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우주가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느닷없이
우주를 푹 찔러버린
산꽃 꽃봉오리
그때 봄은 미친 듯이
발악하여
악! 비명을 질러댄다.
단단한 우주 공간 속을
푹 찔러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그러고도 아무 일 없듯
두리번거리는
끝이 뭉텅한 꽃봉오리
눈꺼풀 움직여
공간을 한번 휘젓고
햇살 받아 연두색인가
아니 붉은 신화처럼
버얼겋게 충혈된 눈망울
불을 내지르고
짐짓 딴청을 피우는
산꽃 산하는 절로
물들어간다, 봄빛으로
나뭇가지에 걸리는
붉은 햇살이
다시 저 우주로 향하는 날
핏빛 산꽃은
수다만 떨더라.
교감(交感) 7
─ 꽃
구겨버린 이름, 꽃
하나의 몸짓 이전 태초부터
여태 살아남은 야한 유전자, 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봄빛이 민감한 부위를 어루만지자
저 동토(冬土) 끝, 눈 속에 피어나는 복수초
무한한 우주에 피어나는 개별꽃
영원한 그대 마음에 피는 웃음꽃.
꽃은 또다시 피어난다.
춘산(春山)에 붙은 불이야.
서문
만나지 못한 우주 저쪽의 편지
이근배(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인류는 언어의 다양성, 시와 역사, 전통, 생활양식, 자연환경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시라는 예술 형식만은 하나로 형성되어 있다. 최근 들어 AI가 인간 영역에 깊숙이 침투되면서 시·소설 등의 창작에도 기웃거리고 있으나 아직은 인간의 고도한 지성과 감성, 생활 체험이 없는 공허한 수식어의 나열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시의 나라이다. 겨레의 원초적 지능과 재능이 뛰어나서 생활을 이루어 왔으며 온 백성이 시로 해가 뜨고 시로 달이 지는 먹고 사는 생활을 이루어 왔으며, 일부터 나라의 경영과 개인의 일상에서도 시가 운영되어 왔다. 오늘에 와서는 밖의 나라들은 시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오직 우리만이 시인의 숫자도 시 낭송가라는 새로운 예술가도 대폭 늘어나고 있으며 시집 출판, 시 행사 등이 놀랍게 번져 나가고 있다. 이런 시의 범람기에 이종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교감』을 만나게 되었다. 보다 새롭고 독창적인 시 창작에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매우 신선한 감흥에 시의 진척에 눈을 크게 뜨게 된다.
김종천 시인이 주간하던 시 전문지 《포스트모던》은 90년대의 한 축에서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시 운동을 해왔었다. 서른세 해 전 인하대 금속공학과 출신인 과학도가 거기서 등단했으며 세 해 뒤 첫 시집 『너릿재의 불놀이』를 출간했으니 이종현 시인의 시적 성숙과 인식도가 얼마나 깊어 왔는가를 예측게 한다.
이 시집은 표제에서부터 시 전체가 ‘교감’이라는 제목으로 엮여 있다. “서로 접촉하여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 사전적 설명인데 시인의 감성은 우주적 공간과 사물들과의 긴밀한 소통으로 얻어내는 이미지의 표출이다. “나는 산에 오르다가 / 언뜻 눈맞춤으로 / 고봉산 작살나무, 너무도 작은 작살 / 어어, 저 무딘 창날이 내 눈을 찌르고 / 내 마음을 쓰윽 꿰뚫어 버린다”(「교감6-작살나무와 눈맞춤」)는 아주 실질적인 체험적 변용이 너무도 선명하게 구현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참으로 많은 사물들을 만난다. 그것들이 어떤 위해를 가하거나 내가 그 유혹 또는 침략에 흔들리거나 다칠 필요는 없다. 그런가, 그러면 시인은 어디서 시를 만날까. 이종현 시인에게 있어서는 아주 무관한 또는 의미 없는 것들과 끝없는 싸움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 존재 의미를 발현시킨다.
외손녀가 좀 커서 / 달을 보고 / “엄마, 나를 자꾸 따라와” / 가리킨 손가락 끝은 / 달 너머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까.
― 「교감15-하영이의 손끝, 소통」
돌쟁이 외손녀가 손끝으로 아무거나 눌러대는 것을 보고 시인은 달 너머의 세계까지 생각을 펼친다. 아주 평범한 ‘교감’이라는 한 단어는 이종현 시인에게 와서 천변만화의 생각을 낳게 한다. 그렇지 달 너머의 세계를 어린 손녀는 볼 수 있겠지, 세상 사람들이여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그저 한 살배기 외손녀에게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우주 밖의 세상을 듣고 배우게 된다.
어머니! / 업장 배인 무릎 아래로 / 백제인 후예의 / 피를 줄줄 흘려 / 목탁 소리는 / 잃어버린 왕국의 슬픔 / 흔적도 없어라.
― 「교감17-백제 관음」
일본 호류지에 안장된 ‘백제 관음’을 두고 어머니를 부르며 속으로 피 울음을 쏟는다. 시를 다 옮기지 못하니 손끝이 떨린다.
살아온 날들과 내 나라의 어제와 오늘이 모두 한 잎 한 잎의 꽃잎, 또는 한울림 한울림의 종소리가 되어 하늘을 색칠하고 땅을 울리고 아주 새롭게 시 형식을 바꾸어 오래 새겨온 시적 오브제들을 귀가 먹먹하게 울려주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종현
• 전남 화순 생• 광주숭일고 졸업• 인하대 금속공학과 졸업• 월간 <식품과위생> 편집부장 •‘시인의집’ 동인• 계간 《포스트모던》 등단(1992)• 한국문인협회 회원• 첫시집 『너릿재의 불놀이』(1995)
목차
서문 / 만나지 못한 우주 저쪽의 편지 : 이근배 ― 5
1부 바위에 부드러운 솔잎 하나
서라실 가시내 ― 16
독종 ― 17
바위에 부드러운 솔잎 하나 ― 18
우주가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 20
달님. 생리를 하다 ― 22
달빛으로 자라는 여자아이 ― 24
한라산에게 새 생명을 ― 26
허수아비와 갈매기 ― 28
신월동 찔레꽃 ― 29
당산철교3 ― 30
당산철교4 ― 31
벽라리민불 ― 32노루귀꽃, 우주를 링크하다 ― 34
역사의 밭을 일구며 ― 36
자운영 닮은 @ ― 38
상생 ― 39
정화수 ― 40
Water Freshly Drawn at Daybreak ― 41
2부 교감(交感)
교감1 ― 44
교감2 ― 45
교감3 ― 46
교감4 ― 50
교감5 ― 54
교감6 ― 57
교감7 ― 59
교감8 ― 60
교감9 ― 62
교감10 ― 64
교감11 ― 67
교감12 ― 68
교감13 ― 70
교감14 ― 72
교감15 ― 74
교감16 ― 76
교감17 ― 78
3부 햇빛 한 줌
낙엽의 반작용 ― 82
반역 ― 84
꽃들의 섹스 ― 86
꽃과 쓰레기 ― 88
햇빛 한 줌 ― 90
내 꿈을 찍는 외계인, 혹은 사진사 ― 91
하얀 민들레 ― 94
역고드름 ― 96
생각, 생강나무의 떨림 ― 98
토막 난 바람이 부는 소래포구 ― 99
제발 나를 지금 눌러 주세요 ― 100
백색 왜성 ― 102
동강은 흘러야 한다 ― 103
쥐똥나무, 경계를 세웁니다 ― 104
소꿉친구1 ― 106
소꿉친구2 ― 108
을지로 3가 ― 110
난지도 ― 111
4부 백만의 소리, 촛불
백만의 소리, 촛불 ― 114
춘설 ― 117
청소부가 된 시인 ― 118
네모 속에 갇힌 몸, 503 ― 120
정월대보름달, 광화문 광장에 ― 122
촛불, 소녀의 죽음 ― 124
이 촛불로 또 어쩌란 말이냐 ― 126
꽃샘추위 ― 128
오월 데몬스트레이션 ― 130
잠깐, 너도 바람꽃 ― 132
이런 봄 풍경, 난곡 ― 134
황태, 네가 바다를 아느냐? ― 136
황사현상 ― 138
생의 물음표 ― 140
5부 저렇게 작은 꽃이 불을 밝힐 줄이야
이라크의 여자아이, 눈을 부릅뜨고 ― 142
천 개의 눈을 떴어요 ― 144
저렇게 작은 꽃이 불을 밝힐 줄이야 ― 146
예언 ― 147
사막지대의 봄 인사 ― 148
바그다드에 내린 꽃비 ― 150
양심선언 ― 152
6부 화순역
화순역 ― 156
입춘대길 ― 158
정월 대보름, 배바우 돌싸움 ― 159
객미산 아이들 ― 162
정그남터 ― 164
상수리나무 ― 166
배고픈 날, 물수제비를 뜨며 ― 168
군고구마 장수 ― 170
보릿고개 ― 172
7부 수수꽃다리, 미스김!
수수꽃다리, 미스김! ― 174
백제 가시나 ― 176
싸이, 세계를 점령하다 ― 178
해금강 ― 180
황금빛 나비의 여행 ― 183
하늘에 금을 그어 댄 여자 ― 184
어떤 여자의 돌아누운 등 ― 186
아낌없이 주는 나무 ― 188
도봉산 ― 190
관악산 ― 192
우이암 ― 194
아버지는 늘 아버지였다 ― 195
해설 / 추억과 디지털적 인식의 시적 변용 : 조명제 ― 201
후기 / 제2시집, 내 인생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