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인간은 머리를 들어 눈으로 하늘을 보고, 발을 내딛어 몸으로 땅을 밟는다. 하늘과 그것을 보는 눈 사이에는 거리가 있지만, 땅과 그것을 밟는 몸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하늘과 눈 사이가 ‘공간’이라면, 땅과 몸 사이는 ‘장소’다. 공간과 장소의 개념적 차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차이는, 공간이 ‘인식 대상으로서의 곳’이라면, 장소는 ‘체험 터전으로서의 곳’이다.
이 차이를 진리와 결부시킨다면, 전자는 ‘인식적 진리’, 후자는 ‘실존적 진리’가 된다. 이를 더 밀고 나가면 전자는 관찰자의 것이고, 후자는 행위자의 것이다.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전자는 ‘이론’으로 연결되고, 후자는 ‘실천’으로 연계된다. 전자는 전체적 구도에, 후자는 부분적 집중에 초점을 맞춘다. 눈의 시야는 넓고, 몸의 부딪침은 좁기 때문이다. 이 둘을 종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이론과 실천의 역사가 증명한다.
공간 인식에는 주체의 의도가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의도를 성찰하지 않으면 ‘목적론적 이데올로기’의 침투를 간과하여 진실에 가닿기 어렵다. 장소 체험에는 주체의 실존이 생생하게 묻어 있다. 그러나 그 외부를 통찰하지 않으면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유아론唯我論’을 놓칠 우려가 있어 진실이라 인정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가끔 내적 성찰과 외적 통찰이 결합된 현명한 글에는 이 둘을 겹쳐 보려는 겹눈의 시각이 내비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하늘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땅이라는 장소를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더듬어 보면, 인간 삶의 한 부분이 또렷이 드러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하늘과 땅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화는 인간이 생각한 것을 그럴 듯하게 표현한 최초의 언어 형태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여러 인종 중 선주민은 자신들의 천지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이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주민은 이동 중 천지창조 신화를 유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화에 기록되지 않았다 해서 천지창조 및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설화나 샤머니즘과 같은 신앙으로 보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신화는 민족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유형별로 압축하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 하나는 무에서 유, 곧 질료 없이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에서 유, 곧 질료에서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이 아닌 고귀한 존재가 생각이나 말로써 우주/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후자는 작은 입자 같은 것에서 우주/천지를 자라게 하거나 무정형의 덩어리 또는 원초적 존재를 둘로 분리/절단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로든, 유에서 유로든 천지가 창조되고 난 뒤 인간도 생겨나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살아왔다. 인간은 그러한 하늘을 어떻게 생각하고 땅을 어떻게 일구었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을 형성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하늘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농공상 중 사士계급/지식인이었고, 땅을 일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농農계급/민중이었다.
하늘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체험하기가 곤란하다. 오늘날처럼 비행기나 열기구에 몸을 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땅에서 하는 것처럼 하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행기나 열기구에 갇힌 사람은 하늘이라는 공간을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것은 자동차나 열차에 갇혀 세상을 스쳐가는 것보다 훨씬 더 스침의 요소가 강할 것이다.
이처럼 하늘은 체험의 장소가 아니라 인지나 인식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론을 도입하기 쉬운 공간이다. 장소로서의 체험으로 논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종교 이데올로기의 온상이 되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이 이 세상의 계급과 운영 법칙을 설명한 정치 이데올로기나, 이 세상 이전의 근원적인 곳, 이후의 최종적인 곳으로 천국을 설정한 종교 이데올로기를 위한 최상의 공간이 하늘이다.
하늘은 지상 권력의 원천으로서 지상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땅의 제일 높은 곳은 우주산으로서 땅의 배꼽이다. 이 땅의 배꼽인 우주산 꼭대기는 하늘의 배꼽인 북극성에 닿아 있다. 땅의 배꼽과 하늘의 배꼽, 우주산과 북극성은 맞닿아 세계의 중심을 이루며 생명이 순환하고 권력이 작동하는 기제가 된다. 그래서 우주산은 아무나 오를 수 없다. 최고의 권력자나 이를 겸한 제사장만 오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지상을 지배할 권위를 하늘이 제왕에게 부여했다는 관념을 의례儀禮로 제도화했다. 그것은 높은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식으로 확립되었다. 봉은 태산泰山에 흙단을 세우고 천신에게 올리는 제사이고, 선은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옛날 황제黃帝를 비롯하여 순, 그리고 주나라의 성왕과 강왕을 거쳐 진나라 시황, 전한의 무제, 후한의 광무제에 이르기까지 72명의 제왕들이 봉선을 시행했다고 하는데, 후대로 내려올수록 하늘에 올리는 엄숙한 의식이 왕을 찬양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이 변질의 대표적인 예는 진시황이었다.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고 난 뒤 스스로 북받쳐 태산에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위대함과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는 내용을 새기게 했다. 뒤를 이은 2세 황제/호해도 전국을 순행하면서 시황제가 세운 각석 측면에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는 글을 새겨 넣게 했다. 이런 형식의 비문은 나중에 개인이 세우는 송덕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은 주술적 요소가 다분했다. 하늘의 상제上帝는 인간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공물을 바치는 적극적 주술의 대상으로서 인격신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기에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강하고, 정치 사상적 정교함이 부족했다. 그래서 봉건 제국을 이룩한 주나라에 들어와서는 봉선의식과는 별도로 제帝의 개념 대신 천天의 개념을 도입한다.
천의 개념을 따르면, 왕은 천명天命을 받아 천자天子로서 지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된다. 이는 곧 하늘이 왕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되고, 왕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천명을 받는 존재는 천자가 아니고는 될 수가 없다. 이렇게 왕은 천의 신성성을 후광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왕인 천자가 천명을 내세워 그 정당성을 과시한 최초의 기록은 주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대우정大盂鼎에 보인다. 이 청동기의 명문銘文에는 강왕이 장군 우盂에게 관직과 함께 수레와 말 그리고 1,700명의 백성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 첫 구절에 “위대한 문왕이 천명을 받아 부패한 상나라를 멸망시켰다”는 문장이 나온다.
사마천은 서백이 사후 문왕文王으로 추존되기 전에 이미 천명과 관련된 인물이었음을 보다 자세하게 전한다. 서백은 국가사업이나 법도, 성품이나 사람 접대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어, 주위의 제후들이 마침내 “서백은 아마도 천명을 받은 군주인가 보군”이라는 말을 저절로 하게 만든다.
그와 아울러 백이와 숙제 등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하고, 서백이 주위의 여러 군소 나라와 부족을 정벌함에도 불구하고, 상商/은殷나라 주왕紂王은 “내게 천명이 있는 게 아니더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버티다가, 결국 서백 곧 문왕 창昌의 아들인 무왕武王 발發에게 패망하고 만다. 그러니까 아버지 문왕이 받은 천명을 아들 무왕에 이르러 완전히 실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은나라를 물리친 다음날 무왕이 주공과 소공 등 여러 신하들과 함께 윤일尹逸의 집전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아버지 문왕이 받은 천명을 재확인한다. “은나라의 끝머리 자손 주왕은 선조의 밝은 덕은 저버리고 신들을 멸시하여 제사를 받들지 아니하고 상나라 백성들을 무식하고 포악하게 대하여 그 밝게 드러난 행위가 하늘의 상제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무왕이 머리를 숙이고 두 번 절을 하고 난 뒤, 윤일이 다시 제문을 읽는다. “위대한 명령을 받아들여 은나라를 물리치고 밝은 천명을 받아들이시오.” 무왕은 다시 머리를 숙이고 두 번 절한 뒤 밖으로 나간다.
봉선의식에서 제천의식의 의례화가 이루어졌듯이, 천명의식 역시 이처럼 의례화로 진행된 것은, 이 천명이 주나라가 정복한 온 천하에 통용됨을 알리려는 의도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천명이 무력적인 지배를 넘어선 것임을 뒷받침하기 위해, 旦은 정치, 사회, 문화,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쇄신된 면모를 마련했다. 주나라가 서주西周에서 동주東周로 쇠약해진 춘추시대 말기에도 주공 단이 마련한 근본적인 토대는 시들지 않았고, 그것에 내포된 천명사상 역시 공자와 맹자로 이어져 정치적인 윤리로 발전한다.
춘추시대의 공자에 이르면 다시 말해 국가 운영의 중심이 하늘의 명령에서 왕의 덕성으로 내려온다. 곧 천명을 아는 자는 덕치를 행하는 왕인 것이다. 그래서 노애공魯哀公이 “국가의 존망과 화복이 정말로 천명에 따른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에 따른 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라의 존망과 화복은 모두 자신에게 달렸을 뿐이니 하늘과 땅의 재앙에 의하여 바뀌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아가 “하늘과 땅의 재앙은 선정을 이길 수 없으며, 괴이한 꿈에 대한 이런저런 해몽도 선행을 이길 수 없으므로, 이런 것을 깨달아 안다면 정사에 신중을 기하고 극도의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오직 명석한 왕만이 이를 깨달아 실천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인다.
주공 단은 무왕 사후 왕에 오른 조카 성왕을 보필하며 주나라의 토대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춘추시대를 거치며 그 토대가 중국문화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공자에게 국가의 원형은 주나라이며, 정치의 모델은 주공이었다. 주공은 천자가 아니지만 천자 이상의 사업을 이룩한 사람이다. 공자도 주공처럼 천자는 아니지만, 평범한 천자 이상의 일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명을 그의 사유에서 버릴 수 없어 인 앞에 내세웠을 것이다.
묵자는 공자의 천명 대신 ‘천의天意 또는 천지天志’를 내세운다. 하늘의 뜻을 살피는 것은 하늘의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 시야가 더 넓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정의로운 정치를 펼치는 것이고, 하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폭력의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정의로운 정치는 모두에게 이로운 정치이고, 폭력의 정치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정치이다. 전자의 정치를 행하는 군주는 성군이고, 후자의 정치를 행하는 군주는 폭군이다.
그러나 정의로움 곧 올바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공자의 생각과 같으며, 이후 주희의 생각에도 가 닿는다. 묵자는 하늘의 뜻을 올바르게 땅에 펼쳐 모두를 이롭게 한 성군의 예로 요임금, 순임금, 탕임금과 문왕, 무왕을 들고, 하늘의 뜻을 올바르게 땅에 펼치지 못해 모두를 해롭게 한 폭군의 예로 걸왕, 주왕, 유왕, 여왕을 든다.
묵자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정의의 법칙”이라 했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정치를 펼치는 것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정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마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말하는 부분일 것이다. 예나 이제나 이 세상이 불의不義와 불인不仁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는 것은 힘 센 자가 힘 약한 자를 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임에 틀림없고, 이를 극복하여 사람 살 만한 세상으로 바꾸려면 서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음은 누구나 하는 소리가 아니던가. 곧 정의로운 정치는 사랑/겸애와 평화/비공이 이루어지는 정치라는 말이다.
전국시대의 맹자는 그가 사숙한 스승 공자의 천명을 ‘천도天道’로 바꾸어 말하는데, 어떤 이는 이 천도가 묵자의 천지天志를 각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혐의는, 맹자가 겸애를 친애親愛로 공격하면서도, 묵자의 의義를 이利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를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의는 묵자의 의보다 훨씬 과격하다. 묵자의 「상동尙同」을 살펴보면, 그가 정치적 절차나 질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왕이 천명과 천도에서 벗어나 부덕과 불의를 행할 때, 국가의 존망을 그러한 왕에게 맡겨둘 수 없음을 천명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른바 역성혁명이 불가피성을 말한다.
제선왕齊宣王이 “탕왕은 걸왕을 쫓아내고 무왕은 주를 토벌하였습니다. 신하로서 그 임금을 죽여도 좋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를 어기는 자를 일컬어 잔殘이라고 합니다. 잔적한 자를 일부一夫라고 합니다. 일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맹자는 대답한다. 왕에게만 부여됐던 천명이 뒤집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순자에 이르면, 주나라에서 비롯되어 공자와 묵자 그리고 맹자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며 이야기되던 천명/천지/천도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순자에게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이다. 「천론天論」에서 순자는 “성인은 하늘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추구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면서, 사람으로서의 입장을 버리고 하늘을 생각한다면 곧 만물의 실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지인至人이고, 사람의 일을 하늘에 결부시켜 왈가왈부하는 이는 소인배가 된다. 하늘에 대한 이러한 견해로 말미암아 순자는 유가의 주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한前漢 무제 때 동중서가 나타나 다시 하늘을 정치에 끌어들인다. 유가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동중서에 의하면, 정치는 왕의 일인데 이는 하늘과 무관하게 이루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천인감응天人感應이다. 하늘의 의지에 반해 정치가 이루어질 경우, 하늘은 왕을 준엄하게 질책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재설異災說에 의하면, 왕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면 작은 규모의 자연현상을 통해 경고를 보내고,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늘의 뜻을 무시하면 대재앙을 내리게 된다.
비록 유가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 주장이었겠지만, 그 주장 자체는 유가의 주류인 공자와 맹자로부터도 후퇴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탈피하려고 한 주술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중서의 천인감응은 유가 사상 안에서 볼 때도 극복되어야 할 요소를 안고 있고, 유가의 밖에서 볼 때는 더욱 비판할 요소가 두드러지는 셈이다.
그 비판의 날을 들이댄 이는 후한後漢 광무제 때에 출생한 왕충王充이다. 그는 동중서의 천인감응을 겨냥하여 속된 유가의 주장이라며 속인의 주장과 같다고 깎아내린다. 왜 속되다고 보는가. 하늘의 본성을 해치고, 무위자연의 현상을 무리하게 사람의 의식적 활동으로 바꾸어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대지를 움직이려 하고 하늘을 감동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짓이다. 하늘은 지극히 높고 큰 데 비해 인간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고, 하늘 역시 사람의 행위에 반응할 수 없다. 천도는 무위無爲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남은 길은 하늘을 쳐다보지 말고 정치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의 논조에는 노자가 자연에 대해 사유한 내용과 순자가 「천론」에서 펼친 생각이 다분히 깔려 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따라서 노자와 순자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주류 유가들이 하늘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헤아려진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송南宋의 주희다. 그는 주나라 이래 공자의 천명, 묵자의 천의 또는 천지, 맹자의 천도에 이어 ‘천리天理’를 내세웠다. 그 천리의 대립 개념이 ‘인욕人欲’이다. 주희는 전통 유가에 결여된 사변적인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주돈이와 소강절, 정호/정이 그리고 장재 등 선배의 논의를 종합하는 한편, 그들이 바탕으로 삼은 불교와 도교의 철리哲理를 흡수하고 개조하여 자신의 인식론과 우주론 그리고 심성론과 윤리학을 확립했다.
이러한 주희에게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이원론이다. 이理와 기氣가 그러하고 천리와 인욕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이다. 자크 데리다가 직시했듯이, 두 개의 대립항을 맞세우는 것은 그 둘을 대등하게 취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체로 하나를 추켜세우고 하나를 깎아내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다. 기보다는 이를, 인욕보다는 천리를 추켜세워 자신의 논리를 끌고 가기 위해 이와 기, 천리와 인욕의 이원론을 내세운 것이다.
주희 역시 처음에는 격물格物에서 치지致知로 나아가듯, 감성적이고 경험적인 기질지성氣質之性 곧 인욕에서 이성적이고 선험적인 천지지성天地之性 곧 천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정은 마침내 천리에 치중하여 인욕을 버려야 하는 당위론의 윤리학으로 귀결시키고 만다. 다시 말해 현실적 경험의 풍부성을 외면하고 사변적 교조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게 된다. 유가의 선조들이 주술적인 하늘에서 정치적인 윤리로 끌어내린 하늘을 주희는 인간의 현실에서 떼어내 다시 형이상학적인 사변의 틀에 가두어 버린 셈이다.
근대에 이르면, 주희의 천리와 인욕의 대립 개념은 봉건주의적 금욕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오히려 인욕을 제창하고 천리에 반대하는 상황이 된다. 탄쓰퉁은 “천리는 인욕 속에 있으므로 인욕이 없으면 천리도 발현될 수 없다”고 했다. 캉유웨이 역시 “천하의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즐거움을 구하고 고통을 면하려 할 뿐 다른 도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인욕은 결코 악이 아니며 인욕을 억압하는 것, 곧 천리도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처럼 근대의 사상가들은 주희가 형이상학적인 윤리학의 틀 속에 이원화시킨 천리와 인욕을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일원화의 틀 안에 풀어놓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하늘을 주술과 정치 및 사변의 영역에서, 현실 경험과 일상 실천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시야를 넓히고 깊게 한 것은 동학이다. 이는 인식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장소 체험으로서의 하늘로 바꾸는 데서 가능해진 것이다. 시천주侍天主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것은 내 몸이다. 장소 체험의 주체인 내 몸이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하늘/하느님의 모든 덕성이 나의 존재 내면 전체에 육화된다는 뜻이다.
이는 인위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단계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늘/하느님을 몸/실천으로 모심으로써 존재 전체가 변화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이를 무위이화無爲而化라 했다. 그래서 <동학론>에서 “내가 말하는 도를 몸으로 받아들여 닦는 자는 허하게 보여도 내실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듣기만 하고 흘려버리는 자는 겉으로 실하게 보여도 그 내면은 허탕인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론/인식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며 실천/실존이 그것을 온전하게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제우에 이르러 하늘은 공간/인식에서 장소/체험으로, 이론/정치체제/윤리학의 범주에서 실천/생활세계/구체행위로 내려와 안착한 것이다. 최시형은 여기서 나아가 최제우의 사상을 더욱 명료화하여 그것으로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한다. 최제우가 시천주를 말하며 몸으로 하늘/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는데,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를 말함으로써 이미 하늘/하느님이 내 몸에 들어와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 인즉천人卽天(나중에 손병희에 의해 인내천人乃天으로 표명되기도 한), 곧 사람이 하늘이니, 사인여천事人如天, 곧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아래위로 확대하면 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하늘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은 밥에 의존한다. 이 세상의 진리는 밥 한 그릇에 있다’가 그것이다. 최시형의 이런 사유와 실천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두 가지 의의를 선취하는데, 그 하나는 하늘을 위에서 아래로 ‘지배’의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뒤집어 아래로부터 위로 ‘생산’(양천주의 ‘양’에는 농부가 생명을 기르는 것이나 인간이 마음속에 하늘/하느님을 기르는 것은 같다는 은유가 잠복해 있다)의 혁신적 관점에서 보도록 만들었으며, 또 하나는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양천이 경천이 되어 확대되면 경인과 경물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을 말함으로써,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신유물론을 선취하는 생태학적 시야까지 열어둔 것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하늘에 매여 있던 시선을 땅으로 돌려놓는 역할까지 했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하창수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문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무크지 ≪지평≫으로 평론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평론집 『삶의 양식과 소설의 양식』, 『암벽의 사상』, 『맞서지 않는 길』, 『집의 지형』, 『집의 지층』, 『길의 궤적』, 『길의 현존』 등과 산문집 『걷는 자의 대지-길에서 만난 생명들』, 『걷는 자의 대지 2-길과 글 사이에서』, 『책 속을 걷다』, 『책 속을 걷다 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