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소농두레(농본자치) 운동에 일생을 바쳐온 농본사상가 천규석의 산문집이다. 여든이 넘은 저자는 삶을 갈무리하는 의미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과 후손들에게 꼭 남겨주고픈 간절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낙향하게 된 연유에서부터 나름의 사유와 사상을 정립해나가는 과정과 그 실천의 모습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자본주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 시대에서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인 소농공동체 사상과 그 실천적 삶,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을 비롯한 선생의 인생에 있어서의 귀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 또 그 가운데 빚어지는 인간적 회한과 고뇌까지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에서는 유년시절부터의 이야기와 안타까운 가족사, 손녀 예성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은 선생의 육성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지금은 한번 떠나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고향이다. 그런데 전통시대에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벼슬길에 오른 선비나 행상종사자 등으로 극소수였지만 떠나도 곧 돌아오는 곳이 고향이었다. 선비들은 벼슬에서 잘리거나 스스로 반납하면 지체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것을 귀향이라 하지 않고 낙향한다고 했다. 귀향보다 낙향은 왠지 낙엽이나 낙화처럼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다. 왜 이를 귀향이라 하는 대신 낙향이라 했을까?꽃과 잎은 제 할 일을 다하거나 예기치 못한 돌풍이라도 불면 그가 나고 자란 땅으로 낙엽 또는 낙화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벼슬에서 떨어진 사람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밖에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낙향일까? 귀향이 자발적 선택인데 비해 그때는 객지에서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이 고향밖에 다른 갈 곳이 없었던 타발성 때문일까? 이런 뜻에서라면 나는 대학졸업 뒤 서울에 남아 할 일이 있었는데도 자발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귀농, 귀향인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나의 고향행 역시 순수하게 자발적이라기보다 타의가 더 크게 작용한 낙향이었다.내가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교사 등 취직 대신 서울대에 신입으로 들어간 이유는 신입 1년 졸업학년 1년으로 끝낸 초급대에서 풀지 못한 지적 갈증의 해소와 함께 교사 대신 기왕이면 교수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려면 학부 졸업 뒤 지체 없이 대학원 진학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진학 대신 바로 낙향을 했던 이유는 간단치가 않다. 한 인생의 향후 운명을 결정했던 중차대한 사연을 어찌 한두 마디의 말과 글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 이력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대담을 할 때 나는 그때마다 낙향 이유를 다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낙향 이유가 달라서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복합적이라서 그때의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한두 개만 골라 강조하다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이 글은 처음부터 내 낙향의 변을 위해 쓰는 글이다. 그래서 나 자신도 헷갈리는 복잡한 낙향의 변명들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하여 가능하면 그 혼란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다. 그렇다고 여기 말한 것이 내 낙향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 자신도 낙향 당시의 그 복잡한 감정을 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희미해진 소소한 감정은 제외하고 중요한 이유만 추려 쓴 것이다. 나열하는 순서는 생각나는 대로 정한 것일 뿐 그 경중을 따져한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이유들은 크게 보면 서로 맞물린 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핑계 없는 낙향 없다지금 여기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낙향 이유는 6년 동안의 문자 그대로의 고학생활이 너무 힘들어 몸과 마음을 많이 상해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고학수단은 주로 입주 가정교사였다. 말이 좋아 가정교사지 사실은 고용주와 그 자녀를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집안 하인이었다. 고용주는 물론 아이들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언제 잘릴지 몰라 마음 놓고 숙면조차 할 수 없는 일자리가 입주 가정교사였다. 군사독재의 경제적 물량화와 함께, 갑자기 별의별 대학이 새로 생기거나 기존 대학들도 물량화되던 당시는 석사학위만으로도 교수가 되던 시절이긴 했다. 그러나 석사과정을 마쳤다고 바로 전임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배경이 썩 좋거나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기약 없는 보따리 시간강사 세월을 거쳐야 전임이 된다. 인간만송족들의 행태와 4.19혁명을 통해, 교과서 문인들과 교수들에 대한 내 선망은 이미 깨어지고 없었다. 흔들리는 꿈과 너무 고달팠던 서울살이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나는 서울이라는 괴물도시 자체로부터 만정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다음으로 생각나는 낙향 핑계는 4.19에 건 가냘픈 기대를 무참하게 박살낸 5.16쿠데타와 6.3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을 통한 박정희 정권 퇴진운동의 참담한 실패에 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때부터 미국과의 외교를 통한 독립이라는 사대주의 독립관과 개인주의적 아집, 8.15뒤의 친일부역자들에 의존한 단독정부수립 과정과 그 뒤의 부정과 비리투성이였던 이승만의 독재정권이다. 이승만 독재정권도 전시계엄하의 경찰과 군, 정보기관 등을 통한 무력독재이긴 했어도 자신이 군 출신이 아니었기에 군사독재는 아니었다. 5.16군사쿠데타를 초래한 미완의 혁명일지라도 이승만을 탄핵한 4.19가 가능했던 것은 그 독재가 문민적 독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정권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군사독재정권임을 우리는 6.3의 참담한 실패를 통해 확인 받았다. 이 정권은 비상계엄령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학 자체를 군대로 점령한 뒤 주둔시킨 군사정권이다. 그들은 대학생을 국가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보지 않고 군사적 제압대상인 적대세력으로 보았다. 하긴 독재정권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자기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이면 모두 적대시한다. 언젠가 대한민국의 주적을 북한으로 특정하지 않은 정권을 두고 정파 간에 사상공방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주적을 북한으로 특정할 것을 강요하는 보수독재정권이 오히려 실질적 주적을 북한 대신 자신의 독재에 반대하는 자국 국민으로 삼고 있다.비상계엄은 전시나 준전시의 대혼란기에 삼권을 모두 계엄사령관이나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한시적으로 독점하는 초법적 행위다. 그런데 이승만 독재정권부터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가 끝날 때까지 이 계엄령을 주적이라는 북한이나 외국의 침략(?)으로 발동한 때는 6.25남침전쟁기간 때 딱 한번 뿐이다. 이때도 전방지역을 제외한 후방지역의 계엄은 주로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불법개헌 등 국민협박과 탄압용이었다. 계엄통치의 단맛을 한번 본 보수독재정권이 그 후 거듭 발동한 계엄은 모두 북한 남침위협을 핑계로 정권을 반대하는 국민을 탄압, 제압하기 위해 발동했다. 1960년의 4.19혁명, 61년 5.16쿠데타, 64년 6.3굴욕한일외교 반대와 박정희 퇴진 학생운동, 1971년 10월 15일 7개 대학 군진주위수령, 1972년 10월 17일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사망 때까지 초법적 긴급조치 1호부터 9호까지의 발동으로 사실상의 계엄상태, 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 김재규의 10.26하극의거, 하나회의 12.12쿠데타, 1980년 5월 광주항쟁 등과 같이 모두 정권을 반대하는 국민을 제압할 필요가 있을 때면 수시로 계엄 또는 그에 준하는 위수령을 발동했던 것이 그 증거다. 하긴 어느 나라든 독재정권의 주적은 외적이 아니라 자국의 민적(民賊)이었다.민주와 공화주의를 간판으로 내세운 나라에서의 국민도 정권에 반대하면 주인에서 일거에 주적이 된다. 복종하면 노예가 된다. 나라란 태어날 때부터 내 의지와 무관하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남의 나라다. 이 나라를 벗어나도 세상에는 똑같은 남의 나라뿐이다. 이처럼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요된 나라지만 과거의 어떤 혁명도 나라를 극복할 수 없었다. 10년의 프랑스대혁명의 결과는 혁명대열에 참가한 농민, 노동자, 혁명지도자 등 수많은 목숨만 희생 제물로 바친 자본독재국가였다. 볼세비키의 소련혁명 역시 공산(共産) 아닌 공상적 스탈린주의의 개인독재국가로 종말을 맞았다. 노동자가 주인인 나라, 공상이다. 농민이 주인인 나라,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개인과 집단 간의 경쟁이나 전쟁이 있는 한 나라는 건재할 것이다. 교환시장이 있는 한 신용보증용 화폐를 찍고 세금 걷어먹는 관료들의 나라는 완강할 것이다.나라는 신의 대체자가 되었다. 나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삶의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나라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장과 국가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다른 말로 국가와 시장에 대한 불복종을 통해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부분적이나마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각자의 작은 나라를 스스로 세워야 한다. 그것은 시장 대신 자급하고, 나라 대신 자치하고, 받은 것 이상을 증여하는 개인과 집단들의 자발적 연합인 공동체의 나라다. 이와 똑같은 이상을 실현한 공동체는 없었고 앞으로 만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공동체는 있었다. 기나긴 구석기 원시공동체와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 약 5천 년 전 국가 성립 이전까지의 자급농본공동체였다. 내가 꿈꾸고 노래하는 소농두레연합은 이의 재구성이다. 하지만 한번 가버린 자급공동체는 절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싸워서 쟁취하고 계속 만들어가지 않으면 또 다시 뺏기는 것이 공동체다. 내가 어릴 때 유사한 농본공동체를 경험도 해봤고, 한때 다시 스스로 시도해봐서 아는데 자급농본공동체로 사는 길은 쉽지 않다. 자급농본공동체(세계)연합은 브 나로드 운동과 마하트마 간디 이후부터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현재의 국제연합(UN)은 평화주의자 칸트의 이상을 강대국들이 자기중심적 기형적으로 실현한 형식적 국가연합이지 국가를 지향한 공동체연합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 대신 공동체의 주인으로 사는 삶을 쉽게 포기하고 돈과 나라가 시키는 손쉬운 노예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물량주의를 목표로 경쟁과 각자도생을 조장하는 나라의 길은 망하는 길이다. 내가 주인으로 살며 후손들을 통해 영원히 사는 길은 힘들지만 자급농본공동체연합밖에 다른 길은 없다.흔히 농기로 부르는 ‘農者天下之大本’ 기(旗)는 지금은 복원된 풍물패의 거동 때나 어쩌다 볼 수 있지만, 원래는 마을과 들판마다 펄럭이고 있던 두레기라고 한다. 내가 이 기를 처음 보았을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 기에 쓰인 한자의 뜻을 제대로 읽은 때의 첫 소감은 떫은 땡감 맛이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이나 한자글로 밥 먹고 사는 유학자들이 농민수탈을 엄폐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이를 지어 농민두레에 하사한 천하의 사기(詐旗)라는 느낌이었다. 공동주택, 공중목욕탕, 흙으로 만든 제단 등에 남겨진 유적으로 보아 국가 이전의 신석기 또는 농업혁명 이후의 농본공동체시대까지는 지배자 없는 평등공동체였다고 한다. 그러나 5천 년 전후 국가사회 이후부터의 농자의 처지는 대본(大本)은커녕 말본(末本)도 못되었기 때문이다. ‘農者天下之大本’이란 문자를 전용하고 농민에게 하사한 자들의 노예였을 뿐이다. 내가 형편이 안 되는데도 억지로 대학을 간 것도 이 말본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고달픈 학업생활로 건강을 잃고 1960년 3.15협잡선거와 4.19혁명, 다음해의 군사정변, 1964년의 6.3계엄군에 의한 대학점령, 교수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혁명역사읽기 등의 경험을 통해 서울과 나라의 실체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자 내가 외면했던 ‘農者天下之大本’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가운데 글자를 모두 빼고 첫 자와 끝 자 만을 보면 대본도 말본도 아닌 농본(農本)으로 보인다. 국가 이후 농자는 대본 아닌 말본에 틀림없었지만 ‘농’은 1만여 년 전 신석기 농사혁명 이후부터 적어도 5천 년 뒤 국가성립 이전까지의 농본공동체에서는 대본 이전의 ‘근본’임에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지켜온 농자가 오히려 말본이었던 것은 농자 자신이 농의 가치와 힘을 제대로 몰랐거나 알아도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사가 말해주듯 나라를 극복한 농본공동체혁명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극복은 못해도 나라를 최소화하고 거리를 둔 채 살아갈 방법은 있다. 나라 없이 살자면 자급과 자치가 전제조건인데 그게 가능한 것은 농본공동체뿐이다.낙향 당시에 내가 이미 자급적 농본주의 소농두레의 창조적 구성이 인간의 평등과 해방과 자유 실현의 기초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지는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 이건 그때 당시의 생각이 아니라 톨스토이, 간디, 소로우, 웬델 베리 등의 소농사상을 두루 접하고 난 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대학 강의 시간을 통해서도 실패한 ‘뉴 하모니마을’의 로버트 오웬, ‘팔랑쥬’협동조합의 샤를 푸리에 등의 지배자 없는 자급자치농본공동체주의 사상에 관한 단편적 정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지금처럼 명료하지는 않았다 해도 막연한 대로 그런 이상을 한번 실현해보고자 돌아왔던 것은 사실이다. 낙향 이후 영농과 함께한 지역농민 운동, 생산협동조합설립 운동, 한살림과 <공생농두레> 공동체 재구성 운동 등에 실천적으로 동참했던 것은 그 꿈의 실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혹시 이런 실험 역시 이농이 대세이던 그 시절에 아무도 안 하는 낙향이란 역이농의 고통을 달래며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일지 모른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발등의 불로 떨어진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등의 가속화는 농본주의 소농두레연합이 내 개인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보편적 당위로 정당화되고 있다.―「박살난 꿈, 다시 찾은 농본(農本)」
작가 소개
지은이 : 천규석
일제 말에 태어난 내 유년의 기억에는 공출강요 차 나온 긴 칼 찬 왜 순사의 공포만 남았다. 청소년시절도 종주국이 바뀌는 8.15와 조국분단과 남북전쟁, 이승만의 영구집권과 4.19, 이를 전복한 1961년의 군사 쿠데타와 이 독재정권과 그들이 강행한 한일굴욕회담에 항거한 1964년의 3.24학생봉기 등의 얼룩진 우리 현대사 속에 묻혔다.산업화군사독재에 불복종하는 농촌공동체재생운동(농민운동)을 핑계대고 1965년 학부졸업과 동시에 귀향했다. 사실은 민주화의 그날까지 서울에 남아 군사독재와 계속 싸우자던 친구들과의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귀향과 농촌공동체재생운동이라고 만만할 리 없었다. 끝없는 이농과 메아리 없는 적막강산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견디다 못해 한때 대학 강단 진출도 시도해 보았지만 오히려 공허감만 더해갔다. 다시 땅으로 돌아왔지만 내 삶의 동반자이자 가족공동체의 중심인 아내가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로 졸지에 돌아가는 날벼락을 맞는다. 기계와 고용노동으로 하는 지속 불가능한 산업농과 달리 자급적 소농은 마을이나 가족공동체의 지원 없이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50대 초반의 때늦은 나이에 자식들이 있는 대구에 나가 ‘도시에서 하는 농촌공동체재생운동-한살림’에 동참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투신일 수밖에 없기에 혼신을 다했지만 먹고 사는 것 말고 소기의 꿈은 꿈으로 남긴 채 아쉬움과 후회만 안고 물러났다. 하긴 모든 공동체운동사는 실패와 재도전을 되풀이하는 꿈의 역사였다. 다시 작은 농장으로 귀향했지만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저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이 서글픈 여생뿐이다. 농촌공동체재생운동은 성공 못했지만 이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람은 고 김종철 선생이 1991년부터 2020년 타계 때까지 주관한 ≪녹색평론≫에 동참해 선생과 함께 사색한 농본사상이다. 덕택에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가 발병난다』 등 몇 권의 책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