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영원잡영》은 고령신씨 삼형제 신저·신식·신용의 시문과 자료를 모은 합편 문집으로, 이번 《역주 영원잡영》은 습유를 크게 증보하고 주석을 더해 형제 간 우애와 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영원’은 형제의 급난지우에서 비롯된 말로, 삼형제가 생전에 서로 수창하며 남긴 작품의 의미를 다시 비춘다.
원전은 석인본과 필사본이 전하며, 석인본의 구성에 따라 정관재·졸재·하은의 시문을 수록하되 제명을 정리하고 빠져 있던 작품을 보완해 체제를 정비했다. 이번 역주본에는 성백효의 서문, 신용호의 발문, 심경호의 해제가 실려 학술적 해설을 더했다. 삼형제는 신숙주의 5대손으로 예학과 역학에 밝고 임진왜란 때 활약해 학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들이다.
출판사 리뷰
《영원잡영(鴒原雜詠)》은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신저(申渚, 1544~1588), 신식(申湜, 1551~1623), 신용(申涌, 1560~1631) 삼형제의 시문과 관련 자료들을 모은 합편 문집이다. 이 책 《역주 영원잡영》은 습유를 대폭 증보하고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영원’이란 말은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하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상체(常)>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곧 신저 등 삼형제가 생전에 형제급난(兄弟急難)의 짙은 우의를 지녔던 것을 추모하여, 그 세 사람의 시문에 이 표제를 사용한 것이다. 《영원잡영》에는 실제로 삼형제가 서로 수창한 시들이 적지 않다.
이 책의 원전인 《영원잡영》은 석인본과 필사본이 고령신씨영성군파에 전해오고 있다. 석인본은 3권 2책으로, 건(乾) 책에는 《정관재선생편(靜觀齋先生編)》과 《졸재선생편(拙齋先生編)》을 수록하고, 곤(坤) 책에는 《하은선생편(霞隱先生編)》을 수록했다.
필사본 《영원잡영》은 불분권 1책(120장)으로, 시만을 수록했는데 신저(申渚)의 단독 음영 및 수창(首唱)과 신식(申湜)·신용(申涌)의 수화(酬和) 사실에 따라 편집했다.
금번의 신역본은 석인본을 저본으로 하여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되, 《정관재선생편》을 《정관재선생집(靜觀齋先生集)》으로, 《졸재선생편》을 《졸재선생집(拙齋先生集)》으로, 《하은선생편》을 《하은선생집(霞隱先生集)》으로 제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졸재선생집》과 《하은선생집》에 각각 석인본에 없던 시문을 습유하여 증보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저(申渚)·신식(申湜)·신용(申涌) 삼형제의 우애와 학문에 조예가 깊고, 임진왜란 때의 활약 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금번 역주본은 해동경사연구소 소장이자 한국고전번역원 명예교수인 한학자 성백효 선생이 서문을, 공주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 신용호 선생이 발문을 썼다. 해제는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 심경호 선생이 자세하게 분석하여 밝혔다.
신저 이하 삼형제는 신숙주(申叔舟)의 5대손이다. 조부는 신서(申漵, 1483~1537)이고, 부친은 신중엄(申仲淹, 1522~1604)이다.
신저(申渚)는 정경부인 문화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3형제 중 장남이다. 자는 백원(伯源)이며, 호는 정관재(靜觀齋)이다. 15세 때부터 아우 신식을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 등의 말로 일깨웠다. 모친상을 당한 이후로는 어린 아우 신용을 보듬었다. 아우 신식과 함께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의 문하에서 유학하고, 예학(禮學)에 힘쓰고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신식(申湜)은 자가 숙지(叔止)이며, 호가 졸재(拙齋)·용졸재(用拙齋)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로 활약하였다. 동부승지·좌부승지·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대사간과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환국 후에 호조참판·대사헌이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에 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7월부터 1615년(광해군 7) 1월까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후 임기 만료 후 체직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다시 사은사로 명에 가서 왜의 실정을 알렸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예학에 밝아, 《의례고증(疑禮攷證)》과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을 저술했다.
신용(申涌)은 자가 계달(季達)이며, 호가 하은(霞隱)·하곡(霞谷)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지역을 지켰다. 이후 수찬·교리·사예·장령·승지·예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지방관으로는 공주목사(公州牧使), 순천부사(順天府使),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냈다. 1602년 8월에 황해감사에 제수되었다. 1608년(선조 41) 4월에 우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8월에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612년(광해군 4) 겨울에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자, 부호군(副護軍)으로서 항소(抗䟽)했다가 전리(田里)로 방축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어가(御駕)가 공산(公山)으로 피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셋째 아들 득치(得治)와 함께 행재소로 갔다.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 제2등에 책록되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신저
지은이 : 신식
지은이 : 신용
목차
제1권 : 건(乾)<1> 책
《역주 영원잡영(鴒原雜詠)》 서[성백효(成百曉)]
《역주 영원잡영(鴒原雜詠)》 해제[심경호(沈慶昊)]
《영원잡영(鴒原雜詠)》 서[신백우(申伯雨)]
《영원잡영(鴒原雜詠)》 서[권용직(權容稷)]
《정관재선생집(靜觀齋先生集)》
【시】 422제(오언절구 150제, 오언사운115제, 육언절구 3제, 칠언절구 93제, 칠언사운 59제, 잡언시 2제)
【문】 제문 1편(<祭成大谷先生文>)
【부록(附錄)】 행장(<行狀)>[申湜 撰]·통문 3편(<雙泉書院通文>·<鳳溪書院回通文>·<淸安鄕校通文>
제2권 : 건(乾)<2> 책
《졸재선생집(拙齋先生集)》
【시】 오언절구 7제, 오언사운 5제, 칠언절구 9제, 칠언사운 4제
【문】 기(記) 1편(<文巖書院記>), 제문 1편(<祭八溪君鄭公文>), 전(傳) 1편(<爲李察訪慶著立傳>), 차(箚) 2편(玉堂箚子 1, 玉堂箚子 2), 답교(答敎) 1편(<答政院敎>)
【부록(附錄)】 행적(<拙齋申先生行蹟>), 잡록(<溪門諸子錄>·<淸州儒林上疏>), 제문(<奉安祭文>), 시장(<拙齋先生申公諡狀>), 연보, 연경별장(燕京別章), 관동별장(關東別章), 춘천별장(春川別章), 호서별장(湖西別章)[봉산별장(鳳山別章) 포함], 서(書) 18편, 명[<拙齋銘>(鄭經世)], 좌목(<壽親養老稧座目>)
■습유(拾遺)
【시문】 시 7제, 계(<全羅道防禦啓>), 발(<八字屛跋>), 묘비문(<贈吏曹參判申公墓碑文>), 제문(<祭江叟朴先生墓文>·<祭宋東萊文>·<祭唐興府院君洪公文>·<祭鄭寒岡文>·<祭淸風郡守金陵李公文>)
【제현의 글】 경수연시(慶壽宴詩), 별장(別章), 호와 관련한 시(<用拙齋贊>·<拙齋詩>), 계(<上申方伯到任啓>), 상량문(<文巖書院上樑文>·<雙泉書院上樑文>), 서(書) 5편, 기[<拙齋記>(洪可臣)·<用拙軒記>(柳夢寅)·<自娛窩記>(柳夢寅)], 후서[<用拙齋記後敍>(李睟光)·<書用 拙齋記後>(洪可臣)], 발[<諺解家禮跋>(李植)], 만사, 제문, 잡록, 행장[<拙齋公行狀>(申哲雨)]
제3권 : 곤(坤) 책
《하은선생집(霞隱先生集)》
【시】 오언절구 54제, 오언율시 24제, 칠언절구 30제, 칠언율시 8제, 장단구 1제, 집구 1수
【문】 부 2편, 발(跋) 3편, 서(書) 1편, 계(啓) 29건, 차(箚) 2건, 소(疏) 1건, 록(錄) 1건(<壬辰事蹟>), 제문 5편
【부록(附錄)】 별장(別章) 28편, 제문 2편, 행장 2편, 묘갈명 3편, 시장 2편, 하은 선생 연 보, <左尹公實錄>, 《영원잡영》 발 3편
■습유(拾遺)
교서[<扈聖錄勳敎書>(申渫 撰)], 계[<諭書體制啓>(申渫 撰)], 차[<服制上箚>(申渫 尹暄)], 서(書)(<尊史拜狀天安衙軒>), 묘비문[<贈承政院左承旨墓碑文>(申渫 撰)], 제현별장(諸賢別章) 5편, 서(序)[<五服通考序>(許穆)], 상량문[<鳳溪書院上樑文>(朴徵曦 撰)], 기(<霞隱公碑閣記>)
《역주 영원잡영》 발[신용호(申用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