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태어난 자리, 삶의 시작
-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길 위에 서 있다. 다만 어디로 향하는 지가 다를 뿐이다.
나는 1969년 6월 21일,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날,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13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해 여름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어른들은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기억이 없지만 ‘뜨거웠다’는 말 하나로 내가 태어난 계절과 그 시절의 삶을 짐작하게 된다. 그 한마디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고단함과 땀으로 하루를 버텨내던 시간들이 함께 존재해 있었다.
소동철·임양순 님의 5남매 중 넷째,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과 누나, 그리고 여동생 사이에서 나는 늘 중간에 끼어 있는 아이였다. 앞으로는 따라가야 했고, 뒤로는 양보해야 했다. 이것이 훗날 내 삶의 태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나서기보다는 상황을 살피고, 조용히 자기 몫을 찾는 태도 말이다. 나는 그저 나서기 싫어하고, 묵묵히 따라가는 아이였다.
나는 순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어른들의 그 말씀에 더욱 착한 척하기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가장 현명한 선택처럼 느껴졌는 지 모른다.
우리 집은 작은 편이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동네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아버님이 대단하시다. 그 젊은 나이에 집을 만드신 거 아닌가? 나라면 못했을 일이다.
방 두 개와 광(창고)이 하나였다. 할머니를 포함하여 8명이 살기에는 좁았다. 그래도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차 좋았다. 집의 크기보다 그 안에 흐르던 가족의 숨결이 더 크게 느껴지던 공간이었다.
부자 친구가 당연히 부러울 정도로 형편은 빠듯했지만,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대다수 친구들은 여건이 비슷했고, 그 당시 나는 가난을 걱정할 만큼 속이 들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놀기에 바빴었던 것 같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은 늘 짧았고 놀이는 많았다.
5남매가 줄줄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부모님은 힘드셨다. 납부금, 교과서와 공책, 학비와 준비물 하나 하나가 부담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납부금만큼은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으셨다. 제 때에 못 내는 아이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저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부모가 되고,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을 때,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무거운 책임과 말 없는 헌신이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바탕이 되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작고 가난했던 집의 온기
- 갖지 못한 것은 많았지만 견디는 법을 일찍 배웠고, 부족했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부터 속옷을 입었는 지는 기억이 없다. 단지 내가 기억하는 건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팬티가 나의 첫 팬티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기에 나는 사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고, 잘 입고 다녔다.
아무도 몰랐기에 창피할 일도 아니었다. 그 팬티에서 천의 질감보다도 어머니가 밤마다 바느질하며 보냈을 시간이 먼저 떠오른다.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어린 아이였지만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체검사를 받던 날은 조금 달랐다. 모두가 속옷 차림으로 한 줄로 서 있던 그 공간에서 광목으로 만든 속옷을 입고 있는 아이는 나 혼자였다. 오마이 갓뜨!!! 너무 창피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부끄러움은 지금도 마음 한쪽에 작게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이에게 부끄러움은 상처가 아니라 기억의 깊이로 남는다’는 걸 알았다.
운동화는 나에게 사치였다. 친구들이 신던 운동화가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계란이나 소시지 반찬은 도시락에서 보기 힘들었다. 친구에게 얻어먹으면 그날은 계 탄 날이었다.
꽁보리밥을 먹던 기억이 유난히 많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보리밥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웰빙이 대세지만 나는 쌀밥이 좋다. 그 쌀밥에 대한 취향은 입맛이 아니라 어쩌면 그 시절에 대한 작은 반항이었는지 모른다.
연탄보일러가 들어왔을 때 엄마도 좋으셨겠지만, 사실은 내가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산에 갈퀴나무 하러 가시는 엄마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따뜻함은 단순히 방바닥의 온도가 아니라 아이 하나를 산으로부터 자유롭게 떼어놓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땔감이 떨어질 때쯤이면 우리 동네 어머니들은 갈퀴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시곤 했다. 엄마도 그러셨다. 혼자 가시면 무서우시니까 꼭 같이 가자고 하신다. 안 갈 수도 없고, 가면 심심하고, 일이 끝나도 바로 내려올 수도 없었다.
산림감시원들이 무서웠다. 나무도 뺏기고 벌금도 내기 때문에 들키지 않고 집까지 오려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나?
그 해방감은 상상에 맡긴다.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웃으며 말한다.
“같은 나이인데 마치 우리 아버지 세대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그 말 속에는 놀라움과 안쓰러움이 함께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유년은 분명 같은 시대이면서도 조금 다른 시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을 증명할 사진은 없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우리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기념이 아니라 사치였다. 그래서 나는 사진 대신 기억으로만 그 시절을 꺼내야 한다. 그만큼 내 유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
돌아보면, 모두가 기적이었다
- 아프다는 건,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그때 살아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대덕초등학교 10회로 입학했다. 작은 학교였다. 1학년 전체가 35명, 딸랑 한 반이었다. 졸업 무렵에는 30명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얼마나 친했겠나. 부모님, 형, 누나, 동생, 심지어 개가 몇 마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알 정도였다.
학교는 작았지만 아이들 사이의 거리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가까웠다. 서로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시절이었다.
무명에 가까웠던 대덕초가 장성군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우리 친구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졸업생이 30명밖에 안 된 대덕초에서 중학교 진학할 때, 420명인 장성중학교에 전체 1등과 2등, 비슷한 숫자인 장성여중에 전체 1등과 4등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쇼킹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어떤 학교길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작은 학교가 한순간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 주인공이 나는 아니었지만, 유난히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 덕분에 나 역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던 기억이 있다. 작은 학교라는 이유로 늘 낮게 보이던 시선이 그때만큼은 조금 달라졌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체력도 약했다. 병치레가 잦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는 그게 위험인 줄도 몰랐다. 아이에게는 아픔도, 위험도 대개 지나가는 하루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혼자서 4km를 자전거 타고 약방에 갔다. 고열에, 제대로 먹지도 못해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라면 절대 못 할 일이다. 그날의 더위와 어지러움,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던 길이 지금도 가끔 악몽처럼 떠오른다.
비가 소리 없이 내리던 캄캄한 저녁, 갓 새끼를 낳은 소의 뒤처리를 위해 불빛이 필요했다. 그 시절, 밖에서 전기가 필요하면 두꺼비집에서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다 쓰던 때였다.
나는 비를 맞으며 불법으로 끌어다 쓰던 전등을 들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는데, 갑자기 ‘번쩍하는 불빛과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내가 깨어난 건 서너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시간 동안 깨어나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님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우셨을까? 내가 깨어났을 때, 어머니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눈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의 침묵은 지금 생각해도 내 삶에서 가장 무거운 순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전기에 맞아 오른손을 한 달 정도 쓰지 못했다. 그동안은 숙제를 안 해도 선생님께서 혼내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 있지만, 죽었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지 싶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수없이 많은 생명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까지 살아와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안다. 지금의 내가 당연히 여기고 있는 하루하루가 사실은 수많은 인연과 보호, 그리고 부모의 눈물 위에서 있다는 것을.
작가 소개
지은이 : 소영호
ㆍ전남 장성군 서삼면 출생(1969)ㆍ대덕초등학교(폐교) 졸업(1982)ㆍ장성중학교 졸업(1985)ㆍ장성고등학교 졸업(1988)ㆍ경기대학교 행정학과 졸업(1995)ㆍ미시건주립대학교 국제계획학 석사 졸업(2006)ㆍKDI국제정책대학원 정책학 석사 졸업(2007)ㆍ제5회 지방고등고시 합격(1999.12.)ㆍ신안군 하의면장(2003~2004) ㆍ전남도 농업정책과장(2016~2017)ㆍ고흥군 부군수(2017~2018)ㆍ김영록 전라남도지사 비서실장(2018)ㆍ전남도 정책기획관(2020)ㆍ전남도 농축산식품국장(2021~2022)ㆍ목포시 부시장(2022~2024)ㆍ전남도 전략산업국장(2024~2025)ㆍ전남도 지방이사관(2급) 명예퇴직(2025)ㆍ더불어민주당 입당(2025)ㆍ현)더불어민주당 장성지역위원회 부위원장ㆍ현)소영호장성미래전략연구소 대표ㆍ현)더불어민주당 전남도당 부위원장ㆍ현)김대중재단 장성지회장ㆍ현)더불어민주당 중앙당 전국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ㆍ대통령 표창(2010)ㆍ홍조근정훈장(2020)ㆍ호남유권자연합회 특별공로상(2025)
목차
프롤로그
1 뿌리 장성에서 시작되다
태어난 자리, 삶의 시작 13
작고 가난했던 집의 온기 17
돌아보면 모두가 기적이었다 21
탁구대 앞에서 배운 첫 승부 25
한 사람을 만나 길이 생기다 29
꿈보다 먼저 배운 삶 33
부러움이 꿈이 되던 날 36
선택 앞에서 흔들리다 39
삶의 기준이 바뀌던 날 43
흔들리면서도 돌아서지 않았다 47
함께라는 이름의 용기 52
그날, 이름이 불렸다 57
2 삶 사람과 일에서 배우다
1장 _ 삶의 무게 65
2장 _ 공직생활에서 배우는 삶 73
사람 속으로 들어가다 74
함께 살아본다는 것 78
섬에 내려온 젊은 면장 83
바다의 끝에서, 다시 길을 찾다 89
목포, 그리고 전국체전을 준비하며 96
3장 _ 공직사회에서 배우는 삶 103
함께 버틴 시간들 104
현장에서 완성된 행정 112
여성농어업인 행복바우처, 생각이 바뀐 자리에서 119
중심지 활성화사업, 고향을 놓지 않았던 이유 124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 129
책임의 무게를 견디다 133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다 139
정책기획관의 마지막 시간 143
생명을 지키는 자리 147
포기하지 않는 행정 152
미래를 심다 156
씨앗에서 시작된 선택 161
길을 만드는 사람 166
3 비전 장성의 내일을 그리다
1장 _ 황룡강, 머무는 도시를 그리다 175
2장 _ 미래 첨단농업의 중심을 그리다 179
3장 _ 행복도시 장성을 그리다 185
4장 _ 산업대전환의 흐름을 그리다 189
5장 _ 힐링도시를 그리다 193
부록1. 김대중재단 장성지회장을 맡으며
신안군 하의면장 출신 - 김대중재단 장성지회장을 맡다 199
부록2. 언론에 비친 소영호
- 소영호 전 목포부시장, 더불어민주당 전국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 임명/2026년 1월 15일 208
- 소영호, 김대중재단 장성지회장 임명 ‘새해 첫 영예’/2026년 1월 14일 211
- 농업·AI·에너지… 전남 미래 전략 이끈 공직자/2025년 12월 14일 215
- 도민 건강시대를 위한 의대 설립의 골든타임/2024년 7월 17일 218
에필로그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