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몰입도 높은 스토리와 문학적 가치를 모두 가져간
독일 추리소설의 대가 뒤렌마트의 대표작뒤렌마트의 《판사와 형리》는 추리소설이라는 전통적 카테고리를 이어받되 그 전형적 도식에 반기를 든 내용을 담아내 문학사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으로, 실존 철학과 탐정 장르를 융합한 범죄소설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탐정소설이라는 전통적 카테고리를 이어받되 그 전형적 도식에 반기를 든 내용을 전개해 장르 소설 독자뿐만 아니라 출간 당시 순수문학 비평에서도 각광받았다.
뒤렌마트는 본래 희곡을 쓰길 원했지만, 고정 수입원이 없어 생활고를 겪던 차에 스위스의 사회비평 잡지 《베오바하터》의 연재물 청탁을 받고 추리물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0~1951년에 〈판사와 형리〉와 〈혐의〉 두 작품을 연재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받은 뒤렌마트는 작가로서 자립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훗날 두 작품을 엮어 출간된 단행본 《판사와 형리》는 1960년대까지 독일에서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고, 영미권에까지 진출한 데다 교과서에까지 수록되며 문학적 가치를 공인받았다. 이는 《판사와 형리》가 이야기로서의 재미, 탄탄한 문학적 구성, 작가의 철학과 가치관을 골고루 담아내 다양한 분야의 독자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세계관과 인물들, 비틀린 전개
추리소설의 전형을 벗어나 정의와 악의 본질을 묻다《판사와 형리》는 언뜻 보기에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그 규칙을 해체하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진실을 찾기 위한 수사가 시작되며, 탐정은 단서들을 추적해 진범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고전적 추리소설의 골격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뒤렌마트는 범인을 밝혀내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획기적인 시도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개하며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탐정소설의 기본 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수수께끼에 가려진 범죄(흔히 살인)가 사건의 발단을 이룬다’. 둘째,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는 보통 범행 동기가 설명되며, 범행 이전에 있었던 역사가 재구성된다. 셋째, ‘유능한 주인공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이어 범행자들이 공공 경찰에 인도되는 것으로 사건은 막이 내린다’. 범죄를 저지른 악인을 추적한다는 이야기의 특성상, 탐정소설은 권선징악을 강조하며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뒤렌마트의 소설은 범죄를 추적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통적 탐정소설의 도식과 상당 부분 어긋난다. 먼저 처음 등장한 사건은 이야기를 여는 서막에 불과할 뿐, 실제로 주인공과 악인은 40년간 대립하는 관계였으며 이번 사건은 그들이 거쳐온 수많은 과정에 우연히 얽혀든 다른 사건임이 밝혀진다. 명쾌한 수사 과정도, 합리적 해결도, 사필귀정의 교훈도 보여주지 않는다. 선(善)의 대표자로 보이는 주인공도, 열정을 불태우며 난관에 부딪혀도 몇 번이고 일어서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절대적인 악 앞에서 나약한 자신의 무력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암에 걸린 병자로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악인들은 수사관보다 한 수 위 능력을 보여주며 주인공을 농락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 일도 없다. 통쾌한 해피엔딩보다 현실적을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불합리한 듯 보이는 소설의 특징은 뒤렌마트의 문학 속 세계관과 작가의 가치관을 잘 드러낸다. 탐정소설은 악으로 잠시 엉클어졌던 세계가 선한 인물의 해결로 질서를 되찾는다는, 세상을 향한 ‘믿음’에 기반한 문학이다. 이렇듯 질서를 반드시 되찾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탐정소설의 사건은 치밀한 계획을 토대로 한 필연을 따라 전개된다. 그러나 뒤렌마트는 이런 믿음에 의혹을 제기한다. 어떻게 해도 세상은 선하게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부패하고 말았다는 그의 세계관은 “세상은 썩었어요, 경감님”(248쪽)이라는 찬츠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세계는 질서와 계획에 따라 돌아가기보다 우연에 따라 발생하고 사라진다고 여긴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우연에 의해 우리는 정의롭기도 하고, 우연에 의해 우리는 그릇되기도”(274쪽) 한다는 뒤렌마트의 세계는 냉혹하리만치 현실적이다.
부패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힘은 무엇인가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의 진정한 용기를 그려내다뒤렌마트의 탐정소설에는 명쾌한 해결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뒤렌마트가 인간이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고 여기는 비관주의자는 아니다. 뒤렌마트의 모든 작품에는 결함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그 세상에 맞서 싸우는 ‘개인’이 반드시 등장한다. 분명코 세상에는 수많은 절망이 있지만 “절망은 이 세상의 결과가 아니라 세상에 주는 우리의 답변 가운데 하나”이며, 다른 답변은 “이 세상에 맞서 굴하지 않고 존속하겠다는 결단”일 것이라고 뒤렌마트는 생각한다. 그는 “용기 있는 인간을 제시하기란 여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부패한 세계와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저항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다(307쪽).
뒤렌마트가 그려내는 악역들은 법과 도덕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들며, 사회가 믿어온 정의의 시스템을 조롱하듯 무너뜨리고 인간 내면에 잠재된 냉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반면 이들과 대척점에 선 주인공 베르라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약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여느 탐정소설의 주인공과 달리, 베르라하는 합법적 수단으로 체포할 수 없는 적수를 쓰러뜨리려고 스스로 도덕적이고 법률적인 비행을 저지르는 모순에 빠진다. 이토록 무기력하고 결함 많은 수사관을 통해, 뒤렌마트는 무력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맞서겠다는 약자의 결단을 보여준다. 이렇게 뒤렌마트는 절대적인 주인공 대신 현실 속 우리 중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독자가 생생하게 이야기에 몰입해서 소설을 읽어나가도록 만든다.
《판사와 형리》가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명쾌한 해답 대신 쉽게 잊히지 않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건은 종결되지만,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확신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결말에 도달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의문과 마주한다. 정의란 무엇이며, 법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인간은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도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뒤렌마트는 《판사와 형리》를 통해 추리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지점을 보여주며, 이 작품을 단순한 장르소설이 아닌 현대 문학의 중요한 성취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클레닌은 자동차 문을 열고 낯선 자의 어깨에 친절하게 손을 얹었다. 그러나 순간 그는 그 남자가 죽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수리에 총알이 관통해 있었다. 그제야 클레닌은 오른편 차 문이 열려 있는 것도 깨달았다. 차 안을 보니 피가 많이 흘러 있지도 않았고, 시체가 걸친 짙은 회색 코트도 말짱해 보였다. 외투 호주머니에서는 노란 지갑의 한쪽 끝이 빠져나와 비쳤다. 그것을 뽑아본 클레닌은, 사망자가 베른 시경 경위 울리히 슈미트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신한테 말하겠소이다”라며 그는 입을 뗐다. “나는 콘스탄티노플과 베른 사이에서 경찰관들을 몇천 명 보아왔어요. 훌륭한 경찰들과 졸렬한 경찰들을……. 대부분, 우리가 온갖 종류의 감옥에 채워 넣는 그런 형편없는 천민들보다 나을 것도 없었지요. 단지 그들은 우연히도 법의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점만 달랐어요. 그렇지만 슈미트라면 나는 힘껏 감싸주겠소. 그 친구는 가장 유능한 경찰관이었다오. 그는 우리 모두를 투옥할 만한 자격이 있었어요. 아주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였지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고, 알고 있는 것을 침묵할 줄도 알며, 또 말할 필요가 있을 때만 입을 열었어요. 그 친구를 본받아야 하오, 찬츠. 그는 우리를 능가하는 인물이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