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문학평론가로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겠지만 황인찬과 문보영 그리고 이소호 시인을 위시한 지금 시대의 시는 자신의 언어를 고유하게 소유하고 즐기는 행위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인다. 그들의 시는 분명 전위적이고 난해하지만 그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젊은 시인들은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행한다. 그러니 그 난해함과 추상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자율적인 언어와 당연하지 않은 의미 그리고 그 독자적인 가치를 즐겁게 실천하고 있으니까. 언어의 조탁이 아닌 그저 즐기기란 비균질한 존재들로서. 그렇다면 비서정적이며 비사실적인 이 낯선 언어들이자 그로테스크한 우울과 웃음의 광기로 가득한 ‘헤테로토피아’적(미셀 푸코) 이미지들은 결국 우리의 굳은 사고를 찌르며 파괴하는 날카로운 칼날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정상적이고 목적적인 우리의 언어에 비해 이들의 언어가 무능해 보이는 만큼 그들은 무목적적인 자신만의 운동을 성실하게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 무능해 보이는 행위의 본질적 영역에는 니체의 말처럼 비인간적이기에 오히려 인간적일 그들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인식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일 따름이다. 자신들만의 온전한 언어이자 동시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의 마법적인 언어들. 이미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나 슬프게도 들리지 않는 작고 희미한 메시아의 목적 없는 노래처럼.
―「에필로그. 무목적적 예술과 전위, 낯선 그로테스크함의 역능」 중에서
2000년대의 미래파 그리고 2010년대의 포스트-미래파의 존재는 소위 난해함과 추상성으로 평가되었다. 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판단은 차지하더라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지점은 2000년대 이후 우리가 무언가 다른 시에 직면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더 이상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시의 개념이 통용되기 어렵다는 진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낯선 시란 무엇인가. 그들의 복잡하고도 기묘한 언어들에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오히려 물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언어를 ‘통해서’라는 알레고리적 표현을 통해 논의해 보려 했다. 언어를 ‘통해서’ 2010년대의 시인들은 또한 허망하지만 즐겁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2020년대에도 혹은 그 이후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모든 ‘지금’의 시인들은 허망하지만 즐겁도록 자신의 지성적 행위를 지속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지만 고유할 어떤 언어의 놀이를 계속해야 한다. 그 언어들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면과 잉여들을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 판이 끝나고 불이 사그라들며 종말의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도 그저 나는 나의 할 일을 해왔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헤테로토피아의 밤’으로 정했다. 벤야민이 카프카에 대해 말했던 ‘희망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기괴하고도 미친 헤테로토피아적 인간들. 하여 이 책은 그 무수히 많은 나‘들’을 통해 인식했던 나의 고유한 필연성에 관한 흔적이기도 하다.
― 저자 「서문」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정현
1979년 대전 출생. 전남 여수에서 성장.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및 박사 학위 취득. 2018년 『동아일보』로 등단. 공저 『한국 근대시의 사상』,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문학창작산실 발간지원기금 수혜. 현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조교수.
목차
서문 / 4
0. 프롤로그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 ― 황인찬, 『희지의 세계』 / 13
1. 헤테로토피아적 감각: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이
1-1. 문보영의 텍스트-월드에 어서 오시길 ― 문보영, 『책기둥』 / 37
1-2. 도저한 죽음의 세계와 ‘발푸르기스의 밤’
―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 52
1-3. 단지 더 많이 실패할 수밖에, 그저 누구보다 더더욱
― 김안, 『아무는 밤』 / 69
1-4. 리빙데드와 멜랑콜리, 수행하는 잔여적 (비)언어들
― 송승언, 『사랑과 교육』 / 87
1-5. 폭력의 실체와 실재계의 망치 ― 이소호, 『캣콜링』 / 104
2. 멜랑콜리의 심연: 지금의 ‘우울한’ 목소리들은
2-1.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사랑의 현전
― 이성복, 『래여애반다라』 / 125
2-2. 바벨탑, 몬스터, 디오니소스 그리고 악(惡/樂)
― 조연호, 『암흑향』 / 146
2-3. 단지 즐거운 고독이란 명제를
― 김언, 『한 문장』, 안웅선,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 164
2-4. 공간과 장소 그리고 기억, “죄인”의 사랑에 대하여
― 서효인, 『여수』 / 180
2-5. 검은 빛의 문장들, 그 고유하고 필연적인 아름다움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 193
3. 슬픔과 고통의 현전: ‘씌여지지 않는 것’들에 의지하며
3-1. 그저 쓴다는 필연적인 무능함에 대하여
― 2019년 신춘문예 당선시평 / 205
3-2. ‘죽은 자’로 발화(發火/發話)하고 사랑하기
―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 220
3-3. 다정하여 쓸쓸한 가정의 어려움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234
3-4. “무서우니 더 무서운 사람이” 된다는 것
― 김건영 신작시론 / 244
3-5. 한계가 없는 절망과 패배하는 사랑 어디에선가
― 허연 신작시론 / 258
3-6. 허무와 고통의 경계선 그리고 슬픔의 ‘빛’
― 신대철 신작시론 / 270
4. 에필로그
무목적적 예술과 전위, 낯선 그로테스크함의 역능 /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