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신은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신의 계시를 마주할 인간이다.”
신의 침묵 속으로 파고드는 경청과 주의, 초월에 관한 성찰
2025년 ‘스페인의 노벨상’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수상 철학자 한병철 최신작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20세기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시몬 베유의 통찰력 넘치는 사유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몬 베유에게 매료되고 ‘영혼의 우정’을 느끼게 된 그는 베유의 주요 텍스트를 오늘의 상황 속에서 다시 읽어내면서, 소비와 생산의 세계에서 상실한 초월성, 위로부터 오는 힘인 ‘신’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우리를 쉼없는 생산과 소비, 정보와 소통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드는 ‘성과사회’, ‘중독사회’의 치유책을 제시하며, 무의미와 존재 결핍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을 꿈꾸게 한다. 시공을 뛰어넘어 두 철학자가 공명하며 연주하는 우아한 철학적 이중주라고 부르기에 손색없다.
위로부터 오는 압도적인 힘, 신에 관하여신작 《신에 관하여》에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제목 그대로 오늘의 철학이 관심 두기를 썩 내켜하지 않는 대상, 바로 ‘신’이다. 이에 관해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얼마 전에 시몬 베유가 그의 안에 들어왔고, 그의 영혼 안에서 베유는 그가 이제껏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던, 그러나 늘 그야말로 절실하게 품고 있던 무언가를” 거론했노라고. “위로부터 온 힘, 나보다 더 강한 힘, 성 프란체스코가 자주 기도한 곳인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에서 시몬 베유를 무릎 꿇린 힘”을 자신 역시 감지했다고. 그리하여 한병철은 시몬 베유에게 “영혼의 우정”을 느끼고, 그녀의 사상을 사용해 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생산과 소비의 내재 너머 저편에, 정보와 소통의 내재 너머 저편에 더 높은 실재가 있음을, 의미를 깡그리 상실한 삶으로부터, 한낱 생존으로부터, 고통스러운 존재 결핍으로부터 건져내고 우리에게 행복한 존재 충만을 줄 수 있는 초월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영혼, 시몬 베유잘 알려진 것처럼 시몬 베유(1909?1943)는 프랑스의 철학자, 노동운동가, 레지스탕스 활동가, 신비주의 사상가이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2세에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해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공장에 취업해 일하며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아나키스트 부대에 합류하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의 프랑스 망명정부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영국 애슈퍼드의 요양원에서 요양하던 중 서른넷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시몬 베유의 사상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신”(알베르 카뮈), “금세기 최고의 영성작가”(앙드레 지드), “그녀의 영혼은 그녀의 천재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숭고하다”(T. S. 엘리엇)와 같은 평가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2020년대 들어 시몬 베유의 저작이 속속 새로이 번역 출간되며, 그에 대한 관심이 모이고 있다.
삶을 다시 아름다움과 의미의 빛 속으로 불러들이는 길을 찾아서한병철은 시몬 베유의 대표작이라 할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리며》, 그리고 여러 권의 《비망록》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베유의 급진적이고도 근원적인 사상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절실히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가 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옹호하거나 해명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과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 놓일 수 있는지,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을 사랑하며 신을 향해 어떻게 상승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역설적 진실을 시몬 베유의 말을 빌려 이야기할 뿐이다. 저자는 베유의 중요한 철학 개념인 ‘탈창조’와 ‘빈자리’에 관하여, 그리고 저자 자신이 오랜 시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온 ‘주의’, ‘고요’, ‘아름다움’, ‘아픔’, ‘무위’에 관한 사유를 전개하며, 이를 통해 삶을 다시 아름다움과 의미의 빛 속으로 불러들이는 길을 모색한다. 따옴표를 제하고 볼 때, 이 책에는 둘 중 누가 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장이 많다. 시몬 베유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 사이에 8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인데, 시몬 베유의 사상이 그만큼 현대적이라는 말도 된다. 읽는 이로서는 시공간의 거리를 뛰어넘는 두 철학자의 사상적 공명, 문장과 문장의 어우러짐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종교의 위기를 짚어내고 삶의 승화를 말하는 매력적인 문장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예리한 진단, 매력적인 아포리즘이 책 전체에서 빛을 발한다. 밑줄 그을 만한 문장이 가득한데, 특히 종교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여러 독자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는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신앙하는 내용의 타당성 상실 혹은 교회의 신뢰 상실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우며, 오늘날 만연한 주의력의 상실, 디지털 세계에서 대폭 강화된 자아, 고요의 상실과 같은 것이 그 구조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창조성의 위기, 아름다움의 위기, 예술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 삶의 위기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겨냥하는바 아름다움과 예술, 기술, 학문, 노동, 인간의 삶을 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신령하게 승화할 수 있으려면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와는 사뭇 다른 것, 이를테면 자기 비움이, 예식이, 겸손이, 순종이, 존재의 고요가, 무위가 필요하다.
마침 이 한국어판이 출간되는 시점은 분주하게 보낸 한 해를 돌아보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삶,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희구하게 되는 때다. 기독교에서는 성탄절 전의 ‘대림절’, 즉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피상적 삶 이상을 꿈꾸는 독자들이 현 시대의 문제들과 신과 종교, 초월에 대한 생각을 담아낸 이 책에서 오래 생각할 거리를 발견하고, 존재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되기를 기대한다.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단순히, 특정한 믿음 내용들이 타당성을 상실한 탓으로, 우리가 더는 신을 믿지 않는 탓으로, 또는 교회가 신뢰를 상실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이유들이 신의 부재를 일으킨다. 한 가지 이유는 주의(注意)의 몰락이다. 종교의 위기는 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기와 듣기의 위기인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단순히, 특정한 믿음 내용들이 타당성을 상실한 탓으로, 우리가 더는 신을 믿지 않는 탓으로, 또는 교회가 신뢰를 상실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이유들이 신의 부재를 일으킨다. 한 가지 이유는 주의(注意)의 몰락이다. 종교의 위기는 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기와 듣기의 위기인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