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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개정증보판
인물과사상사 | 부모님 |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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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6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기회주의는 조선 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삶을 지배해온 가장 강력한 행태적 이데올로기였다. 기회주의는 단물을 찾아 화려한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의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은 화려한 날개에 주목하지만 날개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물이다. 다른 건 제쳐 놓더라도,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면서 거사했던 5·16 주체세력이 얼마 후 부패 세력으로 변질된 것은 바로 기회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박정희와 그 일행의 그런 기회주의는 그들이 조선의 왕권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부패의 국유화’라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은 ‘기회주의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성격의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 발전에 대한 박정희와 그 일행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면, 기회주의에 친화적인 ‘경제동물’의 탄생도 같이 지적되어야 공정할 것이다. 그 어떤 강력한 구심점을 따라 온 사회가 요동치는 소용돌이 현상도 오랜 세월을 두고 학습해온 나머지 이제는 한국인의 유전자에까지 각인된 특성이 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기도 어렵게 되고 말았다. 1960년대를 기회주의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는 건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제공해줄 것이다. 여기서 기회주의는 꼭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는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이 국가적 차원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요구해왔듯이, 국내적으로도 그런 역사가 존재했으며 그것이 오늘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살펴보자는 것일 뿐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60~1961년, 제2권은 1961~1964년, 제3권은 1965~196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허정 과도정부와 내각제 개헌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 잔여 임기가 넉 달도 채 안 되지만 대통령직은 장면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었는데, 장면은 그것을 거부하고 사임을 했다. 장면은 첫째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줌으로써 이승만의 하야를 확실하게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둘째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 셋째 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였다는 이유를 들어 사임했다고 말했다. 장면은 자신의 사임을 당의 공식 기구에 회부하거나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들과 상의해 결정을 내렸어야 했지만, 혼자 단독으로 결정을 내린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민주당 구파에서 정략적 사임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후 격렬한 신·구파 분쟁의 씨앗을 제공하게 된다. 외무부 장관 허정은 대통령 대행에 취임하자마자 “과도 기간을 석 달 안에 끝내겠다”고 밝혔다. 허정 과도정부는 4·19를 ‘혁명’이 아닌 ‘의거’로 단정하면서 “혁명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60년 6월 15일, 제4대 국회는 출석의원 211명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헌정사상 첫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 개헌안은 양원제를 채택했다. 1952년 발췌개헌안이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채택했지만 자유당 시절에는 참의원의 구성은 유예시킨 채 민의원만 구성되었다.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울특별시와 각 도를 선거구로 하여 58명으로 구성하게끔 했다. 민의원의 주요 권한은 예산심의·법률안 심의·국무위원 불신임권 등이었으며, 참의원은 민의원에서 올라오는 법안을 심의하고, 대법관·검찰총장·심계원장(현재 감사원장)·대사·공사, 그 밖의 법률로 지정된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을 가졌다. 내각책임제 개헌이 확정·실시되면 헌법 제52조에 따라 민의원 의장인 곽상훈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곽상훈이 이를 거부하고 의장직을 사임하는 바람에 대통령 권한은 허정에게 위임되었다.

박정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박정희의 영웅은 나폴레옹이었다. 어린 시절 박정희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또 읽었다.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한 청년 박정희의 영웅도 나폴레옹이었다. 문경 공립보통학교 교사 시절 박정희의 하숙방에는 나폴레옹의 초상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관동군이 만들어낸 괴뢰국이었다. 박정희가 만주행을 택한 가장 큰 동기는 “긴 칼 차고 싶어서”였다. 나이가 많은 게 약점이라 호적을 고쳐 나이를 한 살 낮추기까지 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냈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4년 4월 일본 육사까지 졸업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일어났던 일본의 2·26 쿠데타 사건에 심취했다. 그 쿠데타 주동자들을 ‘정신적 선배’로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박정희가 1944년 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하자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8‧15 해방이 되었다.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다음해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1948년 여순사건이 터지자 박정희는 토벌사령부 작전장교로 차출되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해 11월 숙군(肅軍) 작업 중에 군부 내 남로당 우두머리라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으로 변신했다가 사형을 당할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해 그의 만주군 선배들이 적극 구명운동에 나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1949년 백선엽 등의 배려로 숙군을 지휘한 육군본부 정보국에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 문관으로 복직했다. 박정희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이념보다 더 진한 ‘줄’이었다. 박정희의 변신은 계속되지만, 변신의 동력은 ‘야심’이었다. 박정희의 야심은 컸지만 그가 택한 방식은 ‘목숨을 걸고’ 크게 먹는 ‘올인’ 방식이었다.

박정희,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은 6개 조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이 ‘혁명공약’은 ‘혁명의 설계자’인 김종필이 쓴 것이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은 것은 좌익 전력이 있는 박정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혁명공약은 KBS를 통해 전국에 전파되었다. 그날 오전 합동회의에는 장도영 측의 장성 10명 정도와 쿠데타군 측의 영관급 50명 정도가 모였는데, 세계 쿠데타 사상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다. 장도영과의 담판에 실패한 박정희는 대통령을 만나서 해결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박정희의 쿠데타에 찬성을 했다. 박정희는 청와대를 나온 후 자신감 있는 태도로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쿠데타군 병사들은 하얀 바탕에 하늘색으로 ‘혁명군’이라 새겨진 글자에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시뻘건 도장이 찍힌 혁명군 완장을 착용했다.
장면은 중앙청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그러고 나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은 장도영, 부의장은 박정희가 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권을 장악한 기구로 각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장군·장교 32명으로 구성되었다. 5월 19일 장도영과 박정희가 쿠데타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용공 및 혁신을 빙자하는 친용공분자’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자, 미 국무성은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내각’을 구성했다. 박정희는 쿠데타의 중요한 동기와 목표에 대해 “지난날의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이 확고한 지도자도(指導者道)를 갖지 못함으로써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게 하고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은 결과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였다”고 말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한 ‘빨갱이 만들기’

박정희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겠다는 것과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내세운 것도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미국이 박정희의 사상을 캐고 다닌다는 정보가 쿠데타 주체세력에 입수되었다. 미국의 사상 검증은 박정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박정희의 주변 인물들에도 주목했다. 특히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던 김종필을 문제 인물로 지목했다. 쿠데타의 성패는 한국의 장면 정권이나 민중보다는 미국의 손에 더 달려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방첩부대장인 이철희에게 ‘용공세력 분자를 색출하라’는 지시를 직접 내리기도 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친미주의자 정일권을 주미대사로 기용하는 등 미국과 가깝고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을 중용하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없애기 위해 미8군 통역 장교였던 김경업과 최고위원 유양수를 중심으로 한 특별팀을 보내기까지 했다. 또 박정희는 미국의 환심을 사고 자신의 빨갱이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빨갱이 사냥’을 했다. 진짜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의 승인을 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로 때려잡는다면 좋은 일이었다. 순전히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세탁시켜주는 용도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다. 그 어이없는 게임의 최대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였다. 혁명재판소는 조용수를 포함한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5명에게 5년에서 15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했다. 결국 2명은 사형에서 무기로 형이 감면되었지만, 조용수는 12월 22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기붕 일가는 26일 밤 경무대에서 보낸 차를 타고 6군단을 떠나 경무대 별관 경비실 옆에 있던 제36호 관사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이승만의 양자이자 그들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동생 이강옥을 차례로 쏘고 자신도 자살로 끝을 맺었다. 4월 28일 새벽 5시 40분경에 벌어진 일이었다. 국회조사단의 진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옥이 먼저 수면제를 먹고 숨을 거둔 후 이강석이 이들이 되살아날 것을 염려해 권총을 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백란공원에 묻혀 있는 이기붕 일가 중 이강석의 묘비엔 “불타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부모님 모시고 동생 데리고 기꺼이 웃으며 자진해서 간 것을 우리는 아노라. 이강석 군 1960년 4월 28일 24세로 산화함”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한동안 “이강석이 어떻게 자신의 복부와 머리에 두 발을 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모살(謀殺)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제1부 제2장 이기붕 일가 집단 자살」

군의 부정부패는 나라가 워낙 가난한 탓이 컸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그걸 그대로 방치한 정부 정책의 문제이기도 했다.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선 생계 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준장 월급으로도 생계 유지가 곤란할 정도였다.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부러 장교들의 처우를 나쁘게 해놓고는 군대를 통제하려고 한다”고 해석했다. 모든 장교를 부패의 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수 없는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 놓으면 특무대를 앞장세워 군을 통제하기가 쉬워진다는 걸 이승만이 계산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교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가 쿠데타의 한 원인을 제공한 건 분명했다. 적당히 타락해 부수입을 챙기는 장교들은 절망의 나락으로까지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체질적으로 청렴한 장교들은 그런 상황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1부 제7장 콜론 보고서: ‘정권의 잉여가치’가 부른 기회주의」

신문들도 장면 정부에 대해 과도한 ‘실력 행사’를 했으니 피장파장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한(恨)이 맺힌 탓이었는지 언론의 사명은 권력을 무조건 두들겨 패기만 하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과도한 비판이 난무했다. 장면은 기자회견을 주 1회로 정례화했다.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따르면, 장면의 주례 기자회견은 20여 평 되는 작은 방에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장면의 얼굴에 ‘사정없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건 방이 좁은 탓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장면과 신문의 관계를 상징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장면 내각의 제1차 국무회의에서 내무부 장관 홍익표는 “기자단에서 총회를 한다면서 협조를 요청하는데 얼마나 내면 좋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1년에 5~6번씩 열리는 총회도 있는가? 그건 돈 뜯어먹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다. 돈을 얼마나 뜯기면 좋겠느냐는 게 국무회의 의제였던 것이다. 「제1부 제12장 10배 가까이 늘어난 신문: 무엇을 먹고사는가?」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머리말 :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기회주의의 다양한 얼굴 · 4 기회주의가 난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 · 6 한국의 ‘소용돌이 문화’ · 8 1960년대, 기회주의의 완성 · 9 ‘합의독재’와 ‘민중의 기회주의’ · 11

제1부 1960년: 점증하는 좌절의 혁명

제1장 4·19 혁명: ‘주인 없는 혁명’
서울의 ‘한국 민주화 선봉장론’ · 27 ‘마음의 준비’조차 없었던 혁명 · 28 4월 19일 고려대 학생 시위 · 30 115명이 사망한 ‘피의 화요일’ · 31 ‘민중의 분노’를 지적한 미국의 압력 · 34 4월 25일, 258명의 교수 시위 · 37 이승만의 하야 성명 · 39 ‘미국 만세’, ‘매카너기 만세’ · 42 이승만 하야는 4·19의 목표가 아니었다 · 44 시민혁명인가, 단순한 정권교체인가? · 46 ‘미완의 혁명’에서 ‘빼앗긴 혁명’으로 · 48

역사 산책 1 4·19와 두 여중생의 죽음 · 50
역사 산책 2 주요 소통 수단으로 등장한 혈서 · 53
역사 산책 3 정치 바람에 들뜬 대학 · 56

제2장 이기붕 일가 집단 자살
현실 감각을 잃은 이승만 · 58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과욕 · 59 3·15 부정선거와 종교 교육 · 61 이기붕 일가의 비극적인 최후 · 63

제3장 허정 과도정부와 내각제 개헌
“혁명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 66 장면의 ‘정략적 사임설’ · 67 ‘주인 없는 혁명’과 ‘무임승차’ · 69 이승만 망명, 내각제 개헌 · 71 미국의 부정축재 비호 · 74

제4장 제5대 총선: 국무총리 장면, 대통령 윤보선
아이젠하워의 한국 방문 · 76 민주당의 7·29 총선 압승 · 79 민주당의 무한 내분 · 81 ‘서울역 납치’로 시작된 머릿수 싸움 · 82 폭력 사태로 번진 국무총리 인준 투쟁 · 85

제5장 민주당 신·구파의 이전투구
권위주의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윤보선 · 87 ‘착하지만 어리숙한’ 장면 · 89 난투극으로 번진 신·구파 싸움 · 91 서울역 사건: 내각책임제 대통령의 월권 · 94 민주당 정권의 몰락을 경고한 곽상훈 · 94 분당: 민주당 126명, 신민당 65명 · 96

제6장 “혁신정당은 분열증 환자”?
혁신계의 7·29 총선 참패 · 98 혁신계를 집어삼킨 분열의 악순환 · 100 북한의 남북연방제 제의 · 102 12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몰락한 혁신계 · 103

제7장 콜론 보고서: ‘정권의 잉여가치’가 부른 기회주의
콜론 보고서의 ‘쿠데타 필연론’ · 105 콜론 보고서의 ‘자기이행적 예언’ · 107 6·25 전쟁이 낳은 과대성장 집단 · 109 군의 기형적 인사 구조와 부정부패 · 112 청렴파 장교들의 절망감 · 114 ‘승자 독식주의’ 때문이었을까? · 117

제8장 박정희의 인생: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보통학교 3학년 때 ‘권력’을 알다 · 119 박정희의 영웅은 나폴레옹 · 121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 124 “박정희의 친일 경력은 경미한 수준” · 125 황군으로 개조된 인간 · 127 “세상은 썩었어. 더러워” · 129 남로당 우두머리가 된 박정희 · 131 ‘이념’보다 더 진하고 질긴 ‘줄’ · 133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 136 박정희를 살린 6·25 전쟁 · 138 박정희의 반미 민족주의? · 140 박정희와 황용주의 동상이몽 · 142 4·19가 만든 정군 운동 카드 · 144 박정희와 김종필의 로비 · 146

제9장 장면 정부의 어설픈 군 정책
10만 감군 정책의 폐기 · 149 군부를 소외시킨 군의 문민화 · 151 국군통수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 153 육사 8기 11명의 9·10 ‘충무장 결의’ · 154 미국의 정군 반대 · 156 누가 쿠데타의 ‘진짜 주체’인가? · 157 눈에 핏발이 선 박정희 · 159

제10장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과 소급입법
“둔한 재판관이 내린 의외의 가벼운 선고” · 162 “우리가 정치를 하겠다!” · 163 응징을 위한 소급입법 개헌 · 165 정부에 ‘기적’을 요구한 국민 · 166 정권 안보에 대한 두 극단주의 · 168

제11장 학원민주화운동·국민계몽운동·교원노조운동
연세대의 학원민주화운동 · 170 ‘국민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 · 172 교원노조의 ‘속죄와 책임의식’ · 173 경북교원노조의 단식투쟁 · 175

역사 산책 4 실업자와 사기꾼이 들끓는 다방 · 179

제12장 10배 가까이 늘어난 신문: 무엇을 먹고사는가?
억눌렸던 한의 폭발 · 181 언론민주화를 위한 언론출판노조운동 · 184 사이비 기자의 전국적 발호 · 185 독자들의 과도한 ‘실력 행사’ · 186 “누가 더 비판을 잘하나” 경쟁 · 188 약장수가 ‘엔터테이너’이던 시절의 영화 · 190 김기영의 <하녀>와 ‘식모’라는 직업 · 192

제2부 1961년 ①: ‘역사의 지체’에 대한 분노

제1장 장면 정부의 ‘경제제일주의’
『사상계』가 맡은 국토건설사업 · 197 면 작업복과 청조운동 · 199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 201 한일 국교 정상화 시도 · 203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의 냉소 · 205

제2장 장면 정부 장관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2개월
장면과 윤보선의 불신과 불화 · 207 1·20 개각과 신풍회 · 210 신민당 창당과 중석불 사건 · 212 ‘3신론’ 또는 ‘4신론’ · 214 억눌린 굶주림이 키운 분열 · 216

제3장 ‘부정축재 처벌’과 민주당의 부패
장면은 측근들의 꼭두각시였는가? · 218 경제계의 매카시즘 수법 · 221 부정축재자 처벌법은 만들었건만 · 223 장면이 두 손 든 정치자금 문제 · 224

제4장 ‘한미경제협정 파동’과 ‘2대 악법 반대 투쟁’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 227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 229 다시 격화된 좌우 대결 구도 · 231 3·22 서울시청 앞 횃불데모 · 233 싸움으로 끝난 청와대 4자 회담 · 235

제5장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최악의 인사였는가?
김종필의 강제 예편이 쿠데타에 미친 영향 · 238 왜 하필 장도영이었을까? · 240 장면 정부의 작동 방식 · 241 ‘미국 지원설’과 ‘장도영 장인 로비설’ · 244 ‘정치자금설’·‘뇌물설’·‘어머니설’ · 246 ‘박정희 로비설’과 ‘지연설’ · 247

제6장 4·19 1주년: ‘통분·치욕·울분’
“꽃다운 젊음 헛되이 갔는가” · 249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 251 혁신계의 무책임성 비판 · 253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 · 254 “낭만적이며 관념적인 통일지상주의” · 257 김종필, “나는 혁명의 아버지였다” · 258 4·19 데모 유발 공작 · 260 창녀들과 포주들의 데모만 일어났다 · 263

역사 산책 5 “우리에게 일터 주면 무력 없이 멸공된다” · 266

제7장 신문망국론: 3신의 으뜸
신문, “때려야 잘 팔린다” · 269 사이비 언론의 ‘뜯어먹기 경쟁’ · 271 사이비 언론의 주요 목표는 군 · 273 『민족일보』의 창간 · 275 『민족일보』의 편집 갈등 · 277 『민족일보』와 장면 정부의 충돌 · 279 『민족일보』의 쿠데타 지지 · 281

제8장 5월 16일: 장면의 잠적, 윤보선의 협조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다” · 283 거사 기밀 누설에도 김종필이 당황하지 않은 이유 · 284 이범석과 김윤옥의 말싸움 · 287 거사 5시간 전에 발각된 쿠데타 · 289 쿠데타군의 KBS 장악 · 291 KBS를 통해 전국에 전파된 ‘혁명공약’ · 293 목숨을 건 ‘사무라이 마니아’ · 295 박정희·장도영의 ‘목숨 걸기’ 게임 · 297 길가에서 벌을 받는 국방부 장관 · 299 윤보선, “올 것이 왔구나” · 301 윤보선의 기회주의인가? · 304 계속 쿠데타를 도운 윤보선 · 307 수녀원에 꼭꼭 숨어 기도만 드린 장면 · 308

제9장 5월 17일: 장면의 ‘미국 숭배증’의 비극
쿠데타에 만세를 부른 신민당 · 312 군의 ‘위계질서 파탄’ · 314 쿠데타 성공 후 모습을 드러낸 장면 · 315 장면, “미국의 생각을 알고 싶다” · 317 완장의 위력과 ‘완장 시대’의 개막 · 319

제10장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탄생
체포·모욕당한 이한림 · 321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행진 · 322 장면 내각 사퇴, 국가재건최고회의 설치 · 325 장면의 어설픈 변명 · 327 장면을 배신한 미국의 기회주의 · 329 미국의 쿠데타 배후조종설 · 331 “초대에 의한 쿠데타”였을까? · 333 30~40대가 주축이 된 ‘세대 쿠데타’ · 335

제11장 장면은 ‘선진적인 정치가’였는가?
‘장면 다시 보기’ 운동 · 338 조광과 이덕일의 긍정적 평가 · 340 ‘미국 중독증’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 · 342 직업을 잘못 찾은 사람 · 343 최소한의 리더십마저 없었다 · 345 곽상훈의 체념적인 냉소 · 347

제12장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한 ‘빨갱이 만들기’
북한의 착각과 오해 · 350 미국의 사상검증을 통과하기 위하여 · 352 혁신계의 어리석은 착각 · 354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 세탁을 위해 · 356 ‘빨갱이 만들기’의 제물로 바쳐진 조용수 · 358 미국의 ‘박정희 관리’ 전략 · 360 반공을 인정받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 362

주 ·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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