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는 장군 자신의 눈으로 보고 기록한 임진왜란 7년의 생생한 역사이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이제는 세계인의 보고(寶庫)이기도 한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전쟁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정유년에 체포되어 백의종군을 한 약 반년을 빼면, 줄곧 전쟁터였던 바다에서 살면서 그 기간 내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와 직접 행한 바를 일기로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를 위한 한마음으로 일기를 썼기 때문에 그의 일기는 정신적 가치 면에서 하나로 꿰어졌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 되었다. 그래서 난중일기는 복잡하고 힘겨운 우리 시대에 리더가 직면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뜨겁고 차분하게 보여 준다.이 책의 의역자 김종대는 인생의 참스승으로 여긴 이순신 공부에 50여 년을 매진했다. 재판관 퇴임 후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있을 때 이순신의 내면적 정신가치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결심을 곧바로 실천에 옮겨 서울, 부산, 여수에 ‘이순신 아카데미’를 열어 수많은 사회 지도층을 이순신 전도사로 양성했다. 그 여정에서 그는 난중일기를 사람마다 다르게 번역한 부분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 직면하고 ‘보통의 이순신 공부인들이 함께, 쉽게 읽을 수 있는 난중일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수십 년간 일기를 써 온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여 이순신 삶의 진면목을 비춰볼 수 있는 난중일기의 의역을 시도했다. 한문에 능통한 한학자도,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도 아닌 그이지만 50여 년간 이순신을 참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내공의 깊이로 장군의 행적과 난중일기의 문면적 해석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이다.
1월 12일(3월 3일) 맑음.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도록 해라”라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말에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덧붙이는 말]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항상 공(公)을 먼저 생각하고 사(私)를 뒤에 놓는 이순신의 선공후사 정신은 그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의 일기는 이를 잘 나타내어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갑오일기甲午日記 1594, 1월 설에 곰내로 가 어머니를 뵙다
7월 1일(8월 6일) 잠깐 비가 왔다.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수루 다락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棟樑)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柱石) 같은 인물이 없으니! 모르겠다,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 갈지.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누웠다 앉았다 하였다.[덧붙이는 말] 나라 사랑은 나랏일에 관심을 가지고, 나라 걱정을 하면서 시작된다. 위 일기는 이순신의 나라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글귀이다.- 을미일기乙未日記 1595, 7월 전쟁 장기화로 시름이 깊어지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순신
1545년 3월 8일 문반 가문의 셋째로 태어났다. 1576년에 병과로 급제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등에서 전승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최초로 임명되어 1594년에도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1597년 1월 조정을 기망한 죄로 통제사직에서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출옥 후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9월 16일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 척의 왜선과 맞서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1598년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 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643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3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