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평생의 동반자를 떠나보낸 뒤, 나탈리 레제는 사고와 감정을 글로 담아내려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창공의 빛을 따라』는 남편 장-루 리베이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미학적 문장과 철학적 사유로 기록하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이 글쓰기의 형태까지 바꾸어 놓는 순간을 담아낸다.
외투 주머니의 마지막 쪽지, 찰리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속 대목, 구조견의 이야기까지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순간을 붙잡으며 그녀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이전 작품과 달리 거리 두기 없는 파편적 인상과 생각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글쓰기가 끝내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깊은 상실을 독자 앞에 놓는다.
출판사 리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에세이스트
나탈리 레제가 사랑과 죽음에 대해 쓰다
어떤 책은 생을 통틀어 단 한 번만 쓸 수 있다. 마치 숙명처럼 주어지는 한 권의 책은 작가가 스스로 창안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일 확률이 높다. 『창공의 빛을 따라』가 바로 그런 책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 가운데 한 명인 나탈리 레제가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인 남편 장-루 리베이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 이 책은 여전히 레제적이다. 미학적인 문장과 묘사로 가득한 추도사들, 삶과 죽음이라든지 또는 남겨짐과 떠남에 대한 철학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는 글이 언제나 불완전한 결과물이라는 깨달음이다. 사고와 감정을 문장 속에 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진실의 일부를 빠뜨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하는 상대를 떠나보낸 상실감을 온전히 글로 담아 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숙명처럼 쓴다. 나탈리 레제는 고통마저 글로써 다스릴 수밖에 없는 타고난 작가이기 때문이다. 『창공의 빛을 따라』는 이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 글쓰기가 언제나 진행형이며 결과물인 글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록이다.
레제는 남편이 떠난 후 곳곳에서 그의 죽음을 다시 마주한다. 고인의 외투 주머니에서 나온 마지막 쪽지, 찰리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에서 펼쳐지는 코믹한 권투 시합 장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가 죽어 가는 대목, 익사자를 찾도록 훈련된 구조견 이야기에서도 남편을 떠올린다. 그녀는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고인에 대한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써 내려간 글은 지금껏 저자가 보여 준 어떤 작품과도 다르다. 평상시 레제는 집필하는 자신과 글에 등장하는 또 다른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창공의 빛을 따라』에서는 이러한 그녀만의 스타일을 보기 힘들다. 대신 파편화된 인상과 생각의 연속으로 부서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독자는 이를 통해 남편의 죽음이 그녀에게 남긴 상실감을 온전히 바라보게 된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로 알게 된
가득 찬 공허의 세계
친밀한 사람의 죽음은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신파적이지 않게 표현한 작품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나탈리 레제의 감각적인 문체는 격정을 고요히 가라앉히면서도 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녀의 글에는 삶에 대한 강렬한 바람이 담겨 있다. 나탈리 레제는 “마침표는 사랑”이라고 말하며 죽은 남편에 대해 변함없는 애정을 고즈넉이 비친다. 고인이 여전히 집 안에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자신의 허황된 생각을 책망하기도 한다. “너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만,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저 기도하듯 되뇔 뿐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통해 저자의 목소리는 더 큰 울림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기록물을 관리하는 아키비스트로서 옛 문헌을 뒤지는 그녀의 작업은 계속되지만, 이제 그 목적은 오로지 상실에 괴로워한 사람들의 일화를 찾기 위해서다. 딸을 잃고 괴로워하다가 강령회에 참석한 빅토르 위고가 남긴 글도 그중 하나다. 빅토르 위고는 강령회에서 신비한 현상을 목격하지만, 그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는 가득 찬 공허라고 쓴다.
빅토르 위고의 기록에서 레제가 발견한 이 ‘가득 찬 공허’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창공과도 이어진다. 그녀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채워져 있는 공허에 주목한다. 동시에 빅토르 위고가 판단을 멈춘 것처럼, 레제도 그러한 정경을 앞에 둔 채 더 나아가지 않는다. 레제가 다다른 그 지점은 살아 있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다. 그곳까지 향하는 기나긴 여정이, 신비롭게도 눈송이처럼 작고 가벼운 이 책 안에 모두 담겨 있다.
하나의 마침표가 아니라 마침표 자체, 끝내 남게 되는 단 하나의 것. 그 죽음, 곧 죽음 자체. 그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우리는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무너져 내렸다. 몇 시간 전 그가 속삭였다. 이제는 침묵 속에서 단순한 몸짓으로만 말을 건네려 애쓰는 그가, 너무 지쳐 있어서 말을 겨우 만들어 낼 수 있는 그가, 몇 시간 전, 이렇게 속삭였다. 마침표는 사랑이야.
이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 이 어둠에서 나를 뜯어내려면 막대한 노동이 필요하다. 이 죽음 같은 정지 상태에서 빠져나오려면 정신이 막대한 노동을 치러야 한다. 나는 식물원에 갇힌 커다란 원숭이처럼 꼼짝없이 쭈그려 앉아, 우연히 열린 지붕 틈으로 드러난 작은 하늘 조각에 집요한 시선을 고정한다. 헐거워진 철판 사이로 스며드는 가느다란 창공의 빛, 그 조각 속에는 세계가, 기호로서가 아닌 세계 그 자체가, 온전히 담겨 있다.
너의 찬란함, 머뭇거림, 사유의 날카로움, 용기와 부드러움, 취미였던 스키와 천체물리학, 아이들을 향한 사랑, 대화를 나누던 방식, 마음이 움직일 때, 격해질 때, 침묵에 잠길 때, 잠이 들 때의 방식, 웃던 방식, 그 웃음소리의 음조, 네 손가락 끝으로 내 손가락 끝을 만지던 방식, 수줍어하고, 불행해하고, 서툴거나 위엄 있는 존재가 되던 방식, 네가 사랑하던 방식, 사랑하던, 나는 이 목록을 끝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것들을 모을 수 있는 장소는 오직 글쓰기뿐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나탈리 레제
작가, 전시 기획자 및 아키비스트로 현재 동시대 출판기록물 연구소(Institut Memoires de lhedition contemporaineg IMEC) 소장이다. 1994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배우 겸 극작가 앙투안 비테즈를 기념한 〈연기와 이성(Le Jeu et la Raison)〉전, 2002년 퐁피두 센터에서 롤랑 바르트 자료전, 2007년 퐁피두 센터에서 사뮈엘 베케트 자료전 등 기획자로서 연극과 문학 분야에 기반한 각종 아카이브 전시들을 이끌었다. 비테즈의 저술들을 문집 『연극에 관한 글 (Ecrits sur le theatre)』과 단행본 『앙투안 비테즈(Antoine Vitez)』로 묶어 간행했고, 롤랑 바르트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마지막 두 권을 고증해 『소설의 준비(La Preparation du roman)』로 펴냈다. 장르의 경계를 미묘하게 넘나드는 글쓰기로 창작을 시작, 전기 형식의 예술 에세이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Les Vies silencieuses de Samuel Beckett)』을 썼고, 여성 예술가 3부작이라 할 세 권의 소설집 『전시(LhExposition)』, 리브르앵테르상(Prix du Livre Inter) 수상작 『바버라 로든의 생애에 대한 보유(Supplement a la vie de Barbara Loden)』, 베플레르상(Prix Wepler) 수상작 『하얀 드레스(La Robe blanche)』를 출간했다. 근작 『창공의 빛을 따라(Suivant lhazur)』는 2018년 급작스레 작고한 남편, 극작가 장‒루 리비에르(Jean−Loup Riviere)를 기리는 애도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