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놀랍도록 풍성한 철학 뷔페” ―《더 타임스》
“철학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 ―《선데이 텔레그래프》
“능수능란한 대가가 쓴 명료함의 전형” ―《파이낸셜 타임스》
“이 책은 독자들이 해당 철학 주제들을 더 깊이 탐구하도록 자극하는 데 성공한다.
독자들은 스크루턴에게서 진정한 사상가의 표식인, 깊은 정직성과 소신을 느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 이후
최고의 철학개론서
로저 스크루턴은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일 뿐 아니라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에서 20년 넘게 철학을 가르치며 철학교육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작위를 받은 뛰어난 철학교사이기도 하다. 그가 대학에서 행한 현대 철학 강의를 한 권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 《현대 철학 강의》다. 많은 평론가들이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 이후 최고의 철학개론서로 손꼽는 이 책은 기존의 상투적인 철학개론서와는 차별화된다.
이 책은 철학을 몇 가지 핵심 문제나 철학자 혹은 철학사 중심으로 해설하기보다는 ‘진리’ ‘존재’ ‘원인’ ‘과학’ ‘영혼’ ‘도덕’ ‘상상’ ‘역설’ 등 31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기술한다. 각 테마는 하나하나가 특정 철학분과를 대표하기도 하고(가령, ‘수학’이라는 장은 수리철학을, ‘객관정신’은 정치철학을, ‘주관정신’은 미학을 주로 다룬다), 한 가지 테마 아래 여러 분과의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며(‘영혼’에서는 인식론·현상학·심리철학의 문제들이, ‘자유’에서는 형이상학·심리철학·윤리학의 문제들이 다루어진다), 한 가지 분과의 문제들이 여러 테마로 나뉘어 논의되기도 한다(‘자아, 마음 그리고 육체’ ‘진리’ ‘필연성과 선천성’ ‘원인’ ‘영혼’ ‘지식’ ‘지각’ ‘자아와 타자’ 등의 장에서 인식론의 문제들이 논의된다).
각 테마의 서술 방식은 철학사의 흐름을 단순히 따라가는 통사적 진행보다는 문제 중심이며, 각 문제의 전개 논리에 따라 대표 철학자들의 논변이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일례로 21장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살펴보면, 스크루턴은 먼저 죽음과 인격 동일성 문제의 논점을 분석한 후, 죽음이 ‘나’의 종말은 아니라는 견해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와 흄의 반론을 살펴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토머스 네이글과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예시하고, 죽음의 부재야말로 두려운 것이라는 버나드 윌리엄스의 반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죽음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그와 맞닿아 있는 니체의 ‘적당한 때의 죽음’, 쇼펜하우어의 자살의 정당화,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 이론으로 논의를 계속 이어간다. 이처럼 한 가지 테마를 축으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토머스 네이글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관련 논의를 자유자재로 연결·확장·심화하며, 해당 주제의 쟁점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모든 장에서 반복되는 특유의 방법론이다.
또한 교과서적 철학개론서들이 주로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같은 전통적 분야만을 주로 다루고, 응용철학 분야는 거의 다루지 않거나 간략하게만 언급하는 데 비해 이 책은 언어철학, 과학철학, 종교철학, 수리철학, 정치철학, 미학을 거의 대등할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룬다. 다루는 내용도 양상논리에서 게임이론, 해체주의,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으며, 모두 일정 분량 이상으로 심도 있게 논의된다. 그 결과 책의 분량은 비록 방대해졌으나, 이로써 한 권으로 현대철학의 거의 모든 문제와 논의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철학개론서가 가능해졌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테마별 서술은 각 철학분과의 세부 쟁점은 물론이고 수많은 철학자의 논의와 철학사 전체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기술방식이다. 아마도 일반적인 영미철학자라면 이러한 책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언어철학이나 의미론 같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권위자일지라도 철학 전반을 꿰는 안목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크루턴은 미학자로서, 영미 분석철학에 정통하면서도 그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철학 전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없이는 어느 분야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것이 실제로 영어권 철학의 주요 약점이다. 너무 협소하거나 분석적이라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전문화되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철학자로 자처하면서 미학이나 정치철학, 도덕이나 종교에 관해 아무런 견해도 갖고 있지 않다면 전공과목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총체적 안목을 지닌 철학자가 철학교사로서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테마별로 정리한
심도 깊은 현대 철학 강의
무엇보다 이 책의 최고 미덕은 쉽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철학서에 필수적이지만 어렵게 보이게 만드는 주요인인 각주가 전혀 없으며, 상식 수준의 개념 이해만 갖고도 충분히 독서를 시작할 수 있다. (더 깊이 있는 설명을 원하는 독자를 위해서는 책 뒤에 ‘학습안내’를 따로 두어 관련 참고문헌이나 심화된 논의를 보충하고 있다. 물론 이 때문에 책의 분량은 더욱 늘어났지만.)
스크루턴은 현대철학, 특히 영미철학이 학술논문의 형태로, 주로 언어적·논리적 분석이라는 미시적 작업으로 수행됨으로써, 철학 초심자에게는 “인간 영혼의 고통스런 문제에 비해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더러는 무의미해 보이는 논쟁만을 촉발”해왔다고 인정한다. 이제 철학자는 “머리의 문제를 가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그들이 추상적 관념들의 영역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말로 알게 될 것이다.” 스크루턴은 영미 강단철학의 테크노크라시적 전문용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전통에 서서 간결함과 단순명쾌함의 언어를 계승함으로써, 즉 초심자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논점을 명료하게 전달함으로써, 현대 철학의 어려운 주제들이 “무미건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중요한 인간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재발견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스크루턴은 현대철학이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성취 이후 돌이킬 수 없이 변화되었으며, 난해함이 해당 주제에 본질적인 경우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본래 어려운 내용을 너무 쉽게만 해석하려 들어서도 안 된다고 경계한다. 또한 그는 여러 철학자의 논변을 상당 부분 별도의 인용부호 없이 기술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반론, 특히 논쟁적인 반론들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일례로 그는 28장 ‘객관정신’에서 사적 소유의 권리의 문제를 논의하다가 그동안 간과되어온 사적 소유의 ‘의무’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소유가 남용되거나 낭비되거나 환경을 파괴하는 데 쓰이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러한 사적 의무를 강요할 필요가 있다.”), 이성적 존재와 비이성적 존재의 차이를 논하다가 동물의 권리에 대한 도발적인 물음을 제기하기도 한다(“그렇다면 동물을 잔인하게 다루면 안 된다는 우리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스크루턴은 “독자는 나의 더 논쟁의 여지 있는 주장에 동의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에 대한 반론을 찾도록 요구된다”고 해명한다.
스크루턴은 플라톤의 《대화》를 패러디한 재기 넘치는 철학소설들을 쓴 작가답게, 딱딱한 철학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솔직하고 재치 있는 표현이나 명제, 사례로 독자의 흥미를 계속 돋운다. 그는 22장 ‘지식’에서 인식론을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분야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23장 ‘지각’에서는 이 또한 지뢰밭이요 현기증을 일으키는 분야이니 독자들에게 신속하지만 조심스럽게 건너갈 것을 당부한다. 미학자답게 수시로 베토벤의 교향곡, 다빈치의 그림, 릴케의 시, 루이스 캐럴의 소설을 예로 들어 이해를 돕는가 하면,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 ‘모긴스’를 여러 명제의 주어로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엽기적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일례로 그는 시간상의 필연적 연결이란 없다는 ‘흄의 법칙’을 공간으로 확장하여, 공간의 경계 안쪽의 세계에 대한 기술과 경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기술은 논리적으로 별개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한 경계가 모긴스의 허리를 가로지를 수는 없는데, 절반의 고양이는 다른 절반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서의 재미의 대부분은 보수주의자다운 정치적 위트가 넘치는 문장들이다. 그는 확률을 설명하면서 ‘대학교수 스미스가 보수당에 투표할 확률’ ‘보수당이 선거에서 노동당을 이길 확률’을 거론하고, 귀납추론의 반례 중 하나로 ‘대학 교직원은 좌파이기를 그만둘 수 있다’는 명제를 드는가 하면, 실용주의의 구체적 사례로 “미국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페미니스트의 믿음이 유용함을 발견할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주의자의 믿음이 소련의(영국이나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 기관원에게 유용했듯이.”라고 말한다(1980년작 《보수주의의 의미》는 그에게 “에드먼드 버크 이후 가장 뛰어난 영국의 보수주의자”라는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진보적인 학계에서는 고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학계에 대한 그의 반감이 엿보이는 유머들이 많다). 또 죽음이 항상 악은 아니며 선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예를 덧붙인다. “히틀러나 스탈린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죽음은 그들 자신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더 비참하게 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스크루턴이 여러 현대철학자들에 대해 내리는 독설에 가까운 평가도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다. 그는 현상학을 철학의 방법론의 하나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창시자인 후설에 대해서는 “칸트에게서 자신의 언어를 훔쳐오면서 너무나 많은 논의를 간과했다”고 화를 낸다. 사르트르의 논변은 온통 은유투성이며, 자신의 논변에서 빠진 고리를 간과하는 능력 때문에 그 과격한 결론에 즐거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푸코 철학의 매력은 상당 부분, “마음이 맞는 시민들의 무해한 모임처럼 보이는 것을 사악한 권력구조로 재기술하는 능력 덕분”이라고 박하게 평한다. 스크루턴의 현대 대륙철학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당하지만(자신도 이를 의식했는지 책을 자평하면서 “모더니스트는 이 책을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증오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헤겔의 존재론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그의 설명은 탁월하며, 아마도 영미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원성 높은 철학자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은 상당한 통찰을 보여준다. “공동체 밖에서의 상실과 고독감, 비본래적 공동체의 거부, 그럼에도 추방자의 고독을 극복하려는 욕구, 우연적 존재의 불안 그리고 죽음의 수용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는 조치들. 이 모든 관념은 종교의 자연사에 속한다. 하이데거가 제시한 존재의 문제는 종교가 대답을 제시하려는 문제와 매우 유사한 듯하다.”
현대 철학의 문제
- 환원주의, 상대주의, 실용주의 비판
스크루턴이 현대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줄곧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현대철학의 세 가지 통속적 경향 즉 환원주의, 상대주의, 실용주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현대 영미철학의 뿌리인 검증주의(논리실증주의)는 어떤 문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밝힐(즉 검증하는) 방법을 알 때에만 우리는 그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명제는 무의미한데, 그것이 참임을 밝힐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무는 무화한다’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에 힘입어 현대 영미철학은 하이데거류의 형이상학을 철학적 난센스로 치부하고 논리적 의미 분석에만 몰두하게 된다.
검증주의의 현대적 변형인 환원주의는 한발 더 나아가 필요하지 않은 실재를 우리의 세계관에서 배제하거나 다른 필수적인 것들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크루턴은 환원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한 탈신비화가 인간세계를 황폐화시킬 위험을 경고한다. 이를 테면 킨제이류의 성과학자는 인간의 성행위를 생물학적 기능이나 생식기의 쾌락적 감각으로 환원하고(“성은 우리의 유전자를 영속시키는 수단 혹은 생식기에서 느껴지는 쾌락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법체계를 그것이 강요하는 권력관계로 환원한다(“정의는 지배계급의 권력 요구일 뿐이다.”).
스크루턴은 이러한 환원주의가 다수의 철학적 혼동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반철학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기정사실의 결론을 위해 세계를 단순화하려는 욕구에 기초하며, 그 호소력은 우리를 환멸에 빠뜨리고 비하시키는 능력에 달려 있다.” 환원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조건의 진실에 눈뜨게 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결코 진리가 아니며, 그저 충격적이기 때문에 진리로 믿어진다.” 스크루턴은 환원주의를 “철학자가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진리와 인간 경험에 대한 경멸”이라고 규정하고, “우리 시대 철학의 과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천박한 환원주의에 저항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상대주의의 유구한 전통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니체의 진리란 없으며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선언으로 현대철학에서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니체의 연장선상에서 푸코는 한 시대의 진리란 그것을 뒷받침한 권력구조 밖에서는 아무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고 거듭 천명했다. 즉 인간조건에 관한 보편적 진리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거짓말쟁이’ 역설의 사례라는 점은 우리가 그들의 말이 진리인지 자문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은 거짓이다!).
물론 상대주의자는 이러한 비판이 쟁점이 되고 있는 절대적 진리 개념을 전제한다고 반박하며, 그들의 판단이 자신들에게는 참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에게 답하며 보여주었듯이, “상대주의가 상대주의자에게만 참이라면 우리 믿음의 객관성은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더욱이 상대주의가 자신에게 참이라고 주장할 때, 상대주의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스크루턴은 통속적 상대주의란 무지한 악당의 피난처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이렇게 당부한다. “진리란 없다고 혹은 모든 진리는 ‘그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자신을 믿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믿지 마시길.”
‘진리’란 유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실용주의는 아주 면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언뜻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유용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용주의자는 성공적인 과학이론을 예로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학이론을 성공적으로 만드는가? 실용주의자는 참된 예측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진리를 유용성으로 정의하고, 다시 유용성을 진리로 정의하는 셈이다. “참된 명제란 참된 명제가 유용하다는 점에서 유용한 명제다. 흠 잡을 데 없지만, 공허하다.”
스크루턴은 ‘포스트모던 무신론자’ 리처드 로티의 글을 직접 인용한 후 이렇게 덧붙인다. “실용주의자에게 내가 방금 말한 것만큼 분명하게 말하도록 설득하기란 무척 어렵다.” 유명론자나 관념론자와 논쟁하기 힘들듯이 실용주의자와 논쟁하기도 힘든데, 그 이름이 암시하듯 실용주의자는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간교한 궤변가”로서, “몇 가지 확고부동한 논변으로 무장하고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이 증명되지 않은 것을 사실로 가정한다고 늘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크루턴이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며 인용하는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마 실용주의에게도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를 빈손으로 만든다. 즉 의심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에 의심에 끄떡없게 만든다.”
현대 철학의 여정1
_ 데카르트의 악령과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응답
스크루턴은 자신의 일상적 믿음의 근거를 찾으려 한 데카르트의 회의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만일 내 모든 경험이 어떤 교활한 ‘악령’의 기만이라면, 내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가? 데카르트의 유명한 대답은 ‘코기토cogito’라고 알려진,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이다. 이 순수 주관, 자기의식적 자아, 1인칭의 ‘나’는 모든 의심에서 면제된다. 자아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기에 다른 모든 믿음의 토대가 된다. 그는 이렇게 먼저 주관의 영역을 정립한 후, 신의 존재 증명에 힘입어 객관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신과 내가 공유하는 이성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순수 주관의 관점에서 벗어나 신의 절대적 관점, 세계 전체에 대한 관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
칸트의 위대한 업적은 이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순수 주관의 영역이란 없다. 주체는 개념을 적용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이해하며, 개념은 대상의 영역에 일차적으로 적용됨으로써만 의미를 얻는다. 그리고 이성의 힘은 “우리 자신의 관점, 즉 자연의 일부로서 제한되고 경험에 속박된 피조물의 관점에서 적용되는 한”에서만 우리가 의존할 수 있다. 우리는 절대적 관점은 물론이고 세계 그 자체(물자체)에 관한 개념조차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우리 사유의 잉여 부산물이다. 세계는 우리의 세계이고,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점 안에 둘러싸인 채 남더라도, 그 관점의 한계가 사유 자체의 한계이며, 그 결과 알 수 있는 세계의 진정한 한계다. 나머지에 대해선 침묵할 따름이다.” 만일 우리가 이성을 경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절대적 관점을 동경한다면, 이성은 자발적 환상에 빠져 우리를 심각하게 오도할 것이다.
5장에서 상술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 보여주는 것도 동일한 결론이다. 나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사적 대상을 지시하는 ‘사적 언어’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언어게임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운 공적 언어의 문법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코기토’라는 1인칭의 사례는 공적 언어의 지시와 행위의 부산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주의자에게 권한다. “믿음의 근거를 찾는 일을 멈추고, 1인칭 관점에서 벗어나라. 만일 이러한 회의와 불확실성 때문에 괴롭다면, 외부에서 당신의 상황을 살펴보고 사태가 어떠한지 질문하라. 적어도 한 가지는 참임을 알 것이다. 당신이 언어를 말한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생각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공적 언어를 말함에 틀림없다. 이 경우에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니는 어떤 ‘공적 영역’의 일부일 것이다. 이러한 공적 영역은 악령의 허구가 아니라 근본적 실재다.”
현대 철학의 여정2
_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해체주의를 넘어서
칸트는 1인칭의 관점보다 3인칭의 관점에 우선권을 부여하는(‘나는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는 대신에, ‘어떠한 종류의 생물이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이러한 태도를 ‘철학적 인간학’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후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아니 그것을 더 정교화한 칸트의 ‘선험적 자아’ 개념에 천착했고 자아와 비아非我, 주체와 대상, 부정과 소외의 변증법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헤겔의 관념론, 마르크스의 유물론, 후설의 현상학,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모두 이 자장 안에 놓였다. 이들 철학자에게는 ‘자아’면 충분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부이며, 사회질서에 대항한 그 실현은 그 자체로 선이었다. 데카르트의 악마가 다시 돌아와 우리는 세계에서 혼자이며, 자아가 세계에 맞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전부라고 속삭인다. 이제 모든 제도와 공동체, 모든 문화와 법은 숭고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자아의 ‘해방’을 방해하는 모든 가치, 관습, 규범은 거부된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스크루턴은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더니스트 철학자들의 작업이 “우리가 계승한 문화와 제도에 어떠한 권위, 어떠한 가치, 어떠한 의미도 없으며, 사유의 유일한 목적은 ‘해방’에 이르는 길을 일소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실존주의자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선험적 자유에 대한 관심에서, 타자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로 우리를 유혹하며”, 마르크스주의자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모든 폭력적 범죄를 정당화하고, 해체주의자는 우리 개념의 참된 목적이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고발하며 개념을 파괴하는 데 매진했다(그러나 실상인즉 의미의 파괴는 타자의 파괴, 그들에 대한 궁극적 복수였다).
이에 대한 스크루턴의 응답은 무엇인가? 모더니스트 철학자들이 폐기했던 요인들을 자아가 아니라 상호인격적 관계에서, ‘나’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에서 다시 긍정하는 것이다. ‘나’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와 의미의 창조자다. 우리는 인간세계를 창조할 뿐 아니라 그것을 문화로 채우기도 하는 사회적 존재이며, 우리를 사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제도들은 사회생활의 필수조건이다. 공동체는 자유로운 합리적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먼저이고, 공동체를 통해 그러한 개인들로 형성된다. 우리가 예술과 종교 경험에서 얻는 교훈은 “안식처는 내 동료가 있는 곳”이라는 깨달음이다. 스크루턴은 현대철학의 주요 과제로 인간세계를 정당화하는 일을 꼽는데, 이것은 곧 타자(여기에는 살아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도 포함된다)를 지옥으로 여기며 배제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모색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데카르트의 악령에 의해 부정되었던 현대사회의 ‘우리’라는 공동체의 복원을 꾀하는 스크루턴의 결론은 분명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