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하녀, 공장노동자, 지방 도시의 연금 생활자,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은 서민 여성, 나의 어머니
노동계급 가족을 떠나 지식인이 된 아들이
평생 한 계급에 머물렀던 어머니의 삶을 통해 보는
나이 듦과 인간 주체의 취약성, 연대의 문제어머니의 예기치 못한 죽음에 맞닥뜨린 에리봉은 그로 인해 자신이 흘린 눈물이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 말하기 위해, 나아가 어머니를 위시한 노인들의 모든 주름, 모든 고통, 모든 신음에 담긴 ‘정치적인 것’을 밝혀내기 위해 애쓴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산물이다. 「옮긴이 해제」에서
게이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재발명’하기 위해 노동계급 가족을 떠났던 한 사회학자의 치밀한 자기 분석으로, 프랑스는 물론 국내 지식 장과 일반 독자층의 고른 지지를 얻었던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의 신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2023)이 그것이다.
에리봉은 전작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오래 떠나 있던 고향 랭스를 방문하면서 노동계급 정체성이 게이라는 성 정체성과 복잡하게 교차하며 자신을 규정해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과거와 가족의 사회적 궤적을 냉철하고도 섬세하게 회고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철학적, 사회학적, 정치적 분석을 독특한 방식으로 자전적 이야기와 연결하면서 사회구조와 현실을 명석하게 규명했다”(2024 베를린 아카데미상 선정 이유)라는 평은, 또 하나의 자기 분석이라 할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에도 대입 가능하다. 다른 점이라면, 이 책에서는 에리봉 자신이 아니라 제목이 나타내듯 “어느 서민 여성,” 즉 자신의 어머니를 중심인물로 하는 사회적 전기를 써 내려간다는 데 있다.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에서 저자는 평생 노동계급의 일원으로 머물렀던 어머니의 삶을 술회한다. 특히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요양원에 입소한 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맞게 된 어머니의 죽음은 에리봉에게 노년과 취약한 주체, 돌봄과 연대의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저자가 마주한 것은 인간으로서 피해갈 수 없는 질병과 고통받는 몸, 노화와 자율성의 상실, 열악한 공공 보건과 요양원의 현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같은 문제들이다. 하나같이 무겁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하기 어려운 이 문제들을 에리봉은 자기 어머니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여러 책과 영화 텍스트 등을 참조해가며 진중하게 논의한다. 자기 어머니에 관한 개인적인 회고담에서 출발하면서, 저자는 ‘프랑스 노동계급 여성의 전형적 일생’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를 거쳐 다시 ‘노년’과 ‘노인’이라는 사회적 범주, 나아가 늙음과 장애를 숙명적으로 겪는 인간 주체의 취약성과 연대에 관한 이론적 성찰로 이야기를 확장해간다.
어머니에 관한 사회적 전기
계급과 젠더, 나이 듦과 몸의 취약성에 대하여과거의 그 무엇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망각 속에 사라졌다 해도, 예속화assujettissement의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은 살아남는다. (p. 46)
1930년대 프랑스에서 태어난 에리봉의 어머니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랐고, 열네 살에 하녀가 되었으며 이후 가정부와 공장노동자로 일했다. 스무 살에 수공 노동자와 결혼해 55년간 함께 살았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스무 살에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하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것에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홀로 자유로워졌”(p. 44)다고 느꼈다. 가난한 여성이었던 자신에게 가로막힌 모든 기회와 경로를 그저 공상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공장노동자로서 오랫동안 노조원으로 지냈다. “언제나 파업 명령에 따르고, 조업 중단과 공장 앞 집회에 참여할 의향이 있었”(p. 234)을 만큼 정치화되었지만 노조(와 활동가들)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않았으며, 나이 들어 집단 소속감과 정체성을 잃고 고립된 뒤로는 “‘좌파’가 환기하는 모든 것, ‘좌파’와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가 너무나도” 커진 나머지 “좌파에 대항하기만 한다면 덮어놓고 아무에게나 투표할 준비가”(p. 231) 되기라도 한 듯 극우 정당에 표를 던졌다. 더구나 백인 노동자 공동체 내에서 거리낌 없이 표출되던 인종주의는 어머니와 에리봉 사이에 시시때때로 균열을 만들었다. 이처럼 우파 또는 극우파의 판본에도, 좌파의 판본에도 꼭 들어맞지 않았던 노동계급 여성으로서 어머니 삶의 복잡성에 관해 에리봉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기술한다. 그로써 프랑스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와 정치적 우경화가 어머니의 정신과 신체를 노년에 어떤 식으로 파괴했는지 규명한다.
어머니는 예산 삭감에 시달리는 참담한 환경의 공공 요양원 시설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다가(적어도 스스로 그렇게 믿다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했다. 이 극단적 상황은 에리봉에게 다시 한번 집단의 구성에 관한 이론적 질문을 일깨우는 기회로 작용한다. 다만 그 질문의 구체적 형태는 『랭스로 되돌아가다』와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해체와 재구성이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주요 쟁점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노인 집단’의 정치적 구성 (불)가능성이 핵심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노인은 누군가 그를 위해, 그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말하기 어려운 집단이다. 따라서 에리봉은 ‘노인’을 정치적 ‘집단’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지니는 ‘우리’로 (재)구성하고 조직하려면 대변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대변인의 매개를 통해 노인 개개인의 흩어진 말, 억눌린 불평, 숨죽인 울음이 사적 영역을 떠돌다 휘발되지 않고, 공론장에서 집단적 목소리로 울려 퍼지며 정치적 결집과 운동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변인은 집단을 대표할 권리를 누구에게 어떻게 위임받는가. 대표 행위의 자격과 철학적·정치적 의미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어긋나면서도 이어져온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끈질긴 이해의 시도를 거듭하며 써 내려간
어머니에 관한 사회적 전기어머니를 계속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 (p. 183)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의 중심인물이 에리봉 자신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이 책에 다른 결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는 어머니를 제삼자의 시점에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어머니는 결국 자기가 아닌 타자이며, 더욱이 저자는 30년 가까이 가족과의 교류를 끊은 채 매우 상이한 지역적·계층적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이는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의 글쓰기가 자기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스스로와 밀접하게 얽혀 있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그것이 수반하는 어려움을 감수하는 작업이었으리라는 점을 환기한다.
에리봉은 어머니와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고, 그 경험의 조건들을 객관화함으로써 어머니를 향한 끈질긴 이해의 시도를 이어나간다. 일례로 에리봉은 자신과 어머니가 언어나 여러 미디어와 얼마나 다른 관계를 맺었는지 기술하는데, 그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계급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일원으로서 어머니의 몇몇 특징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에리봉에게 (게이이자 계급 탈주자인) 자기와 (여성이자 지방민, 과거 노동자였으며 나중에는 노인이 된) 어머니의 비교는 서로의 소수자적 위치를 비춰주는 정신적 거울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소수 집단을 낙인찍고 열등화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객관화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이 사회학적 시선 아래 어머니의 특징은 에리봉 자신의 것만큼이나 일정하게 ‘이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에 나타나는 끈질긴 이해의 시도와 그 가능성의 확장은, 자기에 관해 사회적 전기를 쓰는 일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일궈낼 수 있는 중요한 성취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어떻게 그녀는 삶을 바꾸려 들지 말자고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 차라리 이렇게 자문해보자. 혼자서 살아가려면 부딪혀야 할 갖가지 문제들이 지닌 무게, 또는 그저 슬픈 운명처럼 보이는 것 앞에서의 체념은, 어떻게 어머니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를 마침내 포기하도록 이끌었는가?
알다시피 우리는 같은 방으로, 어쩌면 같은 요양원으로 오게 될 것이다. 어찌 됐든 그 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차를 타고서? 게다가 난 아이도 없는데 누가 데려갈까? 반려자나 아니면 나보다 어린 내 친구들? 의사가 급하게 보낸 구급차 운전수와 간호사들일까? 앞에 있는 이에게 “두고 봐요,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자리에, 즉 우리가 안심시키려고 헛되이 애쓰는 이 타자의 자리에 놓일 순간을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진실을 듣는 편을 택하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