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신예작가 박진희의 소설집 『투이의 가방』은 오늘의 한국소설이 쉽게 선택해 온 감정의 통로를 의도적으로 비켜 선다. 연민이나 고발, 구원의 서사 대신 ‘사건 이후에 남겨진 상태’를 끝까지 견디며 서술하고, 남겨진 사람과 노동, 사물과 시간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지 않는 거리감은 결핍이 아니라 이 소설집이 도달한 중요한 성취다.
표제작 「투이의 가방」을 비롯해 「고독한 흔적들」, 「목화솜 이불」, 「우려내기 좋은 호랑이 이야기」까지, 작품들은 설명과 판단을 최소화한 채 장면과 사물의 잔존으로 세계를 드러낸다. 노년, 농촌, 이주 노동, 지역 사회를 다루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결론을 제시하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남겨 둔다. 단정하고 과묵한 문체로 질문 이전의 상태를 견디게 하는 이 소설집은, 동시대 한국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한 지점을 조용히 증명한다.
출판사 리뷰
신예작가 박진희의 소설집이 청색지소설선 8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설집이 도달한 가장 중요한 성취는 오늘의 한국소설이 너무 쉽게 선택해 온 감정의 통로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는 데 있다. 연민도, 고발도, 구원의 서사도 이 책의 중심에는 없다. 대신 이 소설들은 “남겨진 상태” 그 자체를 끝까지 견디며 서술한다. 남겨진 사람, 남겨진 노동, 남겨진 사물, 남겨진 시간. 이 소설집은 사건을 말하기보다 사건 이후에 남은 잔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책이다.
이 잔여에 대한 태도가 이 소설집의 태도를 결정한다. 작가는 불쌍함을 동원하지 않고, 제도를 고발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피해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동안 형성된 언어와 습관, 판단의 방식 속에서 움직인다. 그 결과 독자는 감정적으로 몰입하기보다 계속해서 불편한 거리 위에 머무르게 된다. 이 거리감은 결핍이 아니라 성취다.
표제작 「투이의 가방」은 이 소설집의 자세를 가장 정확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투이라는 인물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서사는 설명되지 않고, 증언되지 않으며, 대신 부재로만 감지된다. 그러나 이 침묵은 시스템 전체를 말하게 하는 장치다. 투이의 말 없음은 곧 한국 농업 현장, 불법 체류 제도, 고용의 관행, 일상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한 씨의 말들은 악의가 아니라 생활의 문법이며,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잔혹하다. 가방은 상징으로 과잉되지 않으면서도 끝내 버려지지 않는 잔여로 남는다. 이 사물의 잔존은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태도를 대표한다.
「고독한 흔적들」에서 노년은 회고나 비애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결과물로 제시된다. 이 작품의 탁월함은 노인의 삶을 ‘마지막 단계’로 정리하지 않는 데 있다. 노인들은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아왔고, 그 삶은 어떤 의미를 부여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조차도 사건이 아니라 조건으로 다루어진다. 특히 삶을 정리하지 않는 태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결말은 이 소설집이 윤리적 판단을 얼마나 철저히 거부하는지를 보여준다.
「목화솜 이불」은 농촌 청년 서사를 둘러싼 오랜 관습을 무너뜨리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귀농의 실패담도, 지역 소멸의 고발도 아니다. 대신 정책, 제도, 간담회, 서류 같은 구체적인 현실의 층위를 세밀하게 통과한다. 목화솜 이불은 상징으로 떠오르기보다는 버려진 수확을 다시 사용하는 생활의 기술로 존재한다. 이 기술적 감각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다. 생존은 의미가 아니라 방식으로 나타난다.
「우려내기 좋은 호랑이 이야기」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현재적인 작품이다. 지역 언론과 권력, 노동의 위계, ‘가치’라는 단어의 공허함이 이 작품 안에서 서서히 침전된다. 이 소설이 택한 서술은 폭로가 아니라 누적이다. 말들이 어긋나고, 침묵이 반복되며, 공기가 무거워질수록 독자는 이 세계의 비틀림을 스스로 감지하게 된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의 특정 단면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일반화하지 않는 절제 덕분에 오래 남는다.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문체는 단정하고 과묵하다. 설명은 최소화되고, 감정은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장면과 대화, 사물의 배치가 서사의 무게를 떠안는다. 이 문체는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지만 정직하다.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감동을 예약하지 않으며, 끝내 판단을 독자에게 되돌려준다.
오늘의 한국소설이 종종 빠지는 함정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순간 서사가 곧바로 태도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태도를 지연시킨다.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 정리하지 않으며, 다만 남겨진 것들을 남겨진 채로 둔다. 이 절제가 이 소설집을 동시대적이면서도 오래 남는 책으로 만든다.
『투이의 가방』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 아니다. 질문 이전의 상태를 견디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 견딤의 시간 속에서 독자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이 소설집은 말해지지 않은 것들로 구성된 드문 성취이며, 오늘의 한국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자리를 조용히 증명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진희
2021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소설 부문에 「고독한 흔적들」이 당선되어 등단. 2023년 「투이의 가방」으로 제13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선정.
목차
작가의 말
투이의 가방
고독한 흔적들
목화솜 이불
우려내기 좋은 호랑이 이야기
여각구도
4인실
해바라기로 피는 커피
그토록 수많은 꿈
해설
공동체 이후의 공동체 | 김대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