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부모님 > 부모님 > 소설,일반 > 역사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이미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사상사 | 부모님 | 2025.12.19
  • 정가
  • 22,000원
  • 판매가
  • 19,800원 (10% 할인)
  • S포인트
  • 1,100P (5% 적립)
  • 상세정보
  • 15.2x22.3 | 0.616Kg | 440p
  • ISBN
  • 9788959068234
  • 배송비
  • 2만원 이상 구매시 무료배송 (제주 5만원 이상) ?
    배송비 안내
    전집 구매시
    주문하신 상품의 전집이 있는 경우 무료배송입니다.(전집 구매 또는 전집 + 단품 구매 시)
    단품(단행본, DVD, 음반, 완구) 구매시
    2만원 이상 구매시 무료배송이며, 2만원 미만일 경우 2,000원의 배송비가 부과됩니다.(제주도는 5만원이상 무료배송)
    무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
    무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일 경우 구매금액과 무관하게 무료 배송입니다.(도서, 산간지역 및 제주도는 제외)
  • 출고일
  • 1~2일 안에 출고됩니다. (영업일 기준) ?
    출고일 안내
    출고일 이란
    출고일은 주문하신 상품이 밀크북 물류센터 또는 해당업체에서 포장을 완료하고 고객님의 배송지로 발송하는 날짜이며, 재고의 여유가 충분할 경우 단축될 수 있습니다.
    당일 출고 기준
    재고가 있는 상품에 한하여 평일 오후3시 이전에 결제를 완료하시면 당일에 출고됩니다.
    재고 미보유 상품
    영업일 기준 업체배송상품은 통상 2일, 당사 물류센터에서 발송되는 경우 통상 3일 이내 출고되며, 재고확보가 일찍되면 출고일자가 단축될 수 있습니다.
    배송일시
    택배사 영업일 기준으로 출고일로부터 1~2일 이내 받으실 수 있으며, 도서, 산간, 제주도의 경우 지역에 따라 좀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묶음 배송 상품(부피가 작은 단품류)의 출고일
    상품페이지에 묶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은 당사 물류센터에서 출고가 되며, 이 때 출고일이 가장 늦은 상품을 기준으로 함께 출고됩니다.
  • 주문수량
  • ★★★★★
  • 0/5
리뷰 0
리뷰쓰기

구매문의 및 도서상담은 031-944-3966(매장)으로 문의해주세요.
매장전집은 전화 혹은 매장방문만 구입 가능합니다.

  • 도서 소개
  • 출판사 리뷰
  • 작가 소개
  • 목차
  • 회원 리뷰

  도서 소개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6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기회주의는 조선 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삶을 지배해온 가장 강력한 행태적 이데올로기였다. 기회주의는 단물을 찾아 화려한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의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은 화려한 날개에 주목하지만 날개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물이다. 다른 건 제쳐 놓더라도,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면서 거사했던 5·16 주체세력이 얼마 후 부패 세력으로 변질된 것은 바로 기회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박정희와 그 일행의 그런 기회주의는 그들이 조선의 왕권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부패의 국유화’라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은 ‘기회주의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성격의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 발전에 대한 박정희와 그 일행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면, 기회주의에 친화적인 ‘경제동물’의 탄생도 같이 지적되어야 공정할 것이다. 그 어떤 강력한 구심점을 따라 온 사회가 요동치는 소용돌이 현상도 오랜 세월을 두고 학습해온 나머지 이제는 한국인의 유전자에까지 각인된 특성이 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기도 어렵게 되고 말았다. 1960년대를 기회주의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는 건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제공해줄 것이다. 여기서 기회주의는 꼭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는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이 국가적 차원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요구해왔듯이, 국내적으로도 그런 역사가 존재했으며 그것이 오늘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살펴보자는 것일 뿐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60~1961년, 제2권은 1961~1964년, 제3권은 1965~196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졸속‧굴욕’이었는가?

1965년 1월 9일 박정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을 올해 안으로 매듭짓겠다고 선언했다. 2월 19일 한일협정 기본조약이 가조인되는 날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경찰 4명과 시민 12명이 부상을 당했고, 75명이 연행되었다. 대학 개학 이후 시위는 본격화되어, 3~4월 내내 시위와 단식 농성이 전개되었다. 4월 13일 시위 도중 부상당한 동국대생 김중배가 이틀 후 사망했다. 4월 17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는 서울 효창공원에서 대규모 시민집회를 열었으며, 집회 후 인근 파출소를 점거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날 서울 시내 3개 고교생 3,000여 명도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4·17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했으며, 시위 학생에 대해 현역 징집영장을 발부했다. 5월 2일 박정희는 진해 비료공장 기공식에서 학생 데모의 비애국성, 언론의 무책임, 지식인의 옹졸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한일협정은 굴욕외교라는 비판에도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의 수상 관저에서 이동원과 시나 에쓰사부로가 서명함으로써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7월 14일 밤, 민주공화당은 정부가 제출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전격 발의했다. 각 사회단체는 비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8월 14일 오전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은 여야간 심한 몸싸움 끝에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윤보선은 한일협정 국회 비준 전에 국회의원 총사퇴를 주장했지만, 박순천은 반대했다. 결국 국회 비준 후 윤보선파에서 7명, 박순천파에서 1명이 국회를 떠났다. 한일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되었으며, 한국 측의 40해리 전관수역 주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영주권 문제 등도 일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다. 문화재와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버렸다. 정신대·사할린 교포·원폭 피해 등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독도 문제도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이수근은 이중간첩이었는가?

이수근은 1967년 3월 22일 남한으로 귀순했지만, 1969년 2월 13일 다시 북한으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김일성 수행기자를 거치며 중앙통신사 부사장 자리에 오를 정도로 잘 나가는 엘리트였지만, 자유분방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박정희 정권은 세계적인 관심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포장하면서 1967년 5월 3일에 치러질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치적을 과시할 수 있는 호재로 삼았다. 이수근은 1967년 4월 1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에는 사색의 자유마저 없고, 탈출이 스스로 택한 자유의 길이었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도 1년 동안 이수근을 관찰하고 내부 논의 끝에 위장 귀순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그를 중앙정보부 7국 1급 판단관으로 대우했다. 이수근은 첫 기자회견에선 “북한에 두고 온 세 자녀와 처가 한국에 와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수근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수근이 화장실에서 이빨을 딱딱거리면 전파가 나간다”, “이수근의 눈 속에는 카메라가 장치되어서 눈을 깜박거리는 순간마다 사진이 찍힌다”, “이수근은 이중간첩이다”는 소문이었다. 이수근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황당한 충격이 전해진 것은 불과 5개월 후였다. 1969년 2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이수근이 위장 귀순을 하였다가 난관에 부딪히자 입북할 목적으로 탈출하다 붙잡혔다”고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수근이 위장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김형욱을 비롯해 중앙정보부 수뇌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책임 문제를 두려워했다. 박정희 정권에 중요한 것은 오직 ‘정권 안보’였다. 이수근에 대한 재심 무죄선고는 2018년 10월 11일에 이루어졌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규정했다.

강남 개발과 아파트 홍보

1968년 8월 서울 시내 465개 동(洞) 중 공중전화나 전신전화취급소가 없는 동이 48개 동이나 되며 주로 압구정, 반포, 서초, 잠원, 신사, 논현, 역삼, 개포, 삼성 등 강남 변두리에 몰려 있었다. 강남 개발의 신호탄은 1967년 4월 29일에 터졌다. 바로 그날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박정희의 대선공약으로 공표되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이 착수되면서 서울시는 토지보상 없이 도로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강남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인구 문제와 더불어 남북 긴장 고조로 서울 인구의 강북 집중에 대한 우려도 작용했다. 1966년 1월 19일에 착공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면서 강남은 서울 생활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제3한강교 기공식 이후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거대한 부동산 투기 붐이 일었다. 그런데 서울시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들인 대규모 땅이 강남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강남을 개발했다는 설도 있으나, 박정희 정권이 정치자금을 부동산 투기를 통해 조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1960년대 말까지 아파트는 ‘마당이 없는 집’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위층과 아래층 소음 등 공동생활의 불편함 때문에 빈민들의 주거 공간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시민아파트 건립은 큰 사건이었지만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시민아파트 건립 기공식은 1968년 6월 18일에 열렸다. 훗날 금화아파트로 불리는 시민아파트 제1호의 기공식에 참석한 사람은 김현옥을 비롯해 극소수의 시 관계자들뿐이었다. 1968년과는 달리, 1969년도의 시민아파트 건설사업 기공식은 당시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다. 군사작전식 건설사업인지라 5월 15일 하루에만 열린 기공식이 모두 16군데였다. 시장과 부시장 등이 지구별로 차례대로 나누어 참석한 기공 삽질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모두 끝났으며, 시민아파트 기공 첫 해 동안 건립된 아파트는 406동, 1만 5,840가구였다.

‘베트남 특수’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베트남 파병에 따른 ‘파월 외환 수입’은 1966~1970년 5년간 총 6억 2,502만 달러에 달했으며, 한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총액 약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획득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했다. 한국의 대(對)베트남 수출은 물품 군납의 증가에 힘입어 1965년 1,770만 달러에서 1970년 7,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베트남은 미국·일본 다음 가는 한국의 수출시장이 되었으며, 한국 수출 총액에서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8.4%에 이르렀다. 베트남 특수가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5년 0.6%에서 1969년 3.0%로 올랐다. 월남 파병은 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신화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한진그룹일 것이다. 한진그룹은 월남 특수 5년 동안 1억 3,000만 달러를 벌어 전형적 ‘월남 재벌’이 되었다. 한진그룹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박정희의 배려로 1969년 3월 국영기업이던 대한항공을 인수해 재벌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월남 파병은 한일협정과 더불어 1960년대 후반기 고도성장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파병으로 ‘베트남 특수’를 누렸지만, 5,000명의 전사자와 1만 6,000여 명의 부상자라는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64년 9월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견에서부터 1973년 3월 주월 한국군사령부 철수에 이르기까지 10년간,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하고 평균 5만여 명을 상시 주둔시킨 가운데 한국군 전사자는 5,000여 명, 부상자는 1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에 이런 규모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사실 그대로 언론에 보도되었더라면, 한국인들은 과연 배 좀 부르자는 이유만으로 그런 현실에 눈을 감았을지는 의문이다. 1965년만 해도 한국군 전사자 수가 정기적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그 수가 300명을 넘어서면서부터 이런 기사는 신문에서 사라졌다. 이른바 ‘월남 특수’라고 하는 피의 대가는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피를 흘린 사람만 억울하게 당하는 체제, 그게 바로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흥겹게 울려 퍼지던 1960년대 말의 한국 사회였다.

임영신도 지식인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박정희가 원하는 모범적인 지식인상은 바로 임영신이었을 것이다. 1965년 8월 356명의 교수가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박정희는 그들을 “학생데모를 영웅시하고 그들을 선동함으로써 자기가 입신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회주의 학자, 학생의 주장에 아부하고 그 감정에 영합하여 값싼 인기를 얻지 않고서는 자기의 무식과 무능을 감출 수 없는 사이비 학자, 신분이 보장됨을 기화로 삼아 책임도 지지 못할 망언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무책임한 학자들”이라고 매도했다. 한일협정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옳은 정답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기회주의’에서부터 ‘사이비’에 이르기까지 그런 험한 욕을 먹어야 한다면, 박정희를 비롯한 5·16 세력이 예찬한 4·19 정신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박정희가 원한 지식인상은 정권에 참여한 평가교수단이었다. 「제1부 제3장 누가 ‘기회주의 지식인’인가?」

1966년 5월 24일, 부산세관은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 자재로 꾸며 들어와 판매하려던 걸 적발했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부산세관은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 만 원을 매겼다. 이게 세칭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의 시발이었다. 『경향신문』 9월 15일자 특종 보도로 이 밀수 사건이 세상에 폭로되자, 신문들은 일제히 비분강개조의 비판을 쏟아냈다. 『동아일보』 9월 16일자 사설 「삼성 재벌의 밀수」는 이렇게 주장했다. “밀수, 그것은 곧 망국이다.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나아가 나라를 망치는 흉악 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럽고 끔찍스러운 범죄……또한 5·16 이후 이 망국 행위를 근절키 위해 특별입법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까지 만들어 어떤 밀수 항목에는 사형을 언도한 일까지 있다.” 「제2부 제2장 한국비료 사건: 박정희와 이병철의 합작 음모」

3월 24일 제6대 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고, 4월 3일 입후보 등록이 마감되었다. 박정희와 윤보선 외에도 오재영(통한당), 김준연(민중당), 전진한(한독당), 이세진(정의당) 등 모두 6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민주공화당은 “틀림없다 공화당! 황소 힘이 제일이다”, “박 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 “중단하면 후퇴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는 선거 구호를 내세운 반면,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봄에는 갈아치자”,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는 선거 구호를 외쳤다. 윤보선은 베트남전쟁 파병이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1963년 대선에서 색깔 전쟁에 앞장섰던 윤보선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그건 윤보선의 평소 신념이나 철학에서 나온 비판이라기보다는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한 정략의 목적이 강한 비판이었다. 「제3부 제2장 제6대 대선: 다시 붙은 박정희와 윤보선」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제1부 1965년: ‘한일협정’과 ‘월남 파병’

제1장 증산·수출·건설: ‘수출 아니면 죽음’

‘강력하고 유능한 수출 총사령관’ · 19 재벌들의 좌우명, “차관을 잡으라!” · 21 공사비의 10%는 무조건 정치자금 · 23 로스토의 경제성장 5단계설 · 25 “한국 경제는 이미 도약 단계” · 27 ‘개발독재 최고의 이론가’ · 28

역사 산책 1 ‘머리카락 도둑’과 ‘머리 기르기 운동’ · 31

제2장 한일 국교 정상화: ‘졸속·굴욕’이었는가?
2·19 한일협정 기본조약 가조인 · 34 “분쇄하자 매춘외교, 타도하자 매판자본” · 36 1965년 6·22 한일협정 조인 · 38 8·14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통과 · 40 1965년 8~9월의 반대투쟁 · 43 야당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 45 ‘3억 달러+α’는 너무 했다 · 47 “백이숙제류의 민족주의” · 49

제3장 누가 ‘기회주의 지식인’인가?
또 5·16 미화에 동원된 4·19 · 51 ‘힘의 논리’에 따른 변신 · 52 박정희의 ‘기회주의 지식인’ 비판 · 54 학생운동을 외면한 향토개척단 · 55

역사 산책 2 이승만의 사망 · 58

제4장 월남 파병: ‘맹호는 간다’
비둘기부대의 파병 · 61 미국의 열렬한 박정희 환대 · 63 강재구 산화, 맹호·청룡 부대 파병 환송 · 65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자기모순 · 68

제5장 『중앙일보』 창간, 라디오의 ‘코미디 경쟁’
이병철이 『중앙일보』를 창간한 이유 · 71 이병철의 ‘중앙매스컴센터’ · 73 5개 라디오 방송사의 코미디 경쟁 · 75 <7인의 여포로>·<군번 없는 병사>·<춘몽> · 77 <저 하늘에도 슬픔이> · 79 장영철의 폭로, “프로레슬링은 쇼다” · 80

제2부 1966년: ‘정경유착’과 ‘한미유착’

제1장 ‘주체 외교’와 한미행정협정

‘주체 외교’와 ‘기회주의 외교’ · 85 한미행정협정 또는 소파 체결 · 88 미국의 한국 지식계 장악 · 89 서민호 구속과 국시 논란 · 91

제2장 한국비료 사건: 박정희와 이병철의 합작 음모
『중앙일보』에 대한 견제 심리? · 94 ‘중앙 매스컴’의 삼성 지원사격 · 97 김두한의 인분 세례 사건 · 99 실패로 돌아간 이병철의 ‘오리발 작전’ · 101 삼성의 2,000억 원대 밀수 · 103 이병철을 배신한 박정희 · 104 “박정희야말로 밀수 왕초” · 107

역사 산책 3 김두한의 배후엔 김종필이 있었는가? · 108

제3장 존슨의 방한: 광적인 환영
미국 부통령 험프리의 방한 · 110 ‘용병 시비’만 낳은 ‘브라운 각서’ · 112 박정희와 존슨의 ‘사랑 나누기’ · 114 “정부도 350만 서울 시민도 미쳤다” · 116 박정희 정권의 ‘기생 파티 중독증’ · 118

제4장 “서울은 만원이다”
서울 시민의 3분의 1이 무허가주택 거주 · 120 윤치영이 일을 하지 않은 이유 · 122 김현옥, 불도저 중의 불도저 · 124

제5장 『경향신문』 경매, 기자 테러
박정희가 시킨 중앙정보부의 음모극 · 125 ‘부정부패의 국유화’ · 127 박정희 정권의 아픈 곳 건드리면 테러 · 129 ‘세계 속의 한국’에 굶주린 한국인 · 130 <하숙생>과 <동백 아가씨> · 132

제3부 1967년: ‘정치공작’과 ‘국가 테러’

제1장 귀순자 이수근은 이중간첩이었는가?

중앙통신사 부사장의 북한 탈출 · 137 이수근은 대선을 앞둔 박정희에겐 호재 · 139 이수근이 ‘위장 간첩’이었다는 충격 · 141 이수근은 소설 『광장』의 이명준인가? · 143 ‘2년 징역’을 예상했다 사형을 당한 이수근 · 145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배경옥 · 147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 · 149 이수근·방준모의 성격 충돌이 빚은 비극인가? · 151

제2장 제6대 대선: 다시 붙은 박정희와 윤보선
‘사쿠라 집단’과 ‘선동 집단’의 결탁 · 153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 · 155 박정희 51.5%, 윤보선 40.9% · 157 박정희의 ‘호박쌈과 보리밥’ 이미지 · 159

제3장 박정희, 지역 분열주의의 원흉인가?
박정희의 지역주의와 영남패권주의 · 162 “호남 푸대접의 진상은 어떤가?” · 163 36년 걸린 호남선 복선화 · 165

제4장 제7대 총선: 3선 개헌을 위하여
자유당식 ‘선거 부정’과 ‘야당 토벌작전’ · 168 박정희의 ‘김대중 죽이기·’ 169 민주공화당 130석, 신민당 44석 · 171 뒷감당을 못하는 야당의 상습적인 극한투쟁 · 174

제5장 “반미는 곧 용공이다”
엉터리 반공법의 위력 · 176 「분지」의 작가 남정현 구속 · 178 홍만수는 비치를 겁탈했는가? · 180

제6장 동백림 사건: ‘국가 테러리즘’
동백림의 ‘북괴대남적화공작단’? · 183 ‘리버럴한 분위기’가 죄였는가? · 185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그로테스크한 코미디’ · 187 코미디치고는 엄청나게 슬픈 코미디 · 188 윤이상의 비극, “내 고향은 독일” ‧ 190

제7장 북한: 자주노선과 김일성 숭배 구조의 완성
“이팝에 고깃국”의 꿈 · 193 북한과 소련의 갈등 · 194 북한과 중국의 갈등 · 196 김일성 사상으로 규정된 주체사상의 강조 · 199 김일성 유일 체제로 전환하다 · 200 북한의 전쟁불사론 · 202

제8장 “건설은 나의 종교”: 한강 개발과 여의도 건설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 · 205 한강 연안도로와 여의도 윤중제 · 206 3·1 고가도로와 워커힐 기생 파티 · 209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서울 유치 반납 · 211

제9장 언론산업의 성장, 언론자유의 쇠퇴
박정희 정권의 언론 포섭 공작 · 213 신문들의 ‘영혼이 없는 성장’ · 215 ‘신민당 소명서’ 사건 · 217 내리막길에 선 『사상계』· 219 김창선 매몰 사건 보도 · 220

제10장 경제개발의 영향을 받은 영화와 가요
‘만주물’과 <팔도강산>의 인기 · 222 총천연색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 · 225 윤복희와 앙드레김의 도시 패션 · 227 <가슴 아프게>와 <섬마을 선생님> · 228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 230

제4부 1968년: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제1장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

‘적대적 공존관계’와 ‘거울 영상 효과’ · 235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접근한 무장 공비 · 236 박정희, “북을 공격해야겠소” · 239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 241 박정희의 분노와 배신감 · 243 밴스, “박정희는 위험한 인물” · 244 푸에블로호 음모론 · 246 향토예비군과 주민등록증 · 247

제2장 국민복지회 사건: 박정희와 김종필의 애증 관계
박정희의 이간질 용인술 · 250 김종필의 정계 은퇴 선언 · 252 김종필, 박정희에 대한 울분 폭발 · 255 김종필, “나 자신에게도 염증이 났다” ‧ 256

제3장 통일혁명당 사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사건
50명이 구속된 ‘통일혁명당 사건’ · 259 20년 감옥살이를 하게 된 신영복 · 262 이승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263 “우리가 커서 너의 원수를 갚아주마” · 265 EC-121기 격추 사건 · 268

제4장 국민교육헌장: ‘유신쿠데타의 정신적 전주곡’
박정희의 멸사봉공주의 · 270 모든 학생이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 · 271 박종홍 작곡, 윤치영 연주 · 273

제5장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
연이은 ‘『신동아』 필화 사건’ · 276 “신문은 중앙정보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 278 주간지, 특히 『선데이서울』의 활약 · 279 『한국일보』 장기영의 활약 · 281 『조선일보』의 코리아나호텔 특혜 · 283

제6장 강남 개발과 아파트 홍보
압구정·서초·개포는 전화 없는 ‘벙어리동’ · 286 제3한강교가 만든 ‘말죽거리 신화’ · 288 왜 ‘복부인’을 탓했는가? · 290 ‘아파트 예찬론’ 홍보 · 291 철거민을 위한 시민아파트의 등장 · 292 서울 종로3가의 ‘나비 작전’ · 294

제5부 1969년: 독선·독단·독주의 정치

제1장 박정희, “단군 이래의 위인”인가?

1969년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 · 299 박정희는 ‘뒤집기 전문가’ · 300 박정희의 부결 지시를 어긴 4·8 항명 사건 · 303 김영삼 테러 미수 사건 · 304 윤치영의 아첨에 대한 비판 · 305 박정희의 ‘벼랑 끝 전술’ · 307 박정희의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완성한 역사” · 309 박정희의 ‘제주도 핵기지화’ 카드 · 312 지식인의 아첨, 신민당의 변절자 응징 · 313

제2장 “언론의 타락, 민주주의의 죽음”
『사상계』의 몰락, 여성지의 번영 · 315 원초적 본능엔 무제한 자유 · 317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변신 · 319 기자의 춥고 배고픈 빈곤 · 320 촌지 또는 전직 · 321 미원·미풍 조미료 광고방송 사건 · 323

제3장 박정희의 금권 정치
부패를 단속하면 행정이 마비되는 나라 · 326 도로 공사비의 30~40%는 뇌물 · 327 개발독재 체제는 ‘동물의 왕국’ · 328 정치자금 징수 경쟁 · 330 돈으로 사람들을 구워 삶는 ‘능력’ · 332 7년간 땅값 14배 폭등 · 334 박정희에게 보낸 전태일의 탄원서 · 326

제4장 3선 개헌: “그는 ‘샤먼’이 되어 있었다”
주전자 뚜껑으로 날치기 통과 · 338 ‘밀가루 헌법’과 ‘논공행상 잔치판’ · 340 ‘남산 멧돼지’ 김형욱의 용도 폐기 · 341 박정희의 권력 중독 · 343 비극의 씨앗: “나 아니면 안 된다” · 346

제5장 ‘베트남 특수’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경제개발에 투입된 ‘파월 외환 수입’ · 348 전사 5,000명, 부상 1만 6,000명 · 350 “돈 있고 백 있는 놈들” · 352

제6장 ‘뺑뺑이 세대’: 중학교 추첨 배정제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 · 355 한국부인회의 ‘치맛바람 자숙 운동’ · 357 열등감을 양산한 ‘KS병’ · 358 ‘우골탑’을 위해 서울로 몰려드는 줄 · 361

제7장 ‘서울의 찬가’: 서울은 초만원이다
서울특별시의 시가가 된 <서울의 찬가> · 363 세계 최고의 ‘압축적 도시화’ ‧ 364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 · 366 박정희 정권의 군사작전식 남산 개발 · 368 고층건물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 · 371 자동차도 ‘조국 근대화’의 상징 · 373 맨땅에 내던져진 14만 5,000여 명의 빈민들 · 375

역사 산책 4 “3명의 아이를 3살 터울로 35세 이전에 낳자” · 376

제8장 영화의 쇠락, TV의 성장
1969년,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 · 378 전자산업 육성, MBC-TV 개국 · 380 ‘인간의 달 착륙’ 이벤트와 만화방의 인기 · 381 광고계에 혁신을 일으킨 코카콜라 광고 · 384 클리프 리처드와 스타킹 광고 · 385

맺는말 : ‘기회주의 공화국’의 명암
거시적·미시적 분석의 조화 · 389 장면에 대한 극단적 부정과 긍정을 넘어서 · 391 ‘구조’와 ‘개인’ 둘 다 중요하다 · 393 5·16 군사쿠데타, 기회주의의 완성 · 395 새로운 도덕 교과서가 된 쿠데타의 성공 · 397 다시 ‘인물’과 ‘구조’ 사이의 균형으로 · 399 사회과학적 일반론의 한계 · 401 극단주의, 박정희 체제의 유산 · 403 ‘창조적 기회주의’와 ‘헤게모니 투쟁’ · 404 한국적 삶의 문법이 된 기회주의 · 407

주 · 410

  회원리뷰

리뷰쓰기

    이 분야의 신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