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요아침 열린시학 시인선의 145번 째 작품, 김지영 시인의 시집. 신의 사랑과 인간의 고독이 한배임을 직감하며, 기독교적 사명으로서의 노동과 관능을 억압하는 기제로서의 노동을 나란히 두고 사유한다.
출판사 리뷰
“현실로부터 건져낸 아이러니”
“인간과 일상 앞에서 겸손한 김지영 시”
김지영 시인은 복잡다기한 삶의 구상성이 몇 줄의 시로 단박에 조망되지 않음을 잘 안다. 시집의 문장이 명징하고 각각의 비유가 선명한 까닭은 그의 언어가 인간과 일상 앞에서 겸손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비록 통속성을 경유하더라도 시의 정신이란 내처 비범한 이념을 향하고야 만다는 사실 또한 확신한다. 김지영은 신의 사랑과 인간의 고독이 한배임을 직감하며, 기독교적 사명으로서의 노동과 관능을 억압하는 기제로서의 노동을 나란히 두고 사유한다. 그가 자신하는 바, 시인은 지극히 평범한 입말을 부려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건져낸 아이러니를 경유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감각은 현실 바깥 무한한 외부로 향하는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할 것이다.
― 김상혁 시인
눈을 감으면 물소리가 난다. 어느 기원에서 건너와 눈을 뜨면 질서정연하게 지나가는 삶의 목차들이, 저만치 햇살은 갈린 칼날처럼 서늘하다.
숨을 고르고 단어와 문장들을 불러내 내가 여기에 있는 까닭을 물어보고 싶다.
물결로 요동치는 땅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주머니 속을 뒤지다가 헤진 영수증을 꺼냈다. 허기를 채워 주었던 것들이 희미하게 바래져도 집중할 것이다.
나와 누군가를 위해 두 손을 모으고 싶은 아침이다.
― 시인의 말 중에
출근
새로 건축하는 곳을 지나면서 집에도 뼈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등뼈로 콘크리트가 부어지면서 나는 경직되기 시작했고 표피와 세포가 서로를 당기는 것이었다
죽었다면 뻣뻣해졌을 것이고 수평으로 누워있으면 잠을 잤을 것이다 잠을 자면 하루가 검은 보자기에 싸여 나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고 손에 잡히는 종이를 구기다가 영수증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말이 밖으로 나왔고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눈을 흘기며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갔다 지하철 통로 한가운데 사람들이 드물어지는 동안에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을 보면서 등뼈가 쑤셨고, 물이 시멘트와 섞이는 것을 보았다 시멘트가 철골 사이에 부어졌고, 길을 걷는 동안 경직은 계속되었다
내게 연못을 주세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물방울로 집을 짓고 싶어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비가 와도 비 맞지 않게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푸른 하늘을 들이고 싶어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구름 한 점 베어다 나의 근황을 희석하고 싶어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어디에 자리 잡아도 어색하지 않게
내게 연못을 주세요
내 속에 비명을 지우게
내게 연못을 주세요
오래도록 받친 기도에 젖도록
내게 연못을 주세요
다시 한번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지게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생을 해석하지 않으며 그냥 젖을게요
내게 연못을 주세요, 네
역과 역
사람이 타지 않은 역에서는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아
떠난 너를 기다렸었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지
지는 해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어두운 길 여름비도 추웠어,
운동화의 밑창에 달라붙은 흙이 점점 무거워졌어,
역의 중간쯤 지나가고 있을 때 저만치 달려오는 차를 보았지
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 차는 그냥, 지나쳐갔어
창가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작은 손을 뒤로하고
역에 도착했을 때 차는 떠난 뒤였지
나무 의자에 앉아 버스가 지나가는 역들을 읽었어,
역에 닿으면 버스가 떠났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거나,
어색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건너편 건물의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역과 역 사이를 다시 걸었어,
가로수는 푸르고 아름다웠어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고
너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갔어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지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전국마로니에 여성백일장 장원, 1999년 《예술세계》 등단. 계간 웹북 시조 신인상, 한국문학예술 드라마 신인상, 국민일보 신춘문예(시) 밀알상 수상. 시집 『내 안의 길』, 『태양』, 수필집 『시간의 나이아스』. 한국문협, 광진문협, 강진모란촌, 시산문, 전국 어머니 편지 쓰기 회원.
목차
시인의 말 05
제1부
출근 13
역과 역 14
보자기 16
중력 18
무를 썰다 19
시가 있는 유리창 20
화음 22
수국 23
사이 24
정오를 지나면서 26
신촌 27
우파루파는 꼬리를 자른다 28
파슈파티나트 30
정류장 32
마포나루 33
제2부
그물 37
사회생활 38
점프 컷 40
상자 42
일기 44
바보 45
야구선수 46
사전 48
보폭을 좁히며 걸었다 50
사유의 경계 51
첫눈 52
지구의 늘보 54
Good bye To you 56
교실에서 58
문화 60
제3부
배가 고프면 맛있다 63
우리를 기도합시다 64
시간의 기차 66
쓰다듬기 67
흔적 68
살짝 69
태양의 후예 70
모래의 여자 71
테니스 72
사과 74
주산지 75
보리밭 76
물집 77
바통 78
모만님 80
제4부
우리의 동화 85
혀 86
외식 88
가로등 90
자라지 않은 마음 92
여름의 서시 93
치마가 뒤로 당길 때 94
당신과 나의 길에 샬롬 96
해마다 사월이면 98
여자 100
A와 B 102
받아쓰기 103
파랑에서 104
날마다 읽는 책(rap) 105
내게 연못을 주세요 106
제5부
피사체 109
너를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110
갈피를 들추어봐 112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날 114
꽃비가 내리면 116
갈등 118
그 집 120
일일 일식 122
나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124
산책 126
그 여자의 시간 128
시장보기 130
거미 132
고양이 134
죽부인 136
모과의 속도 138
때와 때를 지나가는 중이다 140
해설_다시, 연못으로 걸어가기/김상혁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