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1세기 한국시 비평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는 '비대칭의 시학'과 '상징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탐색한 비평서. 시의 본질을 단순한 언어 예술이 아닌 존재론적 체험의 공간으로 확장하면서, 현대시의 철학적 근원과 미학적 형식을 동시에 다룬다. “시는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대립에서 비대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쉬지 않고 걸어왔다.”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은 시를 단순한 언어 예술로 보지 않는다. 김재홍은 시를 존재의 불균형, 인간의 내면 균열, 세계의 비대칭성 속에서 피어나는 사유의 언어로 규정한다. 비대칭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며, 그 속에서 언어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제Ⅰ부 「현대시의 비대칭성」은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시를 ‘차이의 운동’으로 분석한다. 시의 언어는 논리적 질서보다 감각적 비약 속에서 존재의 진실을 포착한다고 말한다. 제Ⅱ부 「현대시의 상징성」은 김남주·고정희·김종철 등 한국 현대시의 상징 구조를 깊이 있게 해석하며, 상징을 “인간 정신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언어적 구원”으로 바라본다.
출판사 리뷰
*김재홍 평론집 『현대시의 비대칭성과 상징성』_특징과 책소개
21세기 한국시 비평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는
“비대칭의 시학”과 “상징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탐색한 비평서!
이 책은 시의 본질을 단순한 언어 예술이 아닌 존재론적 체험의 공간으로 확장하면서, 현대시의 철학적 근원과 미학적 형식을 동시에 다룬다. “시는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대립에서 비대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쉬지 않고 걸어왔다.”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세계를 표현하는 시의 비대칭성에 주목하는 것은 대칭의 물리학과 대립의 윤리학을 넘어선 시의 실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공격적이지 않고, 전투적이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은 실상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대칭과 대립을 벗어난 지점에서 시는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들뢰즈)가 된다. 그것은 “역동적이기보다는 쓸쓸하고 고즈넉하게, 실험적이기보다는 고전적으로, 가치론적이기보다는 실존적으로, 함성을 지르기보다는 나직한 목소리”(유성호)로 그렇게 다가오는 시의 진정한 위의일 것이다.
김재홍 평론가가 열어젖힌 시의 존재론과 철학적 미학
‘시는 균형의 언어가 아니라, 균형이 무너질 때 드러나는 진실의 언어다.’
김재홍 문학평론가의 신작 『현대시의 비대칭성과 상징성』은
시의 본질을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 철학적 비평서다.
이 책은 시를 단순한 언어 예술로 보지 않는다. 김재홍은 시를 존재의 불균형, 인간의 내면 균열, 세계의 비대칭성 속에서 피어나는 사유의 언어로 규정한다. 비대칭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며, 그 속에서 언어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제Ⅰ부 「현대시의 비대칭성」은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시를 ‘차이의 운동’으로 분석한다. 시의 언어는 논리적 질서보다 감각적 비약 속에서 존재의 진실을 포착한다고 말한다.
제Ⅱ부 「현대시의 상징성」은 김남주·고정희·김종철 등 한국 현대시의 상징 구조를 깊이 있게 해석하며, 상징을 “인간 정신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언어적 구원”으로 바라본다.
이 책은 시를 읽는 새로운 감각을 제시한다. 문학과 철학, 종교와 미학이 교차하는 사유의 공간에서 저자는 시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언어”로 정의한다. 그의 문체는 철학적이지만 시적이며, 논리적이면서도 감정의 떨림이 있다. 그래서 『현대시의 비대칭성과 상징성』은 단순한 평론집을 넘어 ‘비평으로 쓴 시’ 그리고 ‘언어와 존재의 대화록’으로 읽힌다.
“시는 세계를 구원하지 않지만,
시를 읽는 인간은 조금 더 인간다워진다.”
이번 평론집은 한국시의 깊은 사유를 복원하고,
문학이 여전히 인간 정신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책의 제Ⅰ부 ‘현대시의 비대칭성’에서는 철학자 질 들뢰즈, 스피노자, 스토아학파, 둔스 스코투스 등을 통해 현대시의 존재론적 토대를 탐색한다. 그는 시의 언어가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운동’에 의해 구성된다고 분석하면서, 이를 “세계의 비대칭성을 감각하는 존재의 언어적 실천”으로 규정한다. 대표적으로 평론가는 이시영 시인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물질과 비물질, 영혼과 육체, 내부와 외부, 질서와 무질서, 의미와 무의미”의 일곱 가지 비대칭 구조를 제시하며, 시가 대립을 초월한 조화의 공간임을 드러낸다. 이시영의 시가 보여주는 ‘함묵의 언어’, ‘음악적 율격’, ‘도덕적 긴장’은 그 자체로 비대칭의 미학이자, 한국 현대시의 존재적 깊이를 보여주는 실례로 분석된다.
“상징의 시대, 시는 여전히 인간을 구원하는 언어다”
제Ⅱ부 ‘현대시의 상징성’에서는 김남주·김종철·고정희 시를 중심으로 한국시의 윤리적·종교적 상상력을 탐구한다. 김재홍은 이 장에서 상징을 단순한 장식적 장치가 아닌, “존재의 심층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형이상학적 현전(現前)”으로 본다. 그는 김남주의 시를 “비판적 현실인식 속에서 재탄생한 상징체계”로, 김종철의 초기 시를 “가톨릭 세계관의 시적 변주”로, 고정희의 시를 “기독교적 상상력이 여성적 서정으로 전환된 형식”으로 해석한다.
이 세 시인의 작품을 통해 저자는 시가 인간의 내면 윤리를 회복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언어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비대칭의 철학이 열어주는 시의 새로운 지평”
『현대시의 비대칭성과 상징성』은 단순한 문학비평서가 아니라, 시학과 철학, 미학이 융합된 현대시 총론이라 할 만하다. 김재홍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스피노자의 ‘내재적 원인론’, 스토아적 ‘일원론적 세계관’을 통해시를 “존재의 현전(現前)을 표현하는 가장 정직한 예술”로 위치시킨다. 그는 “좋은 시는 전투적이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으며, 천 갈래의 길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세계를 증언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시를 존재의 비대칭 속에서 이해하는 저자의 철학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제Ⅰ부
현대시의 비대칭성
― 이시영 시를 중심으로
제1장 비대칭의 시
만일 시에서 세계의 비대칭성이 구현된 다양체의 무한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가 탄생한 순간부터 추구해 온 서정적 원융의 만화경(萬華鏡)을 확인하는 일이 될 터이다. 비대칭적 세계의 다양성의 근원은 창조성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창조의 의지가 아니라 능산적 자연의 가능성이거나 신의 주사위 던지기이다. 라이프니츠를 따라 “신은 공존 불가능한 여러 세계에 걸쳐 있는 ‘불확실한 아담’ 또는 변덕스러운 아담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능성만큼 수많은 발산하는 아담들을 ‘가능태의 이유에 따라’ 창조하였으며, 여기에서 각 아담은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를 포함한다.” 비대칭적 세계는 다양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데서 실현되는 창조성의 표현이다.
‘비대칭의 시학’은 철학사의 전개 속에서 발견되는 반플라톤주의적 사유와 반헤겔주의적 차이의 철학을 개관한 뒤 몇몇 현대 시인들이 보여 준 세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동력학에 따른 존재의 일의성 개념을 살펴보고, 그의 저작들 속에서 발견되는 선행 철학자들의 영향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들뢰즈에게는 멀리 스토아학파는 물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과 둔스 스코투스 등 스콜라철학자가 보이며 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니체와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거쳐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푸코와 데리다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일의성의 주창자들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이들의 철학을 반플라톤주의 하나로 수렴할 수는 없지만, 들뢰즈에 이르러 비대칭적 일의성으로 수렴되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와 ‘반복’은 대립되지 않는다. 차이에 우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며, 반복이 부정적이지도 않다. 비판의 대상은 동일성과 재현이며, 그 폭력적 전체주의일 뿐이다. 가령 ‘반복과 차이’ ‘차이 자체’ ‘대자적 반복’ ‘사유의 이미지’ ‘차이의 종합’ ‘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 ‘차이와 반복’ 등으로 전개된 사유의 연속적 흐름만 보아도 ‘차이의 철학’이 넘어서고자 한 것은 대칭적·대립적 이원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들뢰즈는 플라톤을 정점으로 한 이원론자들의 계보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그에게서 데카르트와 헤겔에 대한 강한 부정은 쉽게 발견되는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프로이트와 그의 후예들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비판도 보인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철학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와 칸트,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 등의 사유가 보여주는 대칭적이고 대립적인 체계도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다. 또 자체(idem)와 자기(ipse)로 동일성(identite)의 분리를 시도하면서 “자기성 자체를 구성할 수 있는” 타자성을 모색하는 리쾨르와 “철학은 진리들과 대면한 진리성의 행위”라면서 “플라톤이 ‘시간의 항상성’이라고 부른 것, 철학이 영원성이라 명명하는 시간의 비시간적 본질을 향해 정향된다.”고 주장하는 바디우의 논의를 참조한다면, 현대의 플라톤주의자로 부를 만한 이들의 동일성 재구축 혹은 주체의 복권 시도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동일성과 부정성의 근거로 되어 있는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프로이트에 의해 분열되고 다시 재영토화되는 과정에서 그의 후예들인 라캉이나 지젝의 논의들도 참고할 수 있겠다.
이시영은 그간 두 권의 산문집으로 자신의 시론을 표명해 왔다. 1995년 발간한 첫 산문집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와 2016년 간행한 두 번째 산문집 『시 읽기의 즐거움』은 21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관된 시론을 보여준다. 가령 첫 산문집에서 “말을 서술하는 시가 아니라 함묵하는 시, 서늘한 울림을 주는 시를 써보고 싶었다.”고 밝혔다면, 두 번째 산문집에서는 “시가 시를 말하게 하고 시인은 깊은 침묵 속에 빠질 줄 아는 한 뛰어난 미학주의 시인 김종삼”이라고 말함으로써 시어의 경영에 대한 자신의 일관된 견해를 보여주었다. 이를 그의 말대로 ‘함묵의 발언’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정립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일본식 자수율의 관념을 버리고 음보율 도입을 주장하는 김흥규의 율격 이론을 인용하면서 ‘음악으로서의 시’를 강조하는 견해는 두 산문집에 같은 문장으로 나타난다. 이는 ‘음악적 율격’을 의식하는 그의 창작 기법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이시영은 “시의 사명이 민중의 소외를 제 몸의 현실로 받아들여 이를 ‘온몸’으로 밀고나감에 있다”는 도덕적 자각을 주문하면서도 ‘의식의 상투성과 경직화’를 우려하기도 했다. 이는 ‘언어적 긴장’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또 현대시의 지나친 난해성을 시에 대한 민중적 소외(언어적 탈소외)로 진단하는가 하면, “모든 시는 그 절정의 순간에 이러한 무의미의 경지를 체득하기 마련”이라는 ‘물활론적 의미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들은 계속 심화·확대되어 시에는 ‘어떤 비약’이나 ‘과감한 도약’이 있다며 “시인의 창조적이고 저돌적인 무모성이 작용하기 마련”라는 시 창작의 우발적 성격을 ‘비약과 도약’의 관점에서 정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대칭이나 대립을 의식하면서도 어느 한편에 치우지지 않는 일종의 ‘사이의 시론’으로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이시영의 ‘사이’는 시와 관련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시행과 여백 사이(‘함묵의 발언’)에 있고 음악과 시 사이(‘음악적 율격’)에 있으며, 민중과 언어 사이(‘도덕적 긴장’), 서정시와 난해시 사이(‘언어적 탈소외’), 의미와 무의미 사이(‘물활론적 의미론’), 창작과 우발성 사이(‘비약과 도약’)에 있다. 발상과 착상의 차원이든 주제의식과 소재의 측면이든 기법과 표현의 요소이든 불편부당한 ‘사이의 시론’은 어디에서든 관철된다. 본서는 이시영의 시론을 먼저 ‘생성 혹은 도약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 이어서 ‘주름 혹은 펼침의 관점’에서 파악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시영의 시론은 곧 ‘비대칭성의 시론’임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작품론의 관점에서 이시영의 시편들에 보이는 비대칭의 양상은 일곱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 물질과 비물질의 비대칭, 둘째 영혼과 육체의 비대칭, 셋째, 내부와 외부의 비대칭, 넷째 질서와 무질서의 비대칭, 다섯째 내용과 표현의 비대칭, 여섯째 의미와 무의미의 비대칭, 일곱째 순간과 영원의 비대칭 등이다. 본서는 이와 같은 비대칭의 양상을 세밀하게 추적해 보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이시영의 시 세계 전반을 비대칭성의 종합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물질과 비물질은 대칭적이지 않다. 스토아철학은 실체를 물체(soma)라 주장하면서도 비물체적인 것(asomata)인 공허, 장소, 시간, 렉톤(lekton, 언어로만 표현 가능한 것)을 물체적인 것의 표면(이면) 효과로 그 실체성을 인정했다. 들뢰즈는 이를 발전시켜 물질과 비물질을 분리하지 않는 거대한 고른판(gros plan, 사건의 지평) 개념을 통해 비대칭적 사유를 전개했다. 사건은 “물체적인 것들이 운동할 때 그 표면에서 발생하는 효과/결과”이다. 그것은 “존재(물체 또는 사태/성질)가 아니라 존재 방식(사건/부대물)”이다. 의미는 사건들의 계열 속에 있다. ‘존재 방식’은 존재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생성하기도 한다. 의미는 계열에 의해 발생한다.
가령 「아름다운 分割」에서 “파도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달려와/ 단 한 차례 방파제를 들이받곤/ 거대한 물보라를 남기며 스러져간다”는 1연과 이어서 “수평선 쪽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문득 머리를 들고/ 잔잔하게 하늘을 가른다”는 2연의 연결에 보이는 표백된 의미(비물질)는 오히려 ‘거대한’ 물보라의 이미지에 대비되는 ‘잔잔한’ 하늘의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의미(물질)를 발생시킨다. 2연 5행의 짧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거대함과 잔잔함의 화면 분할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시영 특유의 ‘함묵의 언어’를 보여준다.
영혼과 육체도 대칭적이지 않다. 영혼은 언제나 동요하고 육체는 항상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이들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신체는 정신을 사유로 결정할 수 없으며, 정신도 신체를 운동이나 정지로 그리고 (만약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 결정할 수 없다.” 스피노자를 따라 영혼과 육체는 평행하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 존재의 두 가지 표현, 즉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으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인디언들은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거기 영혼이 따라오는지 보려고!/ 그들이야말로 영원한 대지의 자식들이다”(「옛날엔」 전문) 이는 영혼과 육체의 비대칭이다.
내부와 외부도 비대칭이다. 안팎은 구별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양면이다. 생존 환경을 우호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타자(다른 자신)가 아니라 ‘우리처럼 되어야 할 사람들’이며, “단절은 더 이상 안과 밖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고, 동시적인 기표작용적 사슬들과 연이은 주체화의 선택들 내부에서 일어난다.” 적대적 모순 관계라 하더라도 타자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의 이념에 의해 배치된다. 이시영이 “70년대의 다분히 낭만적인 단계를 벗어나 변혁 주체의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질적 변환기에 처해 있다.”고 말할 때에도 주체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옳은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가 있을 뿐이며, 살아 있는 시와 그렇지 못한 시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때에도 시는 이미 자신 내부에 생존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 바깥에서 연명할 터전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의자에 앉으면 흔들리는 것이 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흔들리는 누가 있다/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흔들리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고/ 다짐하고 맹세하며 흔들리는 누가 있다”(「의자」 전문)와 같이 흔들리는 외부의 ‘의자’는 내부의 ‘흔들림’과 구별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다.
가타리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카오스모제’를 상정했다. 그에게 질서와 무질서는 대칭되지 않는다. 가타리에게 세계는 “주체의 위치성이 구현되는 중심(배꼽점)이, 파괴·탈전체화·탈영토화의 지점이 존재한다는 조건에서만 구현될 뿐”(질서의 혼돈화)이다. 그러나 동시에 “압력이 감소한 이러한 공포(空胞)는 실존적 영토들 및 무형적인 준거 세계가 스스로 끊임없이 재긍정하고 뒤얽히게 만들며 일관성을 요구하고 발전시키는 근거인 자기 생산의 핵(noyau)”(혼돈의 질서화)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오스모제란 대칭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대립적으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중층적 흐름이거나 지층화, 탈지층화, 재지층화의 연속된 변주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의 죽음과 대타자의 탄생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심판하지 않고 심판할 필요가 없는 신의 재발견에 가깝다. 가령 “폐허의 거리에 봄이 왔단다/ 친구야 일어서서 우리 얼굴을 보자/ 재 너머 눈 시린 황토무덤에/ 그날의 피 맺힌 숨결인 듯/ 자욱히 민들레씨 인다”(「지평선」 전문)는 표현은 카오스모제적 사유를 보여준다. 폐허(패배 혹은 상실) → 황토무덤(죽음) → 민들레씨(탄생 혹은 부활)로 이어지는 의미론적 흐름과 오다(봄) → 보다(얼굴) → 일다(민들레씨)로 이어지는 인식론적 연속에는 각각 어떤 대립도 대칭도 없으며, 모순이 없다. 때문에 ‘지평선’은 흐름과 연속의 운동 속에서 거대한 낙관과 희망의 이미지로 상승한다.
형식과 실체라는 상호포함 속에서 내용과 표현은 대칭되지 않는다. 내용은 일정한 형식에 의해 배치된 실체를 갖는다. 그래서 내용의 형식이 있고 내용의 실체가 있다. 마찬가지로 표현은 어떤 구조적 특성과 그에 부합하는 합성물들의 계열을 갖는다. 따라서 표현의 형식이 있고 표현의 실체가 있다. 내용은 “어떤 특정한 질료가 ‘선택’되는가라는 문제에서는 실체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질서를 가지면서 선택되는가라는 문제에서는 형식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표현도 형식과 실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는데 “하나의 지층에는 상대적으로 불변한다는 조건 하에 표현 가능한 것의 차원 또는 표현의 차원이 항상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내용과 표현의 분절과 상호포함을 탈영토화된 기계로서 ‘추상 기계’라고 부른다. 그는 “한편으로 언어에 고유한 표현의 음소적이고 통사적인 담론성 기계와 다른 한편으로 내용의 의미적 통일성들의 분할 사이에 다리가, 횡단성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내용과 표현은 서로 횡단하는 추상 기계들이다.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무늬」 전문)와 “산기슭 양지녘에 주춤주춤 물러앉아 저무는 마을/ 순한 산짐승 같다”(「연기 속에」 전문) 등에서 보이는 음소적·통사적 형식과 의미의 실체는 서로 횡단하면서 필연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시영의 짧은 시편들은 더 이상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내용과 표현의 비대칭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의미와 무의미도 비대칭적이다. 의미는 시인이 선택한 언표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표 바깥의 잉여에서 오는 것(“기호의 잉여성, 기호의 대리보충성”)이며, “무의미는 의미와 내적이고 본래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것은 각 계열의 항들에 의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미가 차이와 계열에서 오는 만큼 무의미 또한 그것들에서 형성된다면, 시인의 지시적 의미와 독자의 수용적 의미 사이에는 일정한 불일치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곧 시 예술이 포함하는 우발적 속성의 한 양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그 자체가 생물과도 같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며 빛을 뿜고 수런대고 교감(交感)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는 이시영의 말은 타당하다. 시인의 지시적 의욕이 적을수록 시적 의미는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다.
마지막으로 순간과 영원도 대칭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을 사는 신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연속된 직선의 시간이 아니다. 분절적 크로노스의 시간과 비분절적 아이온의 시간을 구별한 스토아적 시간관을 넘어 아우구스티누스는 “흘러가는 것이 없을 때 과거의 시간이 있지 아니하고, 흘러오는 무엇이 없을 때 미래의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며, 아무것도 없을 때 현재라는 시간도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오직 현재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순간은 곧 영원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도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단편소설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추적케 하는 콩트와 이들을 “영구히 살아 있는 현재(지속)의 변주 속으로 통합”시키는 장편소설을 모두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를 놓는 예술로 인식했다.
시는 현재적 비애를 고백하는 예술이다. 시의 현재는 기억의 현재(과거)와 기대의 현재(미래)를 호기심의 현재 속에 녹여내는 비대칭의 시간이다.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 시와 사건이 배제된 짧은 시로 이루어진 이시영의 시 세계 역시 현재의 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가령 “바람아 몽고바람아 쌩쌩 몰아쳐 와라/ 이 바람 속에는 중강진 혜산진을 지키는/ 수비대 병사들의 뜨거운 뺨 기운도 깃들어 있다”(「강추위」 전문)는 시행과 “고향에 갔더니 예 살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덤들만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양지녘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은 기억과 기대와 호기심을 하나로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시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시는 비대칭적이고 비대립적이다. 세계를 표현하는 시인의 내면은 대칭과 대립에 의해 분할될 수 없다. 시는 처음부터 솔직한 고백이자, 거대한 긍정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재홍
1968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이시영 시 연구 - 비대칭성의 시론적 가능성 탐색」을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중앙일보에 시 「메히아」, 2022년 『광남일보』에 문학평론 「고독은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 이경림론」이 각각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메히아』 『다큐멘터리의 눈』 『주름, 펼치는』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기린으로 떠난 사람』이 있으며, 평론집 『분열자의 산책』, 산문집 『너를 생각하고 사랑하고』가 있다. 2011년~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인력으로 선정되었고, 2017년 박두진문학상 젊은시인상, 2023년 시작문학상, 2024년 한국가톨릭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국민대학교 강사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4
제Ⅰ부 • 현대시의 비대칭성 ― 이시영 시를 중심으로
제1장. 비대칭의 시•12
제2장. 일원론과 이원론•24
제3장. 비대칭성의 시론적 가능성•80
제4장. 비대칭성의 시적 양상•118
제5장. 비대칭의 시론을 위하여•169
제Ⅱ부 • 현대시의 상징성
제1장. 김남주 시의 상징체계와 발화 위치•178
제2장. 김종철 초기 시의 가톨릭 세계관•207
제3장. 고정희 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237
제4장. 대긍정의 시를 위하여•264
참고문헌•269
찾아보기•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