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4년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한 조미해의 첫 소설집은 밀도 높은 심리 묘사와 응축된 상황 설정을 통해 일상의 환부를 정교하게 드러내는 7편의 단편을 담았다. 「비 내리는 밤에 우리는」을 비롯한 작품들은 단일 사건 속에서 죄의식, 상실, 부끄러움 같은 내면의 파동을 집약해 극적 긴장과 몰입을 이끌며 조미해 문학의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스카라」 「남태평양에는 쿠로마구로가 산다」 「선을 지키는 일」 등은 가족·관계·욕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응축해 21세기 한국 사회의 욕망 구조와 균열을 비판적으로 포착한다. 삶과 죽음, 경계와 침범, 경쟁과 생존을 둘러싼 심리를 다층적으로 드러낸 이 소설집은 단편 형식의 힘과 동시대적 감각을 고스란히 증명하며 새로운 서사적 감수성을 제시한다.
출판사 리뷰
2024년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한 조미해의 첫 소설집. 밀도 높은 심리 묘사와 낯선 상상력으로 우리 시대의 환부를 정치하게 그려낸 7편의 소설이 실렸다.
「비 내리는 밤에 우리는」은 무더운 9월의 끝자락 영숙 부부의 집으로 시공간적 정황을 집중한다. 딸 소연과 사위가 모처럼 방문해 저녁식사를 함께하게 되는바, 소연 부부는 영숙 부부에게 둘의 결별을 짐작하게 하는 소식을 알린다. 그 결별은 소연 부부가 아들 지민을 잃은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소연 가족이 물놀이 휴가를 갔을 때 마침 영숙이 건 전화를 받느라 지민이 급류에 힙쓸려 간 것이다. 지민의 죽음은 할머니 영숙에게도 원죄다. 따라서 소연 부부의 불안한 결별 소식에 영숙은 죄의식을 면치 못한다. 영숙 부부는 지민이 좋아하던 오리 인형을 발견하고 비 오는 밤에 그것을 인공 연못에 띄워 보냄으로써 애도한다. 「비 내리는 밤에 우리는」은 이처럼 영숙의 손주 지민의 운명적인 죽음이라는 사건을 내세워 그로부터 일어난 몇몇 에피소드를 아우르면서 그 해결의 장으로 나아간다. 이때 이 소설은 사건의 발생과 결과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하나의 상황에 응축함으로써 극적 긴장과 심리적 몰입을 가능하게 했다. 조미해의 소설은 이처럼 단편소설 특유의 응축성을 유지함으로써 독자를 흡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응축성은 다른 소설에서도 거의 고르게 유지된다. 「마스카라」는 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나’)의 샵에서 ‘나’의 어머니 장례 때 사자(死者) 메이크업을 담당한 장례 메이크업 아티스트(문주연)에게 행하는 신부 화장에 상황을 응축한다. 「남태평양에는 쿠로마구로가 산다」는 어느 날 한밤중의 ‘나’ 앞에 바다로 나가 실종된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오십대 남자가 나타나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집중한다. 「선을 지키는 일」은 새로 이사 온 이웃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가 겪은 이전의 불쾌한 ‘선 넘기 당한 경험’을 상기한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는 아들 한들의 고교 졸업식에 참석한 엄마 정연의 불안한 한나절을 다루고 있다. 「더미」는 쌍둥이 언니가 죽자 자신이 죽은 걸로 처리하고 언니를 대신해 주체적으로 행동에 나선 쌍둥이 동생 영화(나)의 당당한 하루에 집중한다. 다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시간적 응축은 덜한 대신 한 아이(서준)가 담임선생(나리)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부리는 통제되지 않은 행동들에 초점을 맞춘다.
조미해 소설의 이러한 응축적인 플롯은 물론 서사의 밀도를 높이고 독자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얻는 주제적 효과는 소설마다 남다른 결을 유지한다. 이를테면 「비 내리는 밤에 우리는」은 실수로 딸 부부의 행복을 파괴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내적 고통을 드러낸 소설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한 아이의 집착적 행동을 통해 부끄러운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질문을 드러낸 스토리다. 「남태평양에는 쿠로마구로가 산다」는 실종된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드러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마스카라」는 삶과 죽음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지위에 해당하지만 삶은 결국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며,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여정이라는 의식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선을 지키는 일」,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더미」 등은 무엇보다 인간이 자본주의적 구조 내에 생존하면서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주제에 가닿는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이 소설들은 대체로 삶의 목표에 관한 진정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 질문은 단순히 인간은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지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등장인물이 처한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사는 문제와 깊이 관련을 맺는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에서 ‘한들의 의대 진학’이라는 지상 명제에 매달리는 정연 남편의 욕망은 사실 개인의 욕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날 졸업식을 참관한 모든 부모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그것은 21세기 한국 사회 전체의 욕망의 구도를 그대로 닮아 있기도 하다. 작가 조미해는 이런 욕망의 구도를 한들 가족으로 응축해 드러내면서 그 문제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나아가 아버지의 요구에 한들이 맞서고 마침내 정연마저도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로 맞서는 과정을 통해 욕망의 노예가 된 사회를 정면에서 비판해 보인다.
「더미」에서 ‘나’는 쌍둥이 언니 영주가 출세를 위해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 영주는 분장감독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대리인이었지만 그 수모를 견디며 특수분장사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다 좌절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이를 알아낸 ‘나’의 행동은 자못 특별하다. 도덕적인 기대대로라면 ‘나’는 영주의 죽음의 원인이 분장감독의 과도한 폭력에 있었음을 밝히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분장감독의 그러한 약점을 빌미로 그의 욕망에 더욱 충실해지는 길을 택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출세를 위한 욕망의 지배 구도가 얼마나 완벽한지 증명하는 사례가 될 만하다.
이에 비해 「선을 지키는 일」은 좀 특별한 스토리로, 이러한 욕망의 지배 구도에 대해 증명해주는 소설로 읽힌다. ‘나’는 집에 놀러 온 동년배의 이웃집 여성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그 이전 그 집에 살다가 이사 간 여성 유라 씨가 보인 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친구 부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유라 씨는 ‘나’와 같은 옷, 같은 스카프를 하고 나타난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모욕감과 분노를 느끼고, 결국 와인을 유라 씨의 옷과 스카프에 일부러 쏟는다. 화를 감추지 못한 유라 씨도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나’의 남편 진규는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나’를 나무란다. 유라 씨는 또 그 이전에 ‘나’의 시부모 생신날 예고 없이 집으로 방문해 청하지도 않은 케이크 선물까지 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한 적도 있다. 유라 씨는 그에 그치지 않고 ‘나’와 친한 척하면서 ‘나’의 옷차림, 취향, 말투, SNS 활동까지 따라 하며 점점 ‘나’의 삶을 침범해 들어온 인물로 그려져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며칠 뒤 예정된 유라 씨 부부와의 해맞이 여행도 유라 씨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무산된다. 뒤이어 도착한 유라 씨의 카톡 메시지 “그날, 제게 왜 그러셨어요?”(와인을 쏟은 일)는 화자의 감정을 더욱 뒤틀리게 만든다. 이후 유라 씨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이사를 간다. 화자는 상실감과 당혹스러움을 안은 채 유라 씨에게 여러 차례 메시지를 남기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한다. 유라 씨에게 상처 입은 ‘나’는 그 사실을 모두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 내용은 주로 ‘서로의 관계에서 선을 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특히 유라 씨가 그 선을 넘은 행동을 보여 몹시 불쾌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도 유라 씨와 유사한 경험을 저지른 존재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얘기에 여전히 관계의 경계가 무너진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채 “결혼 후 맞는 두번째 크리스마스도 망쳐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유라 씨의 선 넘는 침범을 받고 상처를 입었으며, 이웃집 그녀의 고백을 통해 다시금 ‘선을 넘는 일’의 불쾌한 기억 속에 젖지만 ‘나’ 역시 실은 자기만의 ‘아비투스’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나’가 좋아하는 와인을 정해놓고 마시고 남편에게나 이웃에게나 자기만의 선물을 고집하는 등의 일련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내면화된 습관과 성향의 체계 속에서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한 예가 된다.
조미해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단편소설로서 강한 응축력을 자랑한다. 편편이 자잘한 에피소드를 거느리고 있지만 대개는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상황을 밀고 나간다. 특히 단편소설이 발생학적으로 자본주의적 욕망이 가져다준 여러 병폐에 대한 비판을 내재화한다는 점에 대한 각별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다. 집중된 상황에 놓인 인물의 심리적 묘사를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낳고 그로부터 독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조미해
2015년 평사리문학대상, 2016년 경북일보문학대전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2년과 2024년에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공동소설집으로 『카페인 랩소디』 『쓰는 사람』이 있다. 2024년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더미 7
선을 지키는 일 39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71
남태평양에는 쿠로마구로가 산다 103
마스카라 131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159
비 내리는 밤에 우리는 189
해설 욕망의 지배 구도 | 박덕규 218
작가의 말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