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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여전히 조용하다
천년의시작 | 부모님 |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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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여수니 시인은 시집 『칼은 여전히 조용하다』를 통해 “궁극적 존재 전환의 꿈”을 노래하기도, “먹고 사는 일”의 비루함을 조소하기도 한다. “다시는 곧은 길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 생생한 다짐”을 하는, 결연한 꿈의 조각을 벗 삼아 “꼭 필요한 노동은 일 인분의 밥이 아닌 일 인분의 희망”임을 역설한다. 오로지 물리적 세계의 실존만을 허겁지겁 좇다가도 차마 “시가 되지 않은 시”들을 떠올리며, 문득 시인은 걸음을 멈춘다.서정시는 우리 삶이 이성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균질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적 질서를 구축해 가는 속성을 띤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 밑바닥에는 잃어버린 삶의 위의威儀를 회복해 보려는 시인의 열망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수니 시인은 어둑한 실존과 새로운 희망의 역설逆說 사이에서 궁극적 삶의 형식을 완성하고자 하는 언어의 사제司祭로 우뚝하다.자신의 시 쓰기를 통해 자기 확인의 절실함 외에도 세계의 근본 이치를 탐구하고 해석해 가는 인지적 충동의 순간도 아름답게 보여 준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그만의 은은한 질감과 예기銳氣 그리고 역동적 서정을 함께 품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순한 도취적 몽환이나 회상을 넘어 내면과 세계를 굳건하게 이어 주는 고유한 서정시의 기능을 완결성 있게 구축해 간다. 이때 시인의 상상력은 단순한 회고 취미나 자연 예찬이나 이념 지향으로 흐르지 않고, 삶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들에 대한 탐색을 오롯이 수행해 가게 된다. 그 예술적 결정結晶이 바로 ‘시’로 현상하면서 ‘시인’이라는 자의식의 간절한 토로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해설 중에서
칼―사과를 깎으며칼은 조용하다어둠을 등진 채 환하다내 손이 손잡이에 닿는 순간칼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붉은 껍질과 흰 칼날은 친숙하다사과의 부드러운 곡선과날카로운 직선이 둥글게 둥글게 같이 돈다달콤한 향기와 칼 속의 어둠이 교차한다잠깐 날을 세우는 마음살짝 미끄러진 손가락 속으로칼날이 파고든다피부의 근성이 피를 보인다칼은 여전히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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