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대 그리스 알파벳부터 디지털 컴퓨터까지를 가로지르며 매체를 시간 저장·조작 기술로 사유한다.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로 불리는 키틀러는 기술을 인간 증강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 파악하며, 매체유물론이나 기술결정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인간적 매체론을 전개한다. 문자 중심 인문학과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매체의 역사성을 물질적 기반에서 다시 묻는다.
아날로그 매체의 붕괴와 디지털 데이터로의 수렴 속에서, 소프트웨어가 은폐한 하드웨어의 한계와 오류, 그리고 기계의 자율성이 드러난다. 키틀러는 기술을 의미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신호와 회로, 계산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가르는 체계로 이해하며, 문화기술과 TAM(시간축 조작) 개념을 통해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지각과 사유를 재배치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냉철하게 재구성하는 매체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고대 그리스 알파벳부터 컴퓨터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의 매체고고학, 그 속에서 시간 저장·조작 기술로서 매체들의 역사성이 드러난다. 기술을 인간 증강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 강조하는 비인간적인 것 혹은 기계적인 것에 대한 사유!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 키틀러의 비인간적 매체론.
키틀러는 논쟁적이다. ‘매체유물론’이나 ‘기술결정론’ 등 같은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되는 이해로는 미흡하다. 20세기 초 문자의 독점을 깨뜨리는 기술 매체, 특히 아날로그 세 매체의 등장을 역동적으로 분석하던 그의 촌철살인 명제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디지털 매체에 대한 심층 분석, 엔지니어링과 수학에 대한 관심, ‘시간축 조작’ 개념 확립, 고대 그리스 문화로의 전회 등 아직 미답의 영역이 남아 있다. 모든 문화적 영역의 심부에서 디지털화가 본격화되던 1990년 중반, 디지털 기술이 불러오는 ‘매체 융합’적 변화를 목격한 그가 ‘기록시스템 2000’ 혹은 매체의 미래를 어떻게 구상했는지도 미지수다. 그럴 때 우리의 경험과 기술적 데이터가 하나로 수렴하는 기술 사회의 한복판에서, 그 물질적 기반과 인간 경험이 새롭게 구성되는 토대를 다시 사유한다.
이제 아날로그 매체들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수학적 데이터 코드로 수렴되는 우리 기술 환경에 대한 사유에서 키틀러의 관심이 매체유물론 같은 의미론적 배경을 성립하는 데 있지 않고 ‘지독한’ 인간중심주의를 갈파하는 데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야 그가 디지털 매체의 도래로 매체의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한 뒤 본격적으로 문화기술 연구(“문학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라는 문화기술 위에서 이뤄지며 문화기술이 달라지면 문학도 달라진다”)에 매진한 이유,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재배치한 이 유를 짐작할 수 있다.
키틀러는 기술이 늘 목적성에서 이탈해 ‘오류’를 일으키는 존재, 자신의 자율성을 드러내는 존재임을 역설함으로써 근대 프로젝트가 구축한 ‘정상 상태’, 그 인간 중심적 환상을 전복한다. 그로써 ‘인간이 기계를 도구로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신화를 여지없이 걷어낸다. 기술이 인간에 의해 통제되는 도구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자율성을 지닌 체계, 자기결정적 구조를 가진 존재로 이해될 때, 키틀러는 기술 발전에 따라 인간이 점차 배제되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기술중심주의자가 아니라, 인간과 기계가 서로 다른 척도를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사유를 통해 인공물로 이뤄진 세계 속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는 이론가로 자리매김된다.
◎ 하드웨어 옹호, 프로그램 불가능성
워드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작동의 결과만을 볼 뿐 프로그램의 작동을 위한 필수적 오퍼레이션은 지각하지 않는다. 많은 이가 소프트웨어를 컴퓨터를 보편적 미디어 장치로 바꿔놓은 성공의 주역으로, “세계를 달리게 하는 보편적 엔진”, “현대사회의 모든 것을 묶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마노비치)로 상찬할 때, 거꾸로 키틀러는 소프트웨어를 컴퓨터의 물리적 한계 지점인 프로그램 불가능한 지점을 은폐하고 기술의 승리와 인간의 성취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한다. 즉 하드웨어의 작동을 가리기 위한 “언어적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
키틀러는 소프트웨어(“포스트모던 바벨탑”)를 기술 진보의 결과가 아니라 언어의 자기증식이자 기호 체계의 자율화로 본다. 컴퓨터의 성능이 향상될수록 소프트웨어는 점점 더 복잡한 언어의 층을 쌓아 올릴 뿐 그 언어는 더 이상 물리적 기계의 작동과 직접 대응하지 않는 현실에서, 소프트웨어는 인간이 만든 언어가 자기폐쇄적이고 불투명한 체계로 비대해짐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컴퓨터의 성능을 얘기할 때 기준이 되는 그 속도나 작업 처리량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에서 결정된다. “아무리 복잡한 명령이라도 계산 가능한 연산으로 분해된 뒤 처리돼야 하므로 (…) 하드웨어가 가능성과 불가능성 자체를 결정한다.” “소프트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허상일 뿐이며 기계 자체는 아무 의미도 해석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는 텍스트와 언어, 의미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해온 전통적 인문학의 관행을 지속한다.” 하지만 키틀러는 현대의 기술 사회는 기호가 아니라 신호로 작동하므로 그런 관점이 무용하다고 본다. 디지털 컴퓨터 역시 기호를 처리하는 장치가 아니라 전자 신호와 하드웨어 회로 등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인식돼야 한다는 것. 그가 자신의 논문 모음집(1980) 제목에 ‘정신과학으로부터 정신의 추방’이라 적은 것은 바로 이런 인식 때문이다.
키틀러가 튜링의 ‘계산 가능성’에 대해 언어를 논리적 계산 체계로 환원하고 기계적 계산이 가능한 형태로 정식화함으로써 기호 작용의 인간 중심적 이해에서 탈피해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관점에서 언어를 다룰 길을 열었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키틀러]는 철학자들의 주도하에 인문학에서 ‘계산’과 관련된 여러 유형의 지식 영역들이 배제돼온 역사를 비판한다. 그리고 철학은 그런 배제의 역사 속에서 모든 문화적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키틀러는 자연과학과 실용적 학문이 철학의 영역에서 분리돼나가는 과정에서 철학은 해석학이 되고 그런 인간 중심적 사유의 지평이 심지어 현대 컴퓨터 과학에서도 수학적 엄밀함을 상실해 기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고 본다.”
그런 소프트웨어 때문에 컴퓨터가 마치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여겨지나 그 물질적 기반인 하드웨어엔 제어할 수 없는 지점, 즉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지점이 남는다. 다시 말해, 컴퓨터의 물질성엔 환원 불가능한 감각적 실재가 있다.
그렇다면 컴퓨터 하드웨어의 ‘소음’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그런 상황을 ‘작동 오류’로 간주한다. 하지만 “인간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회로 상태에 대해 완전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드웨어 차원에선 언제나 양자역학적 터널링 같은 제거 불가능한 소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의 완전한 작동 양태는 인간에게 불투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기술은 또한 늘 ‘오류’를 일으킴으로써 그 목적성에서 이탈해 자신의 ‘실재성’ 혹은 ‘타자성’을 드러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소프트웨어의 다양한 성취에 가려져 있던 인간중심주의가 탈각된다.
◎ 인간 중심적 기술 이해에 대한 반기: 기술의 인간화 탈피 과정
“키틀러는 인간의 용량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것을 엄격히 거부한다.”(피터스) 매클루언이나 프로이트에 대해 그들이 기술적 장치를 신체 기관의 보철로 간주하고 인간이 당연히 모든 미디어의 주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기술은 인간의 개별적, 집단적 신체와 전혀 무관하게 스스로 발전(한다).” 그리고 “인간은 미디어가 모델과 은유를 제공하기 전까지 자신의 지각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보는, 기술과 신체의 관계를 전복한다.
이런 키틀러의 철학은 기술의 우위를 말하고 인간을 배제하는 반휴머니즘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의 이론의 기저에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다.
전통적인 상징 기술이자 인간 중심적인 기록 수단인 문자와 악보와 달리 기술 매체(축음기와 영화 등)는 실재와 직접 접촉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술 개발 과정에선 문자 중심의 사유가 강하게 작동했다. 예컨대 기술사는 초기 음향 기술을 개발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소리를 문자로 시각화하려고 노력했는지 증명하고 있다. 에두아르레옹 스콧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에밀 베를리너 같은 음향 재생 기술의 핵심적 개발자들은 소리 재생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 소리를 문자로 쓰는 자동기록장치를 개발하려고 했다. 이는 물리적 실재를 기록하는 일보다 문화적 기술인 글쓰기, 즉 ‘인간의 상징적 중개’를 훨씬 더 중시했던 뿌리 깊은 관념을 보여준다. 그렇게 언어적 차원과 이성 중심의 인간 개념을 떨쳐내는 데는 지난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했다.
키틀러가 기계적 감각 영역과 간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포스트휴먼적 인간을 직접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사이보그’라고 주장하는 앤디 클라크의 주장과는 결이 다르다. 클라크는 기술을 ‘확장된 마음’이라는 인지적, 협력적 모델에서 이해하는 반면, 키틀러는 기술을 인간을 넘어 독자적 원리와 체제로 작동하는 장치들의 체계로 본다. 즉 인간과 기술의 공생은 클라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중심적 능력의 증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키틀러의 관점에선 기술이 인간을 포함한 환경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비인간적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클라크가 인간 능력의 확장을 전제로 한다면, 키틀러의 기술철학은 비인간적 매체가 인간의 지각과 기억, 사유를 조건화하고 재배치하는 방식을 전면화하는 데 초점이 있다.
사진과 영화 등엔 그나마 그 물질적 토대에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은 모든 기록 내용이 기계어로 처리되어 인간의 지각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제 디지털 컴퓨터의 매개 과정은 일종의 공동 영역, 즉 인간기계 공동의 감성적 지각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바로 이 공동 영역 속에서 이뤄진다. 그렇게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이어 디지털 기술이 삶의 기본 조건이 되는 포스트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있다.
◎ 시간 저장 기술, TAM(시간축 조작)
키틀러에게 매체란 “무엇보다도 데이터 혹은 기호들의 저장, 전송, 재생을 위한 문화적 기술”이다. 문자 텍스트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정보를 공간 좌표 위에 배치하게 하는데 이런 배치가 반복 및 변경 가능성을 엶으로써 시간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키틀러]가 문자를 매체로 보는 것은 그것이 시간을 공간화함으로써 교환과 전도 등 조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지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니다.”
키틀러는 ‘글쓰기는 역사적으로 시간을 조작하는 최초의 기술’이라 말한다. 기술 매체의 역할은 무엇보다 시간 저장과 조작이다. “기술 매체에 의해 시간의 비가역적 흐름은 일종의 공간적 질서로 바뀌게 되고 그로 인해 변경과 반복, 역전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컴퓨터가 읽고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읽기와 쓰기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기술 매체의 작동 논리는 ‘인간 지각의 시간’이라는 레이더 아래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디지털 컴퓨터의 모든 처리는 인간의 지각 영역을 벗어난 방식으로 작동하는 TAM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또 키틀러는 TAM을 설명할 기본적인 이론적 틀로 섀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적용한다. 시간적 시퀀스를 정량화, 목록화하는 최초의 보편적 수학 모델인 섀넌의 이론은 우발성이 시간적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정보로 계산될 수 있음을 밝힌다. 키틀러는 섀넌의 정보 이론에 기반해 신호와 잡음 모두 동일한 시간적 시퀀스의 확률적 변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잡음은 단순한 오류나 방해가 아니라 시간축 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코드 조작이라는 것. 그렇게 신호와 잡음의 차이가 평준화되고 잡음은 코드의 일종으로 해석된다. 바로 그렇게 시간적 사건을 정보량으로 측정하고 신호와 잡음의 모든 변형을 수학적으로 표상할 수 있게 하는 섀넌의 모델은 시간적 연속성을 정량화해 재배열하는 과정인 TAM이 작동할 기초적 언어를 제공한다. 그때 “그 결과로 생성된 텍스트는 인간의 해석 능력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기계가 아니면 읽을 수 없는 텍스트, 기계만이 디코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콘래드의 공식에 따르면 구조적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안정적이고 이산적이며 독립적인 요소들을 가지나 그 요소들 간의 연결은 필연적으로 제한된다. 키틀러는 이 개념을 통해 실제 세계와 이산적 프로그램의 괴리를 설명한다. 실제 세계는 열려 있고 프로그램 세계는 닫혀 있기에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의 체계가 포섭하지 못하는 신호의 실재성과 물질의 복잡성, 하드웨어적 외부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산적 처리 시스템이 처리할 수 없는 실제 세계의 복잡성을 따라잡으려면 콘래드의 ‘프로그래밍 불가 시스템’이 보여주는 정보처리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튜링식 계산 모델을 초과하거나 벗어나는 방식으로 정보처리를 수행하는 시스템을 뜻할 것이다. 왜냐하면 디지털 컴퓨터는 엄청난 실제 숫자들의 눈사태, 즉 구름과 파도와 전쟁과 같은 연속적인 환경에 직면해 그것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온전한 처리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키틀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오히려 튜링은 ‘계산 가능성의 정식화’를 제기함으로써 서구 형이상학이 오랫동안 망각해온 ‘수학의 복원’을 이뤘다. 튜링의 계산 가능성은, 언어를 논리적 계산 체계로 환원하고 기계적 계산이 가능한 형태로 정식화함으로써 기호 작용의 인간 중심적 이해에서 탈피해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관점에서 언어를 다룰 길을 열었다. 이는 의미와 해석을 제거한 기계적 처리로서 철저히 비인간적 언어 체계를 긍정하는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계산 가능한 것’과 ‘수학의 귀환’에 대한 환영이야말로 키틀러의 기술철학이 지닌 독특함이라 할 수 있다.
키틀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망각’이 사실은 ‘수학 망각’임을 밝히려고 한다. 서구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수학 망각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키틀러는 하이데거가 암시하는 인간의 조건으로서 기술과의 관계에 동의하나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은 다르다. 그 역시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나 그 원인을 수학 망각과 과도한 언어의 지배에서 찾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최소영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 홍익대 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 주제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매체이론 연구’였으며 현재 홍익대, 강릉원주대, 충북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매체 기술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미지 존재론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라 재편되는 지각 구조와 감각 경험의 새로운 형식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기술과 예술이 맺는 관계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고 재해석되는가의 문제 역시 중요한 연구 주제다. 작성한 책으로 『인공지능시대의 예술』(공저), 『히토 슈타이얼』, 『AI와 미디어 아트의 진화』 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는 글
1부 키틀러의 비인간
1장 ‘소프트웨어는 없다’ 명제와 하드웨어 옹호
2장 컴퓨터 그래픽스의 텍스트성과 알고리듬
3장 반휴머니즘에서 ‘비밀스러운 휴머니즘’으로: 마크 핸슨의 키틀러 독해
2부 키틀러의 매체
4장 시간 저장 기술과 지각: TAM과 도플갱어
5장 문자 매체의 계보학
6장 문화기술과 매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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