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3년 《중앙일보》 중앙신춘시조상을 수상한 권규미 시인의 첫 시조집 『누가 나를 놓쳤을까』가 가히 시인선 9권으로 출간되었다. 권규미 시인은 삶의 슬픔과 고통, 삶이 무상하다는 허무감에 직면했을 때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생각한다. 그렇게 움직일 수 없는 삶의 조건인 슬픔을 물방울에 투영하는 감각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삶의 본질은 슬픔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하며, 현상적으로 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의 심연에서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을 반영한다. 삶의 고통을 말하기에 앞서 슬픔의 연원을 더듬어 가는 권규미의 시조를 읽노라면 눈물방울들이 동그랗게 맺힌 화폭을 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 이미지가 황무지 같은 세계에서 한 줄기의 생명력으로 솟아나면서 정제된 슬픔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시집의 언어가 눅진하지 않고 맑게 와닿는 이유다.적소에 뼈를 묻고 시간 밖을 떠돌다가가파른 풍문 속을 뚜벅뚜벅 걸어 나와푸른 깃 높이 차면서석문을 열어젖혔다부르튼 페이지마다 촘촘히 핀 삶의 내력막막한 현의 연대를 세세생생 증언할 때육탈한 어둠의 무늬가꿈보다도 가벼웠다땅속에 묻힌 채로 만 리 족히 보았을까뼈에 새긴 나의 나라 드맑은 신록들과누천년 신들의 음계,이랑마다 뜨는 별을― 「비파형 동검」 전문
때 거르면 죽는다고때죽꽃이 피었다는누군가의 시를 읽고, 참 시인들이란어디든 찰떡 콩떡을 갖다 붙이기도 잘하지나비의 날개 위에코끼리를 붙여두는대책 없는 아나키스트, 그 황홀한 무르팍에희디흰 밥그릇 들고 다가앉는 울음으로어느 봄 때죽나무 아래앉아보고 알았네이러니 저러니 해도 때는 잊지 말란 말이허공을 총총히 딛고 꽃차례로 온다는 걸― 「때죽나무 아래」 전문
구름과 바람의 페이지는 자주 접고안개 속 몽상의 숲을 유령처럼 떠돌았다그렇게 대책이 없는완고한 아이였다, 나는물과 나무의 시간, 그 어디쯤서 태어나반은 물이고 반은 나무인 불가사의한 존재그을린 수피를 뜯어어디에든 붙여보지만얕고 말랑한 심리학적 추론에 따르자면태생적 불안심리의 한 패턴이었을 거라고나의 나 그 적막을 넘어늘 다른 곳을 바라보는막막한 유폐의 나날들은, 그러므로 나는소문에 두 발이 묶인 쓸쓸한 책비였다제 생이 적소임을 잊은한 마리 거미처럼― 「책비」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권규미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2013년 《유심》 시 등단, 2023년 《중앙일보》 중앙신춘시조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참, 우연한』 『각시푸른저녁나방』이 있으며, 경주문학상, 천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