 않은 내 손은 아버지 손을 닮았다. 손가락이 짧고 두툼하며 투박해 보이고 오른손 손등에는 알지 못할 희미하고 불그스레한 반점이 있고, 어려서 생인손을 앓아 손톱이 빠진 왼손 약손가락까지 누구 앞에 선뜻 내놓기가 힘들다.
빨간 봉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뜨거운 햇살의 극성을 잠시 잊을 정도로 꽃은 곱고 아름다웠다. 난 그 꽃이 피는 여름이 싫다. 친구들은 봉숭아 꽃물을 들이려고 꽃이 필 때를 손꼽아 기다리는데 봉숭아 꽃물을 들이지 못하는 나는 빨갛게 꽃물이 든 친구들의 손이 부럽기만 했다.
어릴 적 여름 방학이면 언니와 사촌들이 모여 봉숭아 꽃물을 들이던 날, 하늘엔 은하수가 물결치고 깔깔대며 즐거웠지만 나는 끝까지 손을 내놓지 않았다. 모두 손톱 위에 찧은 봉숭아꽃을 올려놓고 아주까리 잎으로 손가락을 꼭꼭 싸서 실로 친친 동여매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사위어 가는 모깃불에 생쑥을 한 줌 더 얹어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도록 해주셨다. 은하수도 조는 밤, 집안이 조용해졌다. 밤하늘에 별과 달만 보고 있을 때 모두 물을 들이고 남은 봉숭아꽃 찧은 것을 가지고 방으로 갔다. 난 손이 아닌 발을 내밀고 발톱에 조금씩 올려놓고 언니들처럼 시든 아주까리 잎으로 감싸고 실로 묶었다. 손톱이 아닌 발톱에 물을 들였다.
아침이 되자 언니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떠오르는 해도 웃게 했다. 난 방구석에 숨어서 발톱에 묶은 실을 풀었다. 은은한 붉은색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얼른 언니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발을 내놓고 자랑했다. 언니들은 봉숭아 꽃물은 손톱에 들이는 거라고 조롱하듯 더 크게 웃었다. 내 마음도 모르는 언니들이 미웠다. 나는 돌아서서 울음을 터뜨렸다. 요즘은 발톱도 손톱처럼 예쁘게 꾸미고 발찌까지 하고 다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맨발로 다니면서도 여자들은 발을 누구 앞에서 함부로 내놓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나도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싶었다. 하나 못생긴 약손가락 때문에, 부끄러워 손가락에는 들이지 못하고 발가락에 물을 들인 것이다. 얼마나 부러웠으면 어린 마음을 생각하니 키득 웃음이 난다. 이젠 발톱에도 꽃물을 들이지 못한다. 각질 뿌옇게 일어나는 나이 먹은 할머니 발도 보기 싫다. 그냥 고운 추억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 생엔 나도 예쁘게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첫사랑을 기다려 볼 것이다.
-〈꽃물〉중에서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또 무엇일까.
먹먹한 가슴에 묻고 또 물어보았다. 내 가슴이 느낀 감정을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감정이 눈물 되어 흘러내렸다. 나도 이런 가족의 깊은 사랑을 직접 느껴본 적이 있다. 벌써 이십 년이 넘었나 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중환자실에 계실 때였다. 통증에 시달리시던 어머니는 점점 삶의 끈을 놓아가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심한 통증의 고통을 이겨낼 힘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었다. 저녁 면회 시간이 되어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물로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가 이 편지를 읽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가족이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울다가 편지를 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 되었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무사히 밤을 보내주셨다. 이른 출근 시간 때문에 일찍 면회를 부탁하여 눈도 뜨시지 못하는 어머니께 편지를 전해드리고 눈물로 출근했었다. 학교에서도 마음이 초조하여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긴 하루를 보내며 퇴근 시각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종일 애를 끓이다가 왔는데 먼저 면회를 마친 큰오빠가 밝게 웃으며 나왔다. 무슨 상황이지 의아해하면서 중환자실로 들어서니 사경을 헤매시던 어머니가 우리를 알아보고 빙긋이 웃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간호사에게 물으니, 눈물로 쓴 편지 덕분이란다. 어머니 침상 머리맡에는 편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아들들도 며느리들도 딸, 사위 손주들까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밤새워 편지를 써 왔던 것이었다. 눈도 뜨시지 않던 어머니께 간호사가 옆에서 읽어 드렸단다. 그 편지 내용을 듣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던 어머니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셨나 보다.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버팀목이 되고 자식의 사랑은 부모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니 어찌 사랑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 힘이 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가 있는가 보다. 방송을 보면서 끈끈한 가족 간의 사랑을 한 번 더 느껴보며 마법 같은 사랑의 힘 때문에 부모 형제가 그리운 아침이었다. 남자 친구를 위하여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그 여인은 천사처럼 보였다. 천사의 노래를 들으며 세상은 아직 살아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사랑은 힘이 되고 행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마법 같은 사랑의 힘은 아픔의 고통도 슬픔도 구제가 되는 것 같았다.
-〈사랑〉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오명옥
· 충청북도 청주 출생· 푸른솔문학 신인상 등단(2021년) · 푸른솔문학회 회원· 수상 : 제9회 푸른솔문학 카페문학상 제9회 우리 강산 푸르게 우리 숲 이야기 공모전 대상 제16회 백교문학상 수필 〈봄동〉대상 정은문학상(2023년) · 저서 : 수필집 《아버지의 향기》,《노을의 기억 속에》 공저 《청솔바람소리》, 《눈밭에 핀 글꽃》 외 다수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기억
남편
나이 듦이란
기억
알밤
어머니
청보리
인생의 속도
꽃물
바가지
김장
제2부 동행
사랑
다방과 전설의 고향
길어깨
칫솔
뻐꾸기
시샘달
수건
유통기한
친구
물
제3부 위로
랑카위의 저녁노을
구슬붕이
형제
산지미냐노
초대
아까시꽃
수상가옥
인생은
연주회
물오름달
제4부 추억
모교
시험
감잎
흙 그리고 물과 바람과 불
나들이
그림자
지구의 몸살
양동이
산불
가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