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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교수의 한국 근현대사 특강
지식산업사 | 부모님 | 20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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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우리나라가 자기힘[自力]으로 근대국가(近代國家)를 시작한 역사가 지금(2025년)으로부터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책으로 나의 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저자 이태진 교수는 한국 사학계를 50여년 지켜온 老 대가이다. 그는 1905년 보호조약 (을사늑약), 1910년 ‘병합조약’의 원본을 정밀 분석하는 작업으로 내외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의 국정운영 능력으로 보아 조선(대한제국)이 무능하여 일제에게 국권을 잃었다고 하는 통설을 엎어놓은 연구에 몰두해 왔다.

저자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으면서, ‘책 머리에’의 글로 <130년 국민국가 역사를 제창하며>를 올렸다. 고종 시대에 이미 자생적 근대의 요소가 많이 생성하고 있었으나 그런 역사적 성과를 토대로 한 1895년 2월 26일 <교육조칙> 반포를 계기로 ‘근대국가’가 출범한 것으로 보고 새로운 견해의 의미를 강조했다. 130년은 1895년부터 현재 2025년까지를 헤아린 숫자이다. 저자는 3양(三養)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조칙>이 “나라의 분개를 싸워 씻을”, “나라의 모욕을 막을”,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심민(臣民) 곧 국민창출을 목표로 한 것을 주목했다.

  출판사 리뷰

한국 국민국가론 연구서설을 펼치다

우리나라가 자기힘[自力]으로 근대국가(近代國家)를 시작한 역사가 지금(2025년)으로부터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책으로 나의 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저자 이태진(서울대 명예) 교수는 한국 사학계를 50여년 지켜온 老 대가이다. 그는 1905년 보호조약 (을사늑약), 1910년 ‘병합조약’의 원본을 정밀 분석하는 작업으로 내외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의 국정운영 능력으로 보아 조선(대한제국)이 무능하여 일제에게 국권을 잃었다고 하는 통설을 엎어놓은 연구에 몰두해 왔다.

이 책은 제1부에서 제8부로 나뉘는데 제1부 <근대 왜곡의 뿌리>에서는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의 뿌리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소개하고, 그의 주변국 ‘선점론’을 본격 비판한다.
제2부 <근대의 여명>에서는 <심청전> <춘향전>을 최초로 영조 정조 시대의 ‘소민(小民)보호’ 정치이래 등장한 자생적 ‘공화(共和)의식’으로 보고 신분타파의 근대를 지향하고 평등의식의 시발로 본다.
제3부 <고종즉위, 세도정치부터 없앴다>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지목한 신정왕후(조대비)의 개혁정치가 대원군의 치적으로 둔갑한 배경을 밝히고, 고종의 왕정은 조대비의 개혁정치에 근원한 것을 밝힌다.
제4부 <개국 개방에 드리운 암운과 서광>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마치 일본이 우리나라에 시혜를 베푼 듯이 주장하는 것은 허위임을 밝히고 역사의 진실을 드러냈다.
제5부 <청일 전쟁과 왕비 시해 사건>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항일 전쟁과 이에 대한 고종의 화답으로 1895년 2월 새로운 국민창출을 위해 내린 ‘교육조칙’을 주목한다.
제6부 <‘국민’ 창출과 대한제국 수립>에서는 ‘교육칙어’가 담은 덕 기르기[德養]·몸 기르기[體養]·지혜 기르기[智養] 의 3양을 국민 실용교육 심화를 위한 학교설립 등의 원칙을 밝힌 것이며, <독립신문>은 서재필의 개인 창간이 아니라, 고종 정부가 ’국민‘창출을 위해 서양의 신지식의 공급을 위한 매체(미디어)로 창간한 것임을 밝혔다.
제7부 <침략자에 대한 규탄과 시위>에서는 고종이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입은 국가적 손상 앞에 터뜨린 세 차례의 통곡을 소개한다. 갑신정변 때 일본 공사관 수비대가 거짓 어명으로 다섯 명의 중신(重臣)을 목을 쳐 죽이는 광경을 보고,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외치면서 통곡했고, 을미사변 때 왕비(민씨)가 시해된 뒤 국장을 치를 때 그 행록에서 “내가 궁 안에서 왕비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한 애통, 1909년 3월 국권이 일제에게 다 넘어간 시점에서 황제로서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질책하면서 “그래도 망했다고 하지 말라. 여러분 만성(萬姓)이 광복(光復)을 가져올 날이 있을 것이다.”라면서 터뜨린 애통을 소개한다.
제8부 <근대가 있는 현대사를 항하여>에서는 근대와 현대가 연결되지 못한 역사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우리 근대사에 대한 심한 부정적 인식의 산물로서 ‘근대’가 없는 현대사는 있을 수 없는 속히 청산해야 할 과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으면서, ‘책 머리에’의 글로 <130년 국민국가 역사를 제창하며>를 올렸다. 고종 시대에 이미 자생적 근대의 요소가 많이 생성하고 있었으나 그런 역사적 성과를 토대로 한 1895년 2월 26일 <교육조칙> 반포를 계기로 ‘근대국가’가 출범한 것으로 보고 새로운 견해의 의미를 강조했다. 130년은 1895년부터 현재 2025년까지를 헤아린 숫자이다. 저자는 3양(三養)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조칙>이 “나라의 분개를 싸워 씻을”, “나라의 모욕을 막을”,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심민(臣民) 곧 국민창출을 목표로 한 것을 주목했다.
3양 교육론은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가 젠트리 자녀 교육을 위해 처음 재창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캘빈 앨버트가 기독교 관점에서 새로 해석했다. 즉,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부여한 덕, 체, 지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곧 교육의 과제로 해석하여 신분 의식을 타개했다. 캘빈 앨버트는 육영공원 교사로 온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아버지인데, 호머가 고종에게 이를 소개한 것으로 보았다. 1894년 상반기 동학농민군은 군주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탐관오리 척결을 내세웠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군주 고종을 소민(小民) 편으로 전제하고 군주의 성총(聖總)을 가로막는 탐관오리 척결을 외쳤다. 같은 해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학농민군은 이에 항거하여 2차 봉기에 나서 10월 이후 결전에서 5만 명의 희생자를 낸다. 저자는 이듬해 고종이 1895년 2월 26일의 <교육조칙>을 내려 동학농민군의 이 처절한 순국(殉國) 활동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응답으로 해석했다. 동학농민군의 ‘보국안민’의 가치를 근대적으로 수용하는 일대 국정 방침의 개혁이었다.
1894년 두 차례의 동학농민군 봉기는 학계가 오랫동안 주목해 왔으나 <교육조칙>을 매개로 ‘국민탄생’의 역사로 푼 것은 이태진 교수가 처음이다.
이태진 교수의 해석에서 동학농민군의 항일 투쟁은 곧 군주에 대한 근왕의식(勤王意識)의 발로로, 계급사관의 해석과는 다르다. 저자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동학 후신인 천도교 대표 15인 은 손병희를 비롯한 9인이다. 그들이 1894년 후반기 항일투쟁 때 지역 지도자인 접주(接主) 출신인 점을 주목했다. 일본 측의 독살로 사망한 고종에 대한 그들의 근왕의식이 25년의 세월 속에 변함이 없어 태황제의 국장을 계기로 만세운동을 주관한 것으로 전후 관계를 밝혔다. 이 만세운동에 기독교 대표 16인이 함께 참가한 것은 <교육조칙>의 새로운 국민창출 역사에서 모두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것이 이태진 교수의 결론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는 곧 근대국가의 근왕의식이 빠진 가운데 펼쳐지는 현대사의 서막으로 규정한 것이다.

나는 군주 고종이 1894년 후반기 동학농민군들이 벌인 처절한 항일 투쟁에 대한 무한한 신뢰 속에 서민 대중이야말로 ‘보국안민’의 주체 곧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는 판단으로 이 조칙을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바로 앞서 모든 공문서를 한문이 아니라 ‘국한문 혼용체’로 한다고 선언한 것도 국민으로서 서민 대중을 위한 새로운 문자 세계 창출이었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도 서재필 개인이 간행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민창출이란 정부방침 즉 서민 대중이 국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새로운 지식 배양을 위한 매 채로 복수의 정부 관계자가 군주의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사실도 새롭게 밝혔다. 서재필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군주 고종은 국민 창출에 필요한 이런 기본 조건을 갖추면서 1897년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출범과 동시에 토지(농경지) 측량과 토지 소유권 증서발급 사업을 일으켜 농민의 경제기반 안정과 국가 세수稅收를 근대적인 구조로 바꾸는 사업을 벌인 것도 국민 창출의 경제적 기반 확보로 해석하였다. ‘광무 양전光武量田’ 사업에 대한 한걸음 더 나간 해석이다.
-‘책 머리에’ 중

한국사는 일제 치하의 치명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국학 붐’ 이후 빠르게 성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이 신빙성이 높은 사료로서 연구자들에게 영인본으로 일찍 제공된 것이 빠른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록》은 한 왕의 시대가 끝나면 그 재위 기간에 생산된 각급 기관의 기록을 모아 취사선택하여 편년체로 정리하여 후 대에 그 왕의 정사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한 편찬물이다. 편찬이 완료되면 네 닷 벌을 활자로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비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은 편찬 뒤 어떤 후손 왕도 볼 수 없는 원칙을 세워 편찬의 객관성을 보장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의 《실록》은 편찬 후 공개가 허용되어 기록의 객관성이 훨씬 떨어지고 분량도 우리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조선왕조는 왕이 바뀔 때마다 근대성을 지닌 ‘사료 편찬’ 사업을 해온 세계 역사에서 유일한 나라였다.

임진왜란 때 뒷정리가 되지 않아 300년 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 전쟁에 대한 조 선·명 두 나라의 응징이 없었던 것이 재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그는 1905년 〈보호조약〉을 강제하고 돌아가다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침략의 절대성을 가르쳐준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묘소에 측근을 보내 보고를 올렸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1852~1919], 그는 1910년 8월 29일 ‘한국 병합’ 공포 뒤, 통감 관저에서 부하들과 축배를 올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여, 당신이 못 이룬 것을 우리가 이뤘습니다”고 외쳤다. 응징과 심판이 없는 역 사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태진
1943년생. 서울대학교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1961~1969),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교관으로 3년 병역의무를 마친 뒤 경북대학교 교양학부와 사학과에서 전임강사로 교단에 섰다. 197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로 전출, 부임하여 2009년까지 재임하였다. 재임 중 인문대학 학장으로 선출되고(2006~2008) 정년 퇴임 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 1868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유출된 외규장각 의궤 도서 반환 운동을 주도하여 2011년 귀환에 성공,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조선시대의 사회사, 정치사를 연구하다가 1992년 1905년 ‘보호조약’을 비롯한 국권 피탈 관련 문건에 많은 결함, 결격 사항이 있는 것을 발견, 근대 한일관계사 특히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의 불법성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여 여러 국제학술 행사를 개최하거나 참가하였다. 고종 시대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탈피에도 노력하여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조약 강제와 저항의 역사》 《끝나지 않은 역사: 식민 지배 청산을 위한 역사 인식》 등의 저서를 출간하였다.2022년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 《일본제국의 대외침략과 ‘동방학’ 변천》을 저술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보는 시야를 넓혔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연 이상 현상 기록 2만 5,300여 건을 뽑아 이를 분석, 1490년부터 1760년까지 270년 동안이 이른바 소빙기(little ice age)의 재난 현상기인 것을 국제 천문학 저널을 통해 처음 밝혔다.(1998) 이에 근거하여 《새 한국사》(까치)에서 조선 중기의 역사를 천재지변 극복의 역사로 조명하였다. 지금까지 학계에 제출한 논문은 300여 편, 저서는 30여 편에 달한다.

  목차

책 머리에: ‘130년 국민국가 역사’를 제창하며 _4
감사의 말씀 _13
감고사感告辭 _16

제1부 근대 왜곡의 뿌리
01 조선총독부, 《고종실록》 《순종실록》 편찬에 1만여 종 자력 근대화 관련 ‘공문서’ 자료 외면했다 _22
02 130년 전 수립한 메이지 천황제 국수주의, 한·일 파트너십에 아직도 걸림돌 _31
03 조선은 ‘평화공존’, 일본은 ‘주변국 선점’, 국시가 달랐다 _39

제2부 근대의 여명
04 궁궐을 나온 탕평 군주들, 백성을 직접 만나 의견 물었다 _48
05 탕평정치가 잉태한 《심청전》 《춘향전》, 새로운 역사 신호였다 _57
06 정조가 꿈꾼 만민평등의 ‘공화’ 세계 _65

제3부 고종 즉위, 세도정치부터 없앴다
07 ‘경화사족’의 북학파 정치 바람, 혁신을 꾀하다 _74
08 ‘여걸’ 조대비의 개혁 정책, 흥선대원군의 치적으로 둔갑되다 _82
09 대원군, 조대비가 복원한 왕정 체제 무시하다 7년 만에 실각 _90
10 건청궁에 실은 청년 군주 고종의 푸른 꿈 _98

제4부 개국•개항에 드리운 암운과 서광
11 1875년 강화도에 나타난 ‘운요호’, 일본 국기 달지 않았다 _108
12 “조선이 미국과 친해져선 안 돼!” 청·일의 조선 개국 정책 방해 _117
13 고종, ‘세계 초유로’ 영어 시험 직접 주관한 임금이었다 _125
14 “사대당은 수구, 독립당은 개화” 일제가 정치 공작으로 구분한 프레임 _134

제5부 청일전쟁과 왕비 시해 사건
15 1894년 일본군, 청과 싸우기도 전에 경복궁 담부터 넘었다 _ 144
16 ‘갑오개혁’의 탈을 쓴 일제 군사 침략의 광란 _153
17 일본군 민완 장교 8명, 민간인으로 변복하고 왕비 시해 지휘 _161
18 왕비 사진을 궁녀로 둔갑시킨 사연 _169

제6부 ‘국민’ 창출과 대한제국 수립
19 동학군, “악한 신하 타도가 목적” 왕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_178
20 국민 독본으로 창간한 《독립신문》, 서재필 창간이 아니었다 _187
21 경운궁(현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 도로 설계, 당시 도쿄에서도 못 한 일 _194
22 명성황후 국장, 황후 추존으로 한을 달래다 _205
23 농지정리사업으로 상승한 국민소득, 대한제국을 밝게 비췄다 _ 213

제7부 침략자에 대한 규탄과 시위
24 “슬프다, 섬 오랑캐가 팔도를 삼켰다” 고종은 글로 울었다 _ 224
25 ‘지식인’ 안중근, 한·중·일 넘어 세계평화의 길 제시했다 _ 233
26 천도교의 근왕 국민사상, 3·1 독립만세운동 이끌다 _241
27 순종 황제, 과연 통감 이토의 꼭두각시였나? _250

제8부 ‘근대’가 있는 현대사를 향하여
27 세계 경제 10위·민주화·산업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_ 274
28 식민지 근대화론, 대한제국 자력 근대화 성과 부정 _283
29 식민 지배 책임 얽힌 배상 문제, 일본이 ‘양보’하는 것이 순리 _290

부록
《교육조칙》 전문 _300
참고문헌 _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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