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볼 수 있지만 생각하기 어려운 일’처럼
상처 속에서도 피어나는 다정한 빛으로
우리는 끝까지 서로를 비추며 살아가리라
두 뼘 정도 그늘진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한쪽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해 보았다. 왼쪽 눈을 감을 때와 오른쪽 눈을 감을 때마다 아이스크림콘 너머의 풍경이 이쪽저쪽으로 이동했다.
눈앞의 콘 하나가 아파트 몇 개 동을 가리기도 하고 그다지 멀지 않은 학교 건물을 감추기도 했다. 순삭,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삭제해 버리는 것. 전능자가 있다면 순삭 시스템에 너의 머리를 맡기고 싶어졌다.
―「개미 바다」 중에서
가끔 그때의 침묵을 생각한다. 언제나 명랑하고 말이 많던 올케가 어떻게 그런 침묵을 견뎠을까. 이를 대비해서 부부가 사전에 연습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 집 근처에는 열차역이 있다. 걸어가서 열차를 타고 세 번째 역에 내리면 걸어서도 십 분이면 아버지 집에 갈 수 있다. 이 집에서 저 집에 가는 것은 늦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올케는 한 번도 혼자 그런 방문을 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냉장고를 떠올렸다. 반찬 하나 없이 500그램이라 쓰여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새우젓갈. 속이 보이는 플라스틱 통은 빨간 뚜껑을 하고 냉장실 중앙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먹을 반찬이 하나도 없어서 장날 버스 타고 가서 사 왔다고 했다. 그 말에 피가 끓었다. 너무 화가 났고 동시에 미안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당번을 정해서 밑반찬과 대청소하기로 했던 약속을 동생들이 지키지 않았다. 아직 건강하고 밭일도 많았던지라 아버지의 식욕이 왕성했던 때였다. 지금도 새우젓만 보면 아버지의 빈 냉장고와 유독 반찬을 잘 만드는 올케가 생각난다. 그리고 상상한다. 이런저런 반찬을 싸 들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예쁜 아버지의 며느리를.
―「볼 수 있지만 생각하기 어려운 일」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류이경
한국소설가협회 회원대전작가회의 회원호서문학 회원대전소설가협회 회원소설집『붉은 나무의 언어』『볼 수 있지만 생각하기 어려운 일』
목차
작가의 말 … 2
볼 수 있지만 생각하기 어려운 일 … 6
우리들의 애도 방식 … 34
완벽한 팀웍 … 58
개미 바다 … 82
검은 하늘 … 105
후숙 … 131
옴파로스 가는 길 … 159
주문 … 182
동굴 밖 동굴 … 207
꽃물 드는 저녁 …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